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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두날개/회개와믿음

*폴 워셔 목사님의 교회에 대한 열 가지 기소장 중에 네번째 고발*

by Peartree 2012. 12. 31.



네 번째 고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무지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나라에 복음이 굳게 서 있지 않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나라는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 대해 무지합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이 나라의 병폐는 자유주의적 정치인들도, 사회주의의 근본도, 헐리우드나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소위 복음주의 목사와 우리 시대의 설교자와 우리 시대의 전도자입니다. 거기에 병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모릅니다. 우리는 마지막에 하는 약간의 미신적 기도와 함께 우리의 축복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사영리’와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 원하시는 다섯 가지’로 축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우리가 하는 기도를 충분히 진지하게 따라하면 그들이 거듭났다고 천주교적으로 선언합니다.  
우리는 ‘중생’을 ‘결심주의’와 맞바꾸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을 단 몇 분 동안 말한 후에 얼마나 많은 30, 40대의 신실한 분들이 나에게 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는지 아주 놀랍습니다. “폴 형제, 내 인생에서 이런 것은 한 번도 들어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속죄와 화해의 역사적 교리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이 복음에 대해 말할 때,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그냥 분명히 얘기합시다. 복음은 하나님의 본성으로 시작해서 사람의 본성과 그로 인한 타락에 이릅니다. 거기로부터 시작해서, 그 두 복음의 위대한 기둥들은 모든 믿든 사람들의 입에서 위대한 딜레마 (진퇴양난) 라 불리고 알려진 것에 이르게 합니다. 그 딜레마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악한 사람들을 정당화 할 수 있습니까? 성경 말씀, 특별히 잠언의 한 본분을 인용하자면, “악인을 의롭다하는 자는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습니다” (17:15 – 역자 주). 그런데도 우리 모든 기독교 노래들은 얼마나 하나님이 악한 자를 정당화하시는지를 자랑합니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찰스 스펄전과 로마서를 세 번은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말했듯이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성채입니다.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것을 사람들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큰 문제는 하나님은 진실로 공의로우시며 모든 사람들은 진실로 악한데,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려면 악한 자를 정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사랑하신 위대하신 사랑을 두셨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던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이었던 그 계획대로 그는 그 나무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 위에서 그는 우리의 죄를 지고 그의 백성들의 법정에 서서 우리의 죄악을 지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것들에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저주에서 속량하시고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로마 제국의 상처 아래 고난 받고 나무에 달려 있을 때 아버지께서는 그 아들이 고난 받는 것을 볼만한 도덕적 인내심이 없어서 외면하셨다는 이런 낭만적이고 능력 없는 견해의 복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 죄가 되었기 때문에 외면하셨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라고 외쳤을 때, “그 잔에 뭐가 있었을까? 아, 로마의 십자가구나. 채찍이구나. 못이었구나.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추측해 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그 나무 위에서 겪으신 육체적 고난을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잔은 그 아들에게 부어져야 했던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지고,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버려지고, 하나님의 진노에 짓밟혀 죽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를 짓밟으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내가 독일에, 아니 유럽의 독일 신학교에 있었는데, ‘그리tm도의 십자가’ 라는 책, 존 스토트가 쓴 책이 아닌 다른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써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늘에서 사람들에 의해 그의 아들에게 주어진 고통을 보시고 그것을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로 여기셨다.”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 육체적 고통과 나무에 못 박은 것은 다 하나님의 진노의 일부였습니다. 그것은 피의 희생이어야 했습니다. 나는 그 사실로부터 아무것도 삭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친구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거기에서 멈춘다면 여러분은 복음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오늘날 복음이 설교되고 개인 전도에서 나누어질 때 내가 지금 얘기한 것들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거의 없을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 아래 짓밟히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속량하실 수 있었고, 자신의 신적인 공의가 만족되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면서도 악한 자들의 공의롭게 하시는 분이 되신다는 것이 결코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습니다. 
복음 축소주의. 우리는 왜 복음이 능력이 없는지 의아해 합니다. 이상할 이유가 없지요…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말씀드리죠. 여러분이 복음을 뒷전에 남겨두고, 여러분의 그럴듯한 복음 메세지라는 것에 더 이상 능력이 없을 때, 사람을 개종시키려면 요즘 가장 저명하게 사용되는 속임수나 상업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대부분, 아니 전부가 효과가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나의 친구 여러분, 이 말을 하겠습니다. 몇 년 전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나의 영적 삶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은 나를 학문의 세계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페루의 정글 한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거기서 나는 무언가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스펄젼이 말했듯이, “나보다 더 위대한 마음을 가진 더 위대한 사람들이 재림에 대한 이 교리에 접근했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위대하고 강력한 교리입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이 입장을 고수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과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드리죠. 이게 나를 아주 화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치 상담하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기독교로 들어오는 첫발걸음일 뿐이고, 그 다음에 더 훌륭한 것들로 넘어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들을 아는 지식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친구여, 재림의 날에 재림에 대해 여러분은 완전히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천국의 영원의 영원 속에 있으면서 갈보리의 하나님의 영광을 이해하는 것은 시작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젊은이들, 젊은 설교자들은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그분을 따라 그 나무로, 그것이 의미하는 것으로 나아가십시오. 여러분이 만약 그가 그 나무 위에서 하신 일, 그분이 그 나무 위에서 하셨던 그 일을 눈곱만큼이라도 안다면, 여러분의 오븐에 희한한 불을 지피는데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것을 나는 아주 좋아합니다. 이것을 나는 백 만 번은 말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산으로 데려갔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뭔가를 말하려고 하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아들은 전혀 저항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아버지는 자기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드려 자기 자신의 아들의 심장을 찌르려고 돌칼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머물러 있었고 그 노인은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 그 이야기의 결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것은 결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막간일 뿐입니다. 수 천 년 후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 그가 사랑하는 외아들의 이마에 손을 대고 아브라함의 손에서 돌칼을 취하여 그의 충만한 진노 아래 그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전하는 그 알량한 복음이 왜 능력이 없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돌아가십시오. 평생 동안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로부터 떠나십시오. 십자가를 공부하십시오.

