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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두날개/회개와믿음

*폴 워셔 목사님의 교회에 대한 열 가지 기소장 중에 첫번째 고발*

by Peartree 2012. 12. 30.

*폴 워셔 목사님의 교회에 대한 열 가지 기소장 중에 첫번째 고발*


열 가지에 대한 고발 (역사에 남을 만한 21 세기의 메세지) 

오늘저녁 내가 여기에 선 것은 커다란 특권입니다. 여기 여러분 앞에 서서 부흥, 개혁, 하나님의 백성과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 등과 같은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러나 오늘밤 나는 여러분들과 함께 기소장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망의 기소장입니다. 
이 일련의 모임들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의 커다란 결론, 커다란 부담감이 내 마음에 지워졌습니다. 우리는 부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우리가 만든 모든 문제들을 다 청소해 주시기만을 단순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이 우리가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는 지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가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한 분명한 방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적 원칙이 우리 모두 가운데서 위반되고 있으면서 여분의 성경적 계시를 달라고 외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익합니다.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개혁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다면 악마나 악한 사람들이 그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진리가 주어졌고 우리가 단순히 우리 눈에 옳은 것들을 행하면서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주시기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약을 볼 때 모세에게 어떻게 성막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한 아주아주 세부적인 설명들이 주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모세를 위해 주어진 것일까요 아니면 교회를 위해서 주어진 것일까요? 제 생각에 여기서 설명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대해 특정하시고 우리가 그중 가장 작은 세부사항이라도 빼서 무시해도 된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연약한 사람이며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기소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누구관대 다른 이를 기소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감히 이것을 하나님의 기소장이라고 부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말하겠습니다. 내가 교회를 둘러보면서 성경과 비교해 볼 때, 변화해야만 하는 분명한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마틴 루터가 아닙니다. 이것은 비텐부르그의 문에 못 박힌 95개조의 선언문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에 지워진 부담이며 나는 이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반드시 나누어야 합니다.  
이것을 지금 말하겠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말들은 일부 여러분들을 화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경고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나를 건방지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전달한다는 사실이 여러분에게 싫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건방진 적도 많이 있었고 진리를 잘못된 방법으로 전달한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변명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문제는, 잘못된 전달자를 통해서든 아니든 간에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이들은 여러분이 듣는 것을 기뻐하며 “아멘” 이라고 말하고 싶으며,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싶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어떤 영적 경지에 도달했다면, 내 형제가 했던 이 말을 하겠습니다. “네가 가진 것 중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며, 만약 받은 것이라면 왜 자랑하는가?”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지 않습니까?  
만약 당신이 젊은 성직자라면, 이 진리들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사랑 없이 여러분의 교회에 휘두르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의 제안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종류의 개혁이라도 하기 전에 여러분의 무릎에 피가 나도록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주님을 여러 해 동안 섬겨 오신 더 나이든 성직자라면 제발 거만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늙고 어리석은 왕이 그의 하인들 중 가장 약한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도 부탁드립니다. 오늘이 당신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을 바꿀 용기를 가지십시오. 적어도 당신이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고 영광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이 드신 분들께 경고로써 이것을 말하겠습니다. 자, 내말을 잘 들으십시오. 나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방법에 대한 디모데전서 5장의 훈계를 알고 있고 그 방법으로 여러분께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 안에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고 있고, 이 나라 뿐만 아니라 내가 다녀왔던 유럽과 남미 그리고 많은 다른 장소에서도 나는 젊은이들이 그들이 잘려져 나왔던 반석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펄젼과 휫필드를 읽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레이븐힐, 마틴 로이드 존스, 토저 그리고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하고 놀라운 운동입니다. 단지 인기 있는 대중매체와 저명한 기독 잡지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15년 전에는 나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각성을 내 사역이 아닌 것을 통해 보게 될 거라고는 꿈꾸지 못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 곳에 다니면서 내 사역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는 일을 봅니다. 

