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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7월 14일 주일설교 : 감사하면 풍성해집니다. - 골 3:15-17

by Peartree 2013. 7. 21.

감사하면 풍성해집니다.

  3:15-17

 

보통 20대 이전의 얼굴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4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살면서 마음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얼굴 모습이 변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버마의 저스틴이란 선교사님은 얼굴이 아주 못생긴 편에 속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기쁨의 얼굴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 비결은 늘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얼굴의 이목구비는 잘생기지 못했을지라도 늘 감사하는 삶을 산다면, 그 얼굴까지 변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도 늘 불평과 탄식하는 얼굴을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께서도 고개를 돌리실지도 모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감사하고 찬양하며 나오는 자를 기뻐하시고 품에 품어 주시는 분입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마귀의 세계에는 감사가 없다 고 말했습니다. 마귀의 세계는 항상 원망만 있지 감사는 없습니다.

설교를 하도 잘해서 황금 이빨이라는 별명을 얻은,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죄 중의 죄는 감사하지 못하는 죄 라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도 감사하는 사람은 젊어진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시편 50:23절에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한다 고 말씀합니다.

 

감사


인간은 타락한 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천성 중에 두드러진 성품이 불평하는 것입니다. 불평은 안 가르쳐 주어도 어릴 때부터 잘 압니다. 그리고 불평은 그 원인이 마귀에게 있습니다. 마귀는 불평의 아비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인간에게 불행을 가져다 줍니다.

 

원망은 자꾸만 없는 것을 생각 할 때 원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요 감사는 내가 가진 것을 생각할 때 시작됩니다. 없는 것을 보면 자연 원망과 불평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가진 것보다는 못 가진 것들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100% 다 누리며 살기는 불가능합니다. 부자이면서 가정도 행복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머리가 좋고 얼굴도 잘 생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런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요 가진 것보다는 못 가진 것을 더 크게 보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을 만드신 뒤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구분하는 선악과 만큼은 금단의 열매가 되게 하셨습니다. 절대 따먹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는 그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들중에 0.1%도 안 되는 아주 작은 부자유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자기들이 누리는 99.9%의 자유함 보다는 선악과라는 그 지극히 작은 부자유함이 영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못 가진 것, 선악과에 의해서 눈이 가려졌습니다. 0.1% 때문에,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가진 것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그 못 가진 것 하나를 갖고자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도 참담한 것이었습니다.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왜 감사가 없습니까? 있는 것은 보지 않고, 없는 것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면, 남을 탓하고 환경을 탓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이든지 잘 안 되는 것은 남의 땃으로돌리거나 환경 탓으로 돌리는 것이지요. 사업이 망하게 된 것도, 질병에 걸린 것도, 이혼한 것도, 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게 되면 이웃도 불행하게 만들지만 가장 먼저 내 자신이 불행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남을 탓하지 말고 누구누구 덕분에 내가 잘 되었다고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 인생도 행복해질 수가 있습니다. 직장 생활하는 분은 우리 사장님 덕분에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합니다. 거꾸로 고용주가 되신 분은 사원들 덕분에 회사가 잘 굴러간다는 사실을 감사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을 탓하는 대신에 누구누구 덕분에 건강하고 잘 살고 모든 일이 잘 된다는 사실을 감사하면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됩니다.

 

미국 Texas 주의 큰 정신병원의 구급차 운전수로 일해 온 사람이 있었어요. 어느 날, 이분이 정신병 환자를 병원에 내려 놓고 차를 돌리려고 하는데 병원의 윗층 창문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 좀 보시요!’ 운전수는 병실 위를 바라보며 나를 부르는 겁니까?’ 라고 했어요. 그러자 병실 창문에서 어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렇소. 그런데 내가 당신에게 한가지 물어 보아도 되겠오?’ 당신은 건강한 정신을 가졌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본 일이 있오?’라는 것이었어요. 그 운전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 환자의 질문이 머리에서 맴도는 것이었습니다. “ 그렇구나, 나는 15년 동안 이 병원에서 일하며 매일 정신병 환자를 운반하면서도 나의 건강과 정신에 대하여 한번도 감사해 본 일이 없었구나!”

 

어떤 분이 태어난 애기의 손가락을 하나씩 세면서 열 손가락을 다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감사를 하지 않는 인생은, 마치 돼지가 도토리 나무 밑에서 떨어진 열매를 잘 줏어 먹으면서도 그 도토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위를 한번도 바라보지 않는 것과 같은 인생이예요.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의 뚜렷한 특징인 것이다.

 

그래서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두 가지 방법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불평의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욥일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루 아침에 망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허락을 해주어서 고난과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제가 누구입니까? 의로운 욥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단이가 날 망하게 하겠다는데 그걸 허락해 주십니까? 정말 원망스럽습니다.얼마든지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욥의 재산중에 양이 7, 약대가 3, 소가 5백 겨리, 암나귀가 5백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도둑맞게 하고 벼락 맞아 죽고 불에 타 죽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습니다. 욥기 1 21~22절에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욥의 아들딸 10남매가 맏형의 집에서 잔치하고 있을 때 대풍이 불어와서 네 모퉁이를 쳐서 10남매가 깔려 몽땅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사탄이 욥의 몸을 쳐서 온몸에 악창이 나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나 자기가 태어난 날이 없었으면 좋을 뻔했다고 할지언정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욥의 처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했을 때도, 아내를 책망하면서도 그 입으로 하나님을 욕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불평원망이 얼마나 큰 죄이기에 사탄이 욥의 입으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하려고 했는데도 꿈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결국 패배하고 도망갔고 욥은 그 전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으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불평은 죄 아닌 것 같으면서도 큰 죄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자꾸 우리안에서 불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습관은 어떤 행위를 하고 또 하고 반복할 때 생기는 것이 습관입니다. 불평하는 습관을 갖게 되면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고 불행한 일이 찾아오게 되고, 감사의 습관을 갖게 되면 성령의 지배를 받게 되고 행복한 날이 찾아오게 됩니다.

