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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계시록 설교

두아디라 교회 - 고후 12:1-10

by Peartree 2014. 8. 19.

                                 두아디라 교회                                고후 12:1-10

 

오늘은 소아시아의 네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두아디라 도시는 지난 주 살펴본, 버가모 도시에서 동남쪽으로 45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이름도 별로 알려지지 아니한 보잘것 없는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금 동전을 찍어내거나, 무역이 발달한 도시가 아니라, 직조업과 염직업이 (방직 공장, 봉제업) 성행했습니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 직공과 상인들을 위한 조합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조합을 요즘 한국 말로, 노조라고 하는데, 미국에서는 ‘labor union’ 이라고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사도바울의 동역자 자주장사 루디아 가 이곳두아디라  출신입니다. 역시 루디아도 두아디라 출신답게, 염직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루디아를 자주 장사 라고 했냐면, 당시에 염직업이라고 하면 자주빛 옷 을 만드는 사람들을 일컬었습니다. 당시에 자주빛은 아주 부자들이 즐겨 입었던 색상이었습니다.

유행하는 색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왕에 천에 물감을 매기려면, 잘 팔리고 비싼 자주색 천을 많이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곳 두아리라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다가 노동자였던 것입니다. 이곳에 두아디라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생활 수준이 거의가 서민적이라 그런지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도 아주 서민적이고 순수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19절을 보시면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안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어떤 일들을 하고, 그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믿음과 섬김의 본을 보이며, 삶이 힘들지만 참고 인내하며 하늘의 소망을 바라본다.’ 라는 것입니다.

, 꿈 같은 교회입니다.

교회안에 부자는 없지만, 서로 사랑하면 섬기며, 인내하는 교회……

 

그런데요. 이런 꿈 같은 교회안에도 문제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두아디라교회에 어떤 문제점들이 있었는지 살펴 보며, 그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입니다.  그 교회의 문제점은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여 비록 가진 것은 많이 없었지만,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했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겼고 어려움속에서도 참고 인내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모습이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졌다고 주님은 칭찬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이 세월이 가면 갈수록 점점더 나아지는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교회였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중에 이세벨이라고 하는 거짓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세벨이 어떤 사람입니까? 이세벨은 여자입니다. ‘이사벨라 라는 화장품이름이 이 여자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그는 구약시대의 시돈 왕인 엣바알의 딸인데 (왕상 16:31)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의 아합왕의 왕비가 된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이스라엘 나라로 시집을 오면서 자기 아버지가 섬기던 바알신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신을 섬기도록 강요했습니다.

만일 거부하는 자가 있으면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이때 죽임을 당한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봇이라고 하는 포도원 주인이었습니다.

이 당시에 활동한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 선지자인데, 그가 갈멜산에서 바알신을 섬기는 제사장들과 싸운 일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있고나서 엘리야는 이세벨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멀리 광야로 도망을 갑니다.

불같은 능력을 받았던 엘리야 선지자도 이세벨 앞에서는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정도로 아주 악명놓은 여자였습니다.

이렇게 모든 이스라엘 벡성들을 공포에 떨게 한 사람이 바로 이세벨입니다.

 

결국에는 이 여자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에서 멀어져, 타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세벨같은 선지자가 두아디라 교회안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을 타락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타락시키고 있었냐면요.

앞에서 두아디라 도시는 상공업도시이기 때문에 직공과 상인들을 위한 많은 상인 조합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Labor Union’  키 포인트

그래서 때때로 조합원들이 모여서 회식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회식을 할 때에는 꼭 이방신전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방신에게 경배하는 종교적 행사로 회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상앞에 절을 하고는 회식을 시작하는데 그 때 그들이 먹는 음식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신앙양심상 참여하기가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참여하지 않으면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사회에서 소외되고 조합원의 권리와 이익까지도 배당받지 못하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에 자칭 선지자라고 하는 여선지자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여자가 고민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어 어떻게 가르쳤냐면,

그는 하나님앞에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즉 육체는 어떻게 되든지 영혼만 깨끗하면 그것이 정말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몸을 팔아도 온 몸이 망가져도 내 마음만 더러워지지 아니하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 이단의 이론입니다.

 

20절을 보세요.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성도들을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여선지자 이세벨의 가르침은 먹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던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생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살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노동조합에 참석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생겼었는데, 참석할 수 있는 구실을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성도들은 아무 꺼리낌없이 회식에 참석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행음하면서 타락의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하며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처세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세속화된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의 문제점이었습니다.

 

2.  두번째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극복하는 방법은 타협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24절을 보시면, 주님께서는 두아디라교회에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이세벨의 거짓 교훈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이 사람들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고, 사단의 가르침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은 순수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5절에 말씀합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그 순수한 믿음 변치 않고 끝까지 붙들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나 사탄의 거짓 가르침과 타협하지 말고, 진리만을 굳게 붙잡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수였습니다.Remnant

그들은 다른 성도들이 세상으로 달려갈 때 같이 따라가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않았고 회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문에 그들은 조합원의 권리와 이익을 배당받지 못했고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 싫어하지만,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세상이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이 싫어 할 확률이 99%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세상은 주님과 반대의 편에 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을 따라가는 생활은 세속적인 생활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사탄 마귀와 타협하지 않고 믿음의 절개를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노아가 그랬습니다. 세상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산 꼭대기에 방주를 지었습니다. 120년 동안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지면서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모두가 순교하면서 신앙의 절개를 지켰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부르시는 사람은 주의 신부들 이라고 말씀합니다. 절개를 지키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 같은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러분 진짜 성도는 타협하지 않는 성도입니다.

오늘날 마귀는 성도에게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사탄 마귀가 교활한데요. 요즘의 마귀는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고, 죄와 타협하게 만듭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에 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조개껍질에 붙어서 조개를 빨아먹는 쇠고둥 이라는 것을 보셨습니까? 바닷가에 가면 바위에 다닥 다닥 붙어 있는 것들이 다 쇠고둥이라고 보며 됩니다.

이 쇠고둥이 조개에 붙으면, 아주 천천히, 아주 오랬동안 조개에 구멍을 낸다고 합니다. 1년이건 2년건 뚫릴때까지 붙어서 구멍을 냅니다. 그리고는 구멍이 나면 그 아주 바늘 구멍만한 작은 구멍을 통해서 조갯살을 천천히 빨아 먹는 다고 합니다.

그래도 조개는 모릅니다. 자기가 죽어가는지 몰라요. 아주 천천히 붙어서 빨아먹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껍질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조개를 살리기 윈한다면 이 쇠고둥을 죽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세상의 것들이 서서히 침투해 들어와서, 적당히 하라고 하면서 서서히 우리의 신앙생활을 변화시킵니다. 그러다가 결국 형식만 남게 하고, 믿음은 세상으로 다 빨리고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의 타협은, 이세벨의 거짓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그대로 방치하고 산다면, 언젠가는 속이 텅빈 껍데기 신앙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아디라 교회는 장점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잘 살지는 못했지만, 서로 사랑하고, 믿음의 인내를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용납했습니다. 20절 중간에 보시면, 이세벨을 네가 용납했다고 말씀합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았었는데, 이것 때문에 교회가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22절에 보시면 회개하지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겠다 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지키는 방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신부 같은 삶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너무나 기뻐하시고,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신랑으로 오실 때, 그런 사람들이 주의 신부로 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