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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두날개/회개와믿음

*폴 워셔 목사님의 교회에 대한 열 가지 기소장 중에 아홉번째 고발*

by Peartree 2012. 12. 31.



아홉 번째 고발. 이것은 가정을 꾸린지 얼마 되지 않은 나이든 사람으로서의 저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나는 30세가 되어서야 결혼을 했습니다. 내 아내는 처음 8년 동안 약간의 뇌종양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가질 수 없었는데, 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기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태어났고, 그 다음에 또 하나가 태어났는데, 그 다음에는, 누가 알겠습니다? 
심리학과 사회학이 가정에 관한 성경말씀을 대체하였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목사님들, 지도자들은 이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교회는, 더 잘 말하자면, 우리의 주일 아침 예배는 너무 겉치레적입니다. 아름다운 예배가 있었고 설교가 잘 되었고 사람들이 감동받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증거는 아닙니다. 증거가 무엇인지 말씀드리죠.   
가정, 결혼, 가족입니다.  
사사기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면, 내가 모든 종류의 사람들과 대화하기 때문에, 독실한 아이들을 길러낸 독실한 사람을 찾고, 가서 그 사람에게 달라붙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내가 무엇을 알아내는지 아십니까? 내가 교회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줌마들이나 하는 허탄한 이야기들과 사회학과 이것저것과 다른 모든 것들과 자기들이 보기에 좋은 것들뿐이고, 한 구절의 성경 구절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나는 자신의 가정을 성경말씀대로 꾸려 나가려는 남자와 여자를 찾게 되는데, 그 차이는 압도적입니다. 나는 비행기 안에 있을 때 이렇게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내 옆자리에 사람들이 앉을 것이고, 그들은 “무슨 일 하세요?” 라고 묻습니다. 
나는, “아, 나는 남편이예요.” 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 그 밖에 또 무엇을 하세요?” 라고 묻지요.  
“아, 나는 아버지예요.”  
“그 외에는 무엇을 하세요?  
“음, 시간이 남으면 설교 조금 합니다.”  
사람이 전 세계를 얻어도 자신의 가정을 잃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을 그냥 이런 식으로 표현하겠습니다. 무엇에 의거해서 당신의 자녀들을 키우고 있으며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탕으로요? 지금 당장 성경말씀으로 가서 말씀들을 끄집어내어 어떻게 당신의 가정이 그 말씀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심리학과, 사회학과, 일시적 기분과, 이 시대의 거짓말들의 포로라는 것을 나는 보증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당신은 권위도 없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말이죠.  
창세기 18:19을 봅시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그리고 들으십시오. 로마서 12장 1절과 2절, 아니 2절은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는 나의 사역을 위해서 내 가정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면, 내가 말하겠는데, 당신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쟁이 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세우려고 하는 작은 왕국을 위해서 당신의 가정을 희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의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위반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순종하기를 갈망하십니다. 당신이 순종하기를.  
여러분에게 두 가지만 예를 드리죠. 이것은 한때 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던 때와 같습니다. “폴 형제, 당신은 전도에 반대하십니까?”  
나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나는 성경적인 전도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하고 있는 방식에는 반대합니다.”  
“당신은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에 반대하십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내가 여러분께 무언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 여러분 중 일부에게는 내가 충분치 않을 것이고, 다른 일부에게는 내가 너무 지나칠 것입니다. 나는 우리에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하기 위해서 이 두 가지만 사용하기 원합니다.  
