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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계시록 설교

사데교회 - 계시록 3:1-6

by Peartree 2014. 8. 19.

사데교회

 계시록 3:1-6

 

영국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다섯 살짜리 한 어린 소녀가 잘못해서 넘어지는 바람에 손목이 부러졌습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손목을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내 손목이 이상해. 구부러졌어.”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울고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뼈가 부려져본 경험 있으십니까? 저는 뼈가 부러져본 경험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이가 손목이 부러졌는데도 울지를 안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소녀의 부모는 딸이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넓적 다리 뼈에 금이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전히 소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부모는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 후로도 소녀는 사소한 상처가 생길 때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런 상처를 볼 때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이상해, 언제 이렇게 되었지?”

그제서야 부모는 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큰 병원을 찾아 의사의 전문적인 진찰을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이 소녀의 증상이 신경조직의 잘못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무서운 병이라고 했습니다. 병명은 겡글리뉴로파디(ganglineuropathy) 라고 불리워지는데 치명적인 질병으로 아직 치료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픈 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면 고통도 없고 좋겠다 그렇게 생각되십니까?

생각해보면 이보다 무섭고 위험한 일이 없습니다. 아플 때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아픈데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병들었는데도 병든 줄 모를 것이고 상처가 나도 상처난 줄을 모릅니다.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결국 죽어가면서도 죽는 줄 모른 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문제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 영적인 아픔에 대해 통증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영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상태입니까?

영적으로 아무 고민도 없고, 문제도 없다면 영적 나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이 죽어가고, 아니 이미 죽었는데도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아픔을 느껴야  주님을 바라볼텐데 아픈 줄 모르니 이보다 더 위험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평안하고 안전한 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오시는 그 때에도,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여인의 해산의 고통과 같이 홀연히 임할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 사데 교회에 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데 교회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인들이 생각하는 자기 교회의 모습이 있고, 예수님께서 보고 계시는 사데 교회의 모습이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주님게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다고 했습니다. 누가 보아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사데 교인들 스스로도 살아있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도 살아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실 때 사데 교회는 죽었습니다. 주님 보실 때 죽었다면 실상 죽은 것입니다. 겉으로는 살았다고 되어 있으나, 그 속의 진실한 내용으로는 죽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집집마다 화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로는 불이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눈으로 보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릴 때 겨울철에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으레 화롯가에 먼저 손을 갔다 내밉니다. 뜨거운 기운이 있는 줄 알고 손을 내 밀었는데 막상 손을 내밀어 보면 불이 꺼진 화로가 많습니다. 싸늘하게 식어 있습니다. 겉모양은 있는데 속에 불이 없는 거예요. 불이 꺼진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사데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렇게 불꺼진 화로와 같았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데 교회는 교회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잘 갖추었을 것입니다. 잘 모이는 교회였을 것입니다. 예배도 잘 드렸습니다. 아름다운 찬양과 경건한 기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훌륭한 봉사도 있었고 또 체계적인 교육도 있었습니다. 좋은 프로그램도 많았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잘 갖추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보아도 살아 있는 교회라고 생각할 그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 보실 때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죽었다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이 없으면 끝난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단체입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의 은밀하고 살아 있는 교제요, 구원 받는 숫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이것이 없었습니다. 그 교회에 실제 주님이 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데 교회는 사람들끼리 모인 사람들만의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인간들만의 집단이 될 때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그것은 이미 죽은 교회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누가 보아도 나는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출석도 잘 하고 예배도 잘 드립니다. 봉사도 합니다. 헌금도 하고 경건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명력입니다. 내게는 신앙의 참된 생명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앙의 생명을 복잡하게 정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따라서 생명이 있다는 말은 주님과 내가 연결이 되어 있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 받고 있냐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기 위해서는 주님과 교통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데 교회가 왜 죽은 교회가 되었는가 하는 이유입니다. 사데는 역사적으로 볼 때 어려움이 없었던 도시였습니다. 당시 대부분의 다른 도시들이 우상숭배로 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사데에는 우상숭배로 인한 특별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다른 지역처럼 유대인들이 성도들을 괴롭히지도 않았습니다. 교회 내에 이단이나 반대 운동이 벌어진 일도 없었습니다. 환난도 시험도 없고, 핍박도 없었던 그야말로 형통하고 은혜로운 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사데 교회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이, 아픔을 느끼는 못하는 것이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 꿈의 교회는 아픔이 있습니까? 아픔이 있다면 감사해야 합니다. 그 아픔을 통하여 다시 주님 붙드는 것입니다. 그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그 아픔 때문에 주님 더욱 의지하고,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하루는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탄이 부하들과 함께 모여 기독교인 전멸 작전을 펴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첫 번째 부하가 보고합니다. 두목님, 예수쟁이를 넘어뜨리기 위해 저는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사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자의 입 앞에서도 평화스럽게 기도를 하더군요. 그래서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부하가 보고를 합니다.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쟁이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그랬더니 그들은 그 폭풍 속에서 찬송을 부르더군요.” 그래서 저도 실패했습니다.

이렇게 전부 실패보고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가장 똑똑한 부하가 보고를 합니다. “두목님 저는 성공했습니다.전부 놀라서 묻습니다. “어떻게 성공했습니까?” “저는 한 교회를 찾아가 10년 동안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육과 영이 완전히 다 썩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생명력입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가 물살을 거슬려 올라가듯이 살아 있는 신앙도 악과 싸우고 유혹과 싸우고 시험과 싸우면서 전진합니다. 어려움과 싸우는 가운데 신앙은 더 힘을 얻고 강해집니다.

그러나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때, 경계를 풀게되고 점점 안일에 빠지게 되며 나중에는 겉모양은 살아 있으나 실제 생명력은 다 상실한 죽은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경계해야 합니다. 평안할 때야말로 가장위험한 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데 교회의 가장 안타까운 점은 실상은 죽었지만 스스로는 살아 있다고 믿었다는 점입니다. 자기의 모습을 모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내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본 내 모습에 속아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나의 적라라한 모습을 알고, 죄 많은 내 모습, 욕심 많은 내 모습, 겉 모양에  치중하는 내 모습을 인정하고 해야 합니다.

 

사데교회의 모습이 내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살았다는 이름에 속지말아야 합니다. 죽었다는 주님의 선언을 순전한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여기서부터 다시 주님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여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사데교회를 죽었다고 선언하신 주님은 이제 다시 살길을 촉구하시고 보여주십니다. 첫째는 깨어라고 하십니다. 2절에 너는 일깨어 라고 했습니다. 3절에도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라고 했습니다. 일깨라는 말은 정신을 차리라는 뜻입니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면서 영적인 잠을 자지 말라는 것입니다.

늘 깨어 좁은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데교회가 다시 사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렇기 하기만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5절에 이기는 자는 흰옷을 주시고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준비해 주신 하얀 세마포를 입혀 주신 다음에, 천국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 축복, 구원의 축복을 주신 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인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도, 평안 하다 안전하다 하면서, 졸며 잠자는 신앙이 아니라, 늘 깨어, 용사 처럼 뛰고 달려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