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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4월 새벽예배 –요단을 건너 여호수아 3:1-17

by Peartree 2012. 12. 20.

요단을 건너

여호수아 3장 1-17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40년만에 꿈에 그리던 가난안 땅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첫번째 관문인 요단강 앞에서 그들은 바로 건너지 아니하고 3일을 그곳에서 유숙합니다. 15절에 보시면 모맥 거두는 시기, 즉 추수때에는 물이 항상 언덕에 넘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물이 거품을 내며 넘실대며 흐로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자기아내와, 자녀, 가축, 및 가산들이 함께 이 강을 어떻게 건널 수 있는지 의심하며 두려워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 여호수아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 라고 약속은 해 주셨지만 이백만 (투산인구의 두배) 이나 되는 백성들과 가축들을 데리고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무척 걱정이 되었을 것입니다. 1절- 여호수아가 일찍이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호수아는 큰 일을 앞에두고 항상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6:12(여리고 성 공격직전) 7:16(범죄자 아간을 색출하기 전에), 8:10 (아이성을 공격하기 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새벽산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모든 행사를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성도님들 아침일찍 일어나 하나님 전에 나왔습니다. 무거운 몸을 추스리고 주님앞에서 나오는 이유는 하루를 주님께 먼저 드리고,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나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힘이 없으니 하나님께 의탁하기 위해서 아침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은 "요단을 건너" 라는 제목으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요단을 건널 수 있었는지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켜, 우리 앞에 건 널 수 없을 것 같이 보이는 요단이 가로 막혀 있을 지라도 우리는 능히 건 널 수 있는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 도전 받으며 발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언약궤를 따라갔습니다. (따라갔다는 것은 앞서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은 말입니다).

3절 – "레위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쫒으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징합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사건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백성들이나, 여호수아가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건너는 방법도 하나님께서 정하셨고, 요단강물도 하나님께서 멈추셨습니다. 백성들은 그냥 언약궤가 가는 곳으로 쫓아 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는 위급한 일이나, 큰 일이 닥치면 하나님을 앞세우지 않고, 내 생각과 방법이 앞 설때가 너무 많습니다. 양들을 보십시요. 절대로 목자를 앞서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4-5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주의 백성은 주님만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앞서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려야합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면 그때 그 말씀에 순종하여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경험과 판단을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약궤를 따라간다는 것은 어쩌면 이해 안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다 강물에 몰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은 목자가 가는데로 그냥 따라가다 보면 푸른 초장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법을 통하여, 사람이 보기에 미련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계획이 가장 완벽하신 방법 이라는걸 하나님은 알려주시기 원하셨습니다.

 

  1. 믿음으로 요단에 발을 디뎌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강을 건너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40년 전에 애굽에서 탈출하자마자 홍해를 건넌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홍해를 건넌 사람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해서 다 죽고 살아남은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강을 건넌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요단강은 당시의 홍해와는 조건이 틀립니다. 홍해는 바다와 같아서 깊지만 잠잠하였습니다. 그러나 요단강은 물 흐름이 너무 세기 때문에 만약에 발을 헛디뎌 미끌어져 들어가는 날에는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였습니다. 그리고 홍해는 모세가 지팡이로 갈라놓고 들어 가라고 하여서 사실 믿음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한 급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8절 –"요단에 들어서라" 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하나님 40년전, 그때와 틀리지 않습니까?" 라고 한번 불평하지 않고, 11절 –"보라 (See)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갈 것이다" 라고 선언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당시의 제사장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수아가 명령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죽는줄 알면서 요단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인데 기적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강하게 흐르는 흐르던 급류가 멈추어 벽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은 지금의 목사와 역할면에서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면에서 보면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생명도 요구하시면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가끔 합니다. 그때 제가 내리는 결론은 "예수님 ! 상황에 따라서 믿음 주시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입니다. 상황에 따라서…..

 

오늘 언약궤를 메고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머뭇거림도 없이 요단강으로 들어가는 제사장들을 생각해 보십시요. 이러한 믿음이 200만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7절 말씀에 우리 예수님도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으며,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으시고" 기꺼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인것입니다. 발을 디디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요단을 가르실 것이고 우리는 죽지 않고 건널 것이라는 믿음이 요단을 건너게 했습니다.

 

결론

14절 보십시요. 요단의 강물은 여전히 거세게 흐르고 있는데, 들어가면 안되는 줄 알면서, "백성이 그냥 요단을 건너려고 장막을 떠나고 있고, 제사장들도 언약궤를 메로 백성 앞에서 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장엄한 모습입니까?

 

죽는 줄 알면서 하나님의 말씀하셨으니, 살리실 것을 또한 믿고 200만명이 비장한 각오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장엄하며 엄숙하게 행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믿음은 하루아침에 쑥 자라지 않습니다. 어린 아이가 하루아침에 걸을 수 없듯이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이 오늘 처럼 장성하도록 기다리시며 훈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신 것입니다. 광야 40년 생활도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어 먹이시고, 신 29:5 "주께서 사십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신발이 닳지 않도록 신발 믿창까지 신경써주신 하나님입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가면 됐습니다. 오늘도 언약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훗날에 주앞에 설때에 분명히 이 고백을 할것입니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