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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가는 두날개/회개와믿음

*폴 워셔 목사님의 교회에 대한 열 가지 기소장 중에 세번째 고발*

by Peartree 2012. 12. 31.



세 번 째 고발입니다: 인간의 고질적인 병폐를 언급하지 못하는 것.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의 하나인 로마서를 볼 때, 이것은 체계적 신학은 아닙니다만, 성경 중에서 어떤 책이 체계적인 신학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로마서가 가장 근접할 것입니다. 바울이 그 책의 처음 세 장을 한가지만을 하려고 썼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 모든 사람들을 정죄아래 데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정죄가 그의 가장 위대한 신학적 업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의 결말도 아니고 최종 목적도 아닙니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리기 전에 자신에 대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람은 아주 타락한 존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데려가려면 그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모든 육신의 소망을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에 있어 중요합니다만 전도에 있어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나는 기억합니다. 그것은… 내가 21살 때, 설교하도록 막 부르심을 받았을 때였는데, 나는 성직자들에게 반값으로 양복을 파는 어느 오래된 가게에 갔습니다. 그들은 50, 60년을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거기로 들어가서, 캔터키 파두카에서, 양복을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습니다. 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닫혔습니다. 거기에는 한 늙은 노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도 몰랐는데, 그가 걸어 들어와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습니다.  
“젊은이, 설교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구만, 그렇지?”  
나는 말했습니다. “네, 선생님.”  
그는 아주 늙은 전도자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건물 바로 바깥에 있는 저 건물이 보이나?”  
나는 말했습니다. “네.”  
그가 말했습니다, “거기서 내가 설교했었지. 하나님의 영이 내려와서 영혼들이 구원받곤 했지.”  
나는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에 대해 좀 더 말씀해 주세요.”  
그가 말했습니다. “그때는 요즘의 전도와 같은 게 없었어. 우리는 이삼주 동안 설교를 하고서 죄인들에게 영접하도록 초대하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영이 일하시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실 때까지 그들의 마음을 쟁기질하고 쟁기질하고 또 쟁기질하기만 했지.”  
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의 영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뜨리러 오셨을 때를 어떻게 아셨나요?”  
그리고 그가 말했습니다. “ 글쎄, 그냥 예를 하나 들어주지. 수 십 년 전에 내가 이 가게에 양복을 사러 왔었다네. 누가 나한테 30불을 주면서 말하더군, ‘목사님, 내일 가서 양복 한 벌을 사십시오.’ 그리고 내가 문으로 들어왔을 때 가게를 맡고 있던 젊은 점원이 돌아서 나를 보았고 나를 봤을 때 바닥에 엎드려서 소리쳤다네, ‘누가 나 같이 악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나는 하나님의 영이 그곳에 임했다는 것을 알았지.” 
지금 우리는 그냥 사람들에게 가서 얘기하고, 세 가지의 입문적인 질문을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요청하는 기도를 할 것인지 그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전도자로서 우리가 우리 입으로 토해 놓은 종교적 삶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두 번 다시는 복음에 마음을 열지 않을,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 레오나르드 레이븐힐이 즐겨하던 말을 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은 내가 왜 많은 장소에서 오직 한번만 설교하는지 이해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피상적으로 다룰 때, 무엇보다도 우리는 성령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 역자 주)

 

  
오늘날 여러분들에게 영원보다는 지금 가장 좋은 삶을 주는데 더 신경 쓰는 아주 유명한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설교에 죄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자랑합니다. 나는 이것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그들의 사역과 싸우게 될까봐 그들의 사역에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유일한 것입니다.  
왜냐구요? 사람이 인간의 죄를 다루는 사역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령께서 하십니다. 오셔서 죄의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 성령의 주된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십시오. 여러분이 특정하게, 열정적으로, 사랑으로 사람들과 그들의 타락한 상태를 다루지 않는다면, 성령은 여러분 주변에 절대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한 예레미야 시대의 목자들처럼 우리가 인간의 고질적 병폐를 가볍게 다룬다면 우리는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렙6:14 – 역자 주) 
누군가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기 싫어서, 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거나 자신에게 화를 낼까봐, 그 사람이 슬퍼질까봐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부인하는 의사와 같이 우리는 속이는 자일뿐 아니라 부도덕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 의사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사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요즘 설교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폴 형제, 당신은 이해를 못하는군요. 우리는 요한과 찰스 웨슬리 시대의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휘트필드나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문화와도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마음이 따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깨어져 있어요. 우리는 자존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의지도 약합니다. 우리는 그런 설교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 사람들의 삶을 연구해 본적 있으십니까? 그들이 설교했던 것들은 그들의 문화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복음의 설교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짐승의 사나움을 가지고 대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심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의지가 박약하고 자존감이 없다는 부분에 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와 이 세상은 이 혐오스러운 자존감의 병폐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을 더욱 존중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또한 도둑들입니다. 우리는 도둑들입니다.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오늘 오후,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나요? 어느 우주 거인이 바구니를 타고 와서 별들을 다 따서 담아가지고 다른 곳으로 가져갔나요? 오늘 아침 별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것들은 거기에 그대로 있었지만 여러분은 그것들을 볼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점점 어두워져서 밤이 칠흑같이 캄캄하게 되면 별들이 그 영광의 풍성함 가운데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이 인간의 급진적 타락성에 대해 가르치기를 거부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영광은 우리의 타락성의 바탕위에 놓여 졌을 때 가장 광대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그 여인은 많이 사랑하였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악한지 알았기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용서받았는지 알았습니다. (눅7:47 – 역자 주)  
오,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악한지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그로인해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고 훈계를 따를 기회를 사람들로부터 강탈하였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찌니라.” (고후10:17 – 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