 

  
친구 여러분, 이것을 직설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나는 여기에 칼빈주의자도 있고 아르미니우스파도 있고 그 중간의 온갖 종류의 동물들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비록 내가 스스로 5점짜리 스펄젼주의자라고 부르듯 이쪽으로 치우치기는 하지만, 이것은 아시기 바랍니다. 칼빈주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가 뭔지 말씀드리죠. 중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웨슬리와 레벤힐과 토저와 나머지 모두와 교제할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해 그들이 어떤 입장을 취했든 간에, 그들은 구원은 설교자에 의해 조작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광대한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었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성령의 중생하게 하시는 일에는 이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능력이 크게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타락한 인간으로부터 사람을 재창조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구세주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설교자라면, 설교하는 데는 선생들도 있고 설교자들도 있고 해설자들도 있고 이것도 있고 저것도 있는데 그들 모두가 다 교회의 건강을 위해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캠벨 몰건처럼, 그분이 그 위엄 있는 강대상으로 설교하러 올라갈 때 이렇게 스스로 인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털 깎는 자들 앞의 양같이.” 그는 광대하신 중생시키시는 성령의 나타남이 없이는 그가 하는 모든 말이 죽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런 의미에서 선포하는 우리 모두는 선지자로서 선포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구요? 우리는 항상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언제나 아주 메마를 뼈들이 있는 골짜기에 서 있는 에스겔입니다. 그 뼈들은 아주 메말라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거기로 가서 무엇을 합니까? 우리는 예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바람이 이 살육당한 이들 위에 불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 이것을 굳게 붙잡는다면, 이 나라에서 전도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이 행해지고 있는 조작에 더 이상 자신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선포할 것입니다.  
중생의 교리. 웨슬리를 보십시오. 잠시 동안 그들이 직면했었던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나의 친애하는 휘트필드, 그는 무엇이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철저히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글쎄요, 그들은 유아세례를 받았구요, 언약으로 인도되었습니다. 그들은 확증되었습니다. 그들은 악마처럼 살았습니다. 중생은 그 시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에 의해 권위가 주어진 어떤 신조와 맞바꾸어졌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웨슬리가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의 영혼이 바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거듭나지 않았습니다. 영적 삶의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자신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지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함을 받은 것을 확실히 하십시오. “여러분은 거듭나야 합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지난 몇 년, 몇 십 년간의 전도자들 때문에, 거듭남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버렸습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단체에서 언젠가 여러분이 한번 결단을 한 적이 있고 그것이 진지했었다는 것만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의 삶에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의 일에 대한 증거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일부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직면한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죠. 그것은 대체로 꼭 일종의 유아세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교구의 권위에 의한 고교회의 견진성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직면한 것은 ‘죄인의 기도’ 입니다. 그리고 오늘 나는 내가 전쟁을 선포했던 대상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폴 형제…”  
그렇습니다, 유아세례가 내 의견에는 종교개혁의 금송아지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침례주의자와 복음주의자와 오늘날 그들을 따르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죄인의 기도’가 이 지구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말합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성경으로 같이 가서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누구든 그렇게 전도했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일어서서 나한테 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나라로 가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는 가깝다. 자 이제 나를 자신의 마음으로 초대할 사람이 누구냐? 손 든 사람 있구나.’ 하고 말했다고 써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그리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의 삶속에 적어도 한번은 기도를 했고 누군가 그들에게 그들이 충분히 진지했기 때문에 구원받았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당신이 그들에게 “구원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럼요, 나는 지금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고 나에게 거듭났음의 확신을 주는 강력한 증거가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삶 가운데 나는 한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귀처럼 삽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나는 한 전도자가 그런 짓을 하도록 한 사람을 꼬시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은 너무 불편하게 느낀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렇게 합시다. 내가 하나님께 당신을 위해 기도할테니 그것이 당신이 하나님께 하고 싶은 말이면 내 손을 꽉 쥐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보십시오.”  
결심주의, 우상적인 결심주의.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결심의 진지함을 판단했기 때문에 천국에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갔을 때 그는 그들에게, “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삶 가운데 있었던 그 기도를 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진지했었는지 한번 봅시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아니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을 시험하십시오. 자신을 살펴서 여러분이 믿음가운데 있는지 보십시오.”  
내 친구들이여, 나는 구원이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 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은 은혜위에 은혜입니다. 그러나 개종의 증거는 여러분이 개종하던 순간의 진지함에 대한 조사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삶에 계속해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오, 나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우리가 한 짓을 좀 보십시오. 나무는 열매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60, 70%의 미국인들이 자기들은 개종했고 거듭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루에 몇 천 명의 아기들을 죽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비윤리성 때문에 전 세계에서 미움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정면으로 설교자들에게 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