 

불평은 한 번, 두 번 자꾸 해버릇하면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사탄의 노예가 되고 불행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걸핏하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게 하려고 이끌고 나왔느냐”, “이 박한 식물을 먹기가 지겹다”, “차라리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애굽에서 종살이할 때가 더 좋았다” 하며 불평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 안 믿을 때가 더 좋았다”라고 하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겠다” 하고 불평하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리” 하시고 기성세대가 다 죽을 때까지 광야를 맴돌다가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불평대로 된 것 입니다....

 

불평, 원망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불평이나 원망은 다른어떤 악습보다 더 위험하고 해로운 습관입니다.

 

여러분, 음식점에서 음식을 사먹다가도 웬만하면 맛이 없어도 맛없다고 불평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거의 습관적으로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맛없다고 불평하면 맛있게 먹던 사람도 금방 맛없게 느껴집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장점을 들어 좋게 평가하는 버릇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을 혹독하게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큰 해를 끼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기 자신에게도 해롭습니다. 저 사람 가까이 하다간 나도 피해를 보겠구나. 멀리하자”,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우리안에 불평의 습관이 있다면, 그 습관을 감사의 습관으로 바꾸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2. 두번째로, 감사하는 삶을 살려면, 감사의 습관을 키워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기독교 문화의 영향 아래 살기 때문에 감사의 습관이 몸에 베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Thank you” 혹은 “I appreciate” 이런 말이 몸에 베어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데...동양 사람들은 감사의 습관이 안 되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고난과 슬픔을 통과한 사람에게 복주시기를 즐겨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고난 없이, 슬픔없이 복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중에 좋게 해주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저주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을 신학용어로 변장된 축복 또는 위장된 축복 이라고 합니다.

고난도 슬픔도 축복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슬픔이 벌써 축복의 시작으로 접어 든 것을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여러분 의사가 우리의 병을 치료해주려고 아픈 주사를 놔주고 쓰디쓴 약을 먹이려고 하는데 의사에게 불평하고 욕하고 멱살을 붙잡으면 얼마나 고약하고 무례한 행동이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축복주시려고, 고난과 슬픔을 주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그 위장된 축복을 몰라요.

 

어느 분이 감사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좋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좋으신 분이기 때문에 감사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It is not because things are good that we are to thank but because he is good).

 

여러분, 감사는 축복의 문을 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불평은 축복의 문을 닫는 방법입니다.

이스라엘에는 3대 감사절기가 있습니다. 3대 감사 절기중, 초막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절기는 광야에서 고생하던 때를 상기하면서 들에 나가 나뭇가지로 초막을 짓고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40년동안 광야에서 고생하던 때를 감사하는 절기예요. 이게 무슨 감사할 일입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그 광야에서 고생하던 그 때가 너무 감사해서, 그 감사절에, 광야에 나가 초막을 짓고, 거기에 머물며, 그 고생하던 시절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라는 명령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까?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6:19-20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시는데, 만나는 하루의 양식입니다. 그날 먹어야 합니다. 그날 먹지 않고 남겨두면 썩어서 그 다음 날 먹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날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다음날 다시 주십니다. 그날 그날 주신 것, 썩여 두지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날 또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바 은사를 사용할 때를 놓치면 은사는 소멸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둬 가시는 것입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면 계속 감사할 마음이 남아 있어서 다른 것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마음이 사라집니다. 계속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원망이 틈을 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자전거 타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아서 앞으로 갈 때 바로 서서 앞으로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속도로 가든지 조금 더 가속하던지 할 때 바로 서서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다 속도를 줄인다든지 페달을 아예 밟지 않으면 점점 비틀거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쓰러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사람이 되었어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도, 우리가 계속해서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조금씩 원망이 틈을 탑니다. 점점 감사보다 원망이 많아집니다. 나중에는 감사는 간데없고 원망만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어제 감사했다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더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가난한 모자가 살았습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가난에 시달리는 어머니는 남의 집 세탁, 재봉, 청소 등으로 아들의 학비를 조달했습니다. 그런데 일 할 수 있고, 아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서 그 어머니의 입가에는 늘 감사가 넘쳐났습니다. 또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고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프린스톤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어요. 그는 프린스턴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면서 졸업연설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그를 우등생이 되게 한 것 같아요. 그래서 졸업식에 어머니를 초대합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들 졸업식에 입고 갈 변변한 옷 한 벌조차 없는 거예요.

하지만 옷이 없어도 감사하다고 하며 아들의 졸업식 맨 뒷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그러면서 그 어머니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어요.

 

이 젊은이는 뒤에 변호사가 되었고, 모교인 프린스톤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1902년 그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8년 후 뉴저지 주 지사가 되었으며, 다시 2년 후에는 미국의 제 28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우드로우 윌슨대통령입니다. 그 후에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할 줄 아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감사는 항상 더 큰 복을 불러와 더 큰 감사 제목을 만들어 냅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더 큰 일로 감사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감사로 영광을 받으신 후 더 큰 감사로 더 크게 영광을 받으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더 큰 감사 제목이 이어질 것입니다.

 

불평의 옷을 벗어 버리고 감사의 옷을 입으십시오. 옷 입는 것은 버릇입니다. 습관입니다.

 

감사도 그렇게 일상적인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