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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계시록 설교

버가모 교회 - 계 2:12-17

by Peartree 2014. 8. 19.

                                 버가모 교회                                 2:12-17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들마다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외부의 침입 의해서 멸망당하는 경우보다는 내부의 분열로 서로 싸우다가  망하게 된 적이 더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 사탄 마귀도 이것을 아주 중요한 자신들의 전략 도구로 삼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의 가장 무서운 적은 외부의 핍박이나, 공격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은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 말씀안에 깨어 있으려 하고, 하나님께 매달려 부르짖어 기도 하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적은 사탄의 달콤한 유혹입니다. 돈의 맛을 느끼게 해 주고,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맛보게 해줍니다. 세상의 여러 재미들을 경험케 함으로 자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 예들을 우리는 성경 여러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버가모교회는 바로 이러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감으로 주님께 책망받았던 교회였습니다.

 

버가모 라는 도시는 앞서 보았던 에베소처럼 크고 부유한 도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학문의 중심지였고, 소아시아 지역의 행정수도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던,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행정수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황제숭배의 메카였습니다. 따라서 황제의 신상을 비롯한 갖가지 신상과 신전들이 즐비하게 건설되어 있었던 도시가 바로 버가모 라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본문13절을 보시면, 주님께서는 이 지역을 가리켜 “사단의 권좌가 있는 데”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보더라도 죄악이 얼마나 극에 달해 있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버가모교회는 이렇듯 각종 우상들이 압도하는 도시 한 복판에서, 고군분투하며 영적 싸움들을 싸워 가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이런 싸움 가운데 안디바라고 하는 믿음의 형제가 순교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 어떤 핍박이 와도, 심지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주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꿋꿋이 지켜왔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실했던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오늘 그 이유를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본문 14,15을 보시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여기 보시면버가모 교회에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서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발람의 교훈이 어떤 것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발람이 누구입니까? 민수기24장을 보시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여정을 거의 마치고, 모압평지에 진을 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 올것을 알고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것을 주변 나라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압왕 발락이 당대 가장 유명하다고 하는 발람선지자를 데리고 오게 됩니다. 그리고 발락은 발람 선지자에게 많은 돈을 쥐어 주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안되잖아요)

그런데도 발람은 돈 때문에,  발락이 시키는대로 제단을 쌓고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하나님의 신이 그의 입에 임합니다. 그래서 입을 벌려 저주를 하려 할 때 마다 오히려 축복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저주하려고 해도 축복의 말이 나오는거예요.

 

그러자 발람은 이스라엘을 무너뜨릴 다른 꾀를 내게 됩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우상의 제물을 놓고 여인들을 두어서 그들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란한 행위들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염병이 돌아서 이스라엘 자손 이만 사천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얼마나 수고로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해 왔습니까? 어쩌면 모압의 백성들이 창과 칼을 가지고 맞서 싸우려 했다면, 열심히 피흘리기까지 싸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과 칼이 아닌 평화를 선언합니다. 와서 함께 먹자고 하면서 모압의 아릿다운 여인들이 유혹합니다. 신전에 찾아가 한번 두번 먹기시작하고, 급기야 그곳의 여인들과 음란한 관계들을 맺어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축복에서 떨어지게 한 것은 광야의 혹독한 기후나 궁핍한 생활에 있지 않았습니다. 혹은 모압의 칼과 창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발람의 달콤한 유혹 앞에 걸려 결국 넘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니골라당 교훈 역시 마찬가지 였습니다.

이 니골라 당은 영과 육을 구분하여 가르쳤던 대표적인 이단사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즉 성도는 영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육체는 어떻게 행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구원파 이단처럼 구원받았으니 이제 더 이상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던 것이지요. 당시 성도들에게는 너무도 달콤한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다고 하지요, 몸으로는 어떻게 행해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하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음껏 무절제하고, 마음껏 음란한 행위들을 하며, 마음껏 방종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버가모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큼, 외부적인 핍박을 잘 참고 견뎌왔습니다. 훌륭한 순교자도 배출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편안하고, 자유한 삶이 주는 유혹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파고드는 죄의 유혹앞에 교회는 더 이상 전투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과 타협하는 세속적인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남들과 똑같이 살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적당히 타협해 가면서, 믿는자와 믿지 않는자가 서로에게 거슬리지 않게 살면 모두가 평화로울것 같죠.

(WCC 가 그런 것입니다. 서로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잘 지내 보자는 것입니다.)

적당히 세상에서도 평화롭게 살다가, 또 구원 받아 천국도 가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십자가의 복음은 언제나 세상의 반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크리스천들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 할때, 세상은 늘 불편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너만 꼭 그렇게 유별나게 믿으려고 하냐? 꼭 그렇게 해야 믿는거냐? 라고 하면서 적당히 믿으라고 하죠.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적당히 믿으라 고 유혹합니까?

평안할 때 성도는 오히려 더 타락하기 쉽기 때문에, 타락시키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두 번 적당히 믿어보니까신앙생활이 쉽고 편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엔 세상과 전혀 구별이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떻습니까?

 

어떤면에서 지금 이 시대는 예수믿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가거나 핍박과 박해를 받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귀의 공격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늘 영적인 긴장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앞에 누구도 장사가 없습니다. 다 속수무책으로 넘어질 수밖에 없지요. 목사인 저도 말할것도 없구요...

 

야고보서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하나님은 나란히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추구하고 있는 것이 세상과 같다면, 하나님과 대적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일서 2:16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아버지께로부터 온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 세상에 있으면 죄지을 것밖에 없네... 죄 안짓고 살려면 어디 저 Mountain 같은데 들어가서 성도들끼리 마을하나 만들고, 공동체 생활 해가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나?그래서 실제로 미국의 아미쉬 공동체 마을 같은데 가보시면 세상과 단절하여 자급자족해가면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서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늘 버가모교회 역시 사단의 권좌가 있는, 너무도 위험천만한 곳에 있는 교회였지만, 주님께서는 당장 짐싸서 그 버가모를 떠나 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면서 끊임없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거짓된 문화와 싸울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땅에 살고 있지만 이땅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대의 문화를 따라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무엇이라 말하든지 여러분의 귀는 항상 하나님께로 향하여 열려 있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뭐 성도는 이땅에 살면서 누리는 것도 하나도 없네... 재미도 하나도 없고, 그게 뭐야?” 우리가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와 영광과 그 감격을 누리는 것이지요.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가질 수 없는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평안과 기쁨... 영혼의 참된 안식, 예배의 즐거움,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 이런 것들이 성도들만 가지는 비밀이지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 비록 어리석은 길 같아 보이고, 손해보는 삶 같아 보이지만, 그 길의 끝은 천국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12절을 보시면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나옵니다. 또한 16절에도 보시면 -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주님이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겠다 하신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사탄이나 악한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짝하며 세상의 즐길것 다 즐기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려 하는 자들과 싸울것을 경고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의 행위를 돌이켜 회개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고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기는 자에게는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감추인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추인 만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성도만이 알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생명의 양식인 것입니다.

 

이땅의 모든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은 외적인 핍박보다 훨씬 더 무서운 싸움입니다. 마귀는 시시각각 우리에게 달콤한 것들을 보여주며 유혹해 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마귀는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올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대의 헛된 가르침에 속지 말고,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우리 앞에 당한 이 싸움을 끝까지 싸워서 승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