주일학교입니다. 당신이 무슨 교파에 속했든 간에, 만일 일종의 조직적인 교파에 속해 있다면, 당신의 교파가 주일학교 교재와, 어떻게 주일학교를 가르칠 것인지 선생들을 가르치는 집회와, 주일학교를 성장시키기 위해 책에 있는 모든 것을 하는데 수십억을 쓴다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당신의 교파가 얼마나 많은 돈과 얼마나 많은 집회와 노동력을 아버지들이 자기 자녀들을 가르치도록 가르치는데 쓰고 있습니까? 이제 아시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두 번째 계획이 없으십니다. 그분은 첫 번째 계획만 있으십니다. 여러분이 첫 번째 계획을 피해가면 두 번째 계획은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나는 아이들이 그룹으로 모여서 교리문답을 받거나 가르침을 받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가정에서의 아버지의 사역을 대체한다는 암시를 주기 시작한다면, 그것들을 산산조각 내 버려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단지 그 조그만 경우 하나를 보십시오. 모든 것을 주일학교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일학교를 위해서. 그러나 이 나라 전체에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그들의 자녀를 가르칠지를 가르치기 위한 집회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들이 여러분의 아이를 훈련시킬 권위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 주일학교는 오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에게 권위가 있다 해도 그들은 훈련의 가치를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작은 예일 뿐입니다. 중고등부를 봅시다.  
“글쎄요, 청소년들은 함께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들은 모일 필요가 있습니다.”  
좋습니다, 자, 봅시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누가 청소년들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까? 누가 그렇게 말했나요?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말씀드리죠. 1960년대의 심리학자들과 세대차이입니다. 청소년들은, 천진난만한 바보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멈추고 어른스럽게 되고, 파괴로 인도하는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도록, 어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청소년들을 함께 모으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면 그들의 모든 부모들도 거기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말합니다. “그럼,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부모 잃은 청소년들은 어떻게 합니까?” 
글쎄요, 그들이 지금 무엇을 보고 있나요? 부모 잃은 청소년들은 교회의 기독교 청소년들에게로 와서 자기 자신의 집에서 보는 것과 거의 똑같은 것을 봅니다, 부모도 없고, 애들이 애들을 가르치고. 아니면 머리에 무스를 바른 약간 더 나이든 아이가 당신의 애들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만약 부모 잃은 아이가 당신의 교회로 와서 거기서 아이들을 본다면, 그들의 부모와 총체적으로 사랑의 놀라운 관계를 가지는 청소년들을 본다면 어떨까요? 그들은 “와, 이런 것은 전에는 본적이 없다. 그의 아빠 좀 봐라. 그는… 그는 그의 아빠를 사랑하는구나. 이것 좀 봐라… 그러니까 이게 기독교 정신이라는 건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친구 여러분, 나는 의사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와서 “폴 형제, 나는 다 다녀봤습니다. 아무도 나의 문제를 진단해 주지 못합니다.”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글쎄요,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당신을 24시간 동안 따라다녀 보겠습니다.”  
그리고 시계가 정각이 될 때마다, 만약 한시가 되면 그가 벽돌로 자기 이마를 한번 치고, 두시가 되면 벽돌로 자기 이마를 두 번 치고, 열두시가 되면 벽돌로 자기를 열두 번 치는 것을 내가 알아냈다고 합시다. 24시간 동안 기록을 하면서 조심스럽고 주의 깊게 이것을 관찰한 후에, 나는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저기요, 내가 당신의 문제를 알아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당신의 문제를 알아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여, 우리가 그 정도로 측은합니다. 왜 우리 아이들이 그런 일을 하느냐구요? 왜 모든 것이…?  
그것은 한 늙은 성도분과 같은데, 그에게 누가 한번은 물어봤습니다. 그는 그의 10대 아들이 젊은 아가씨와 함께 어떤 조용한 장소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들을 못 믿습니까?”  
그는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내 아들을 못 믿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나는 그의 아빠도 못 믿습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도 그의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 함께 단둘이 있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이보다 훨씬 더 잃을 수 있는 것이 많은 데도요. 나는 넘치는 호르몬이 있는 10대보다 나의 의지력을 더 잘 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무엇이 내가 그렇게 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까?  

우리는 성경적 원칙들을 하나하나 위반합니다. 그리고는 왜 모든 것이 엉망인지 의아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