 

 

밤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성경의 진리를 위해 부르짖으며 “변화해야 한다”하고 천명의 젊은이들이 선포하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든, 전도에 대한 미국으로부터 온 심리학과 각종 얄팍한 기술들에 의해 너무나 많이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 울면서 상한 심령으로 돌아가 그들의 교회를 전도하는 남미에서든, 내가 때때로 새벽 두세 시까지 앉아, 오늘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설교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두건을 쓴 젊은 흑인들과 신학을 논하곤 하는 미국 내부의 어느 도시에서든 간에 말입니다. 각성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부드럽게 말하고자 합니다. 40세 이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매번 각성을 가져왔었던 옛 사람들과 옛날 방식들과 진리들에게로 눈을 돌리는 많은 젊은이들, 그 대부분은 아주 어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에게 가서 말합니다, “이것 좀 보세요, 우리가 발견한거요. 웨일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 아프리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보세요. 이것 좀 보세요, 저것 좀 보세요, 그리고 이 가르침을 좀 보세요. 이건 정말로 놀랍습니다.”  
그러면 그들 대부분은 그것을 외면하거나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지난 25년간 설교해온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그들이 25년간 설교해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마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부흥 가운데 기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흥은 네가 기도하든 안하든 올 것이다.” 
나는 이중 어떤 진영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압니다. 내가 전 세계의 남녀와 젊은이들이 각성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때에, 내게 그것은 부흥의 첫 열매들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첫 열매들을 주신 분께서 모든 추수를 가져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시간이 있으시다면, 이제 10 가지의 고발들, 내가 믿기로 우리가 변해야 할 것들을 보기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 고발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특히 나의 교파에서 성경이 충분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부인하는 것. 
디모데후서 3:15 부터 이렇게 말 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지난 몇 십년간 성경의 영감에 관한 강력한 전투가 있어왔습니다. 지금 여러분 중 일부는 그 전투의 일부가 아니었지만, 우리 중 더 자유주의적인 교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성경을 위한 전투에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함께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것은 전투의 반밖에 싸우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제는 성경이 영감을 받은 것인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경이 오류가 없는가 하는 것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반드시 응답되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알려면, 성경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소위 말하는 모든 사회과학과 문화연구를 들여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 의견에는, 사회과학이 우리들 대다수가 보지조차 못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시되어 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회와 전도와 선교학에 살금살금 기어 들어와서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하는 일이 기독교적이라고 말 할 수도 없습니다.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이 교회에 주요 영향력이 되었습니다.  

몇 년 전에, 여러해 전에,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한 교수가 들어와서 칠판에 발자국들을 그리기 시작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칠판을 가로질러 간 후 그는 우리 모두를 돌아보며 단지 이 말만 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학교의 복도들을 누비고 있다. 주의하라. 이 발자국 소리가 사도 바울이나 그와 함께 하였던 영감의 무리의 발자국 소리, 심지어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발자국 소리보다 더 분명히 들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교회 생활의 극히 작은 어떤 영역들은 다룰 수 있지만 일이 정말 힘들어지면 사회적 전문가들에게로 갈 필요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거짓말입니다. 여기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로마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모든 현대 사회과학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리고 왜 전도와 선교와 소위 말하는 교회 성장이 고고학자나 사회학자 그리고 모든 문화의 영향을 받는 월스트리트의 학생들에 의해 더 많이 형성됩니까?  
우리 교회의 모든 활동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선교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교 활동과 교회 활동,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성경을 펴고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오 하나님?’ 이라는 한 가지 질문만 하는 신학자과 성경학자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우리는 세속적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교회에 참석할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설문지를 보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찾는 자에게 친절해야 하지만, 찾는 자는 오직 한분이라는 것을 교회가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이며,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순응하고자 한다면, 그것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거절된다 할지라도 그분과 그의 영광에 순응하십시오. 우리는 제국을 건설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인정받으려고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습니다.  
여러분이 교회가 별난 사람들의 집단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잠시 이사야 8장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19절 – 역자 주). 이것은 사회과학과 교회성장 도사들과 그 외의 것들에 대한 완벽한, 아주 완벽한 정의, 또는 적어도 삽화가 됩니다. 왜냐하면 삼사년마다 한 번씩 그들의 모든 이론들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를 계도할 것인가부터 교회란 무엇이며 어떻게 그것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까지입니다. 삼사년마다 무엇이 여러분의 교회를 세상이 볼 때 최고로 만들 수 있는지에 관한 다른 유행이 찾아옵니다. 
최근에 최고 또는 가장 잘 알려진 교회 성장 전문가가 자신의 모든 이론이 전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과 눈물로 무릎을 꿇고 성경으로 돌아가는 대신 그는 다른 이론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들은 명료한 말을 주지 않습니다. 여기 이사야서에서 말합니다.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8:19 – 역자 주) 교인으로서, 설교자로서, 목회자로서, 크리스챤으로서, 우리가 나가서 성령께서 살리신 사람들을 위해서 영적으로 죽은 자들에게 상담을 해야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