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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성탄을 맞이하면서 - 눅 2:25-38

by Peartree 2012. 12. 26.

성탄을 맞이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눅 2:25-38

 

다음주는 성탄주일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는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절이란? '다시 오실 예수님을 크게 갈망하며 기다린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000년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을 우리는 초림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텐데, 그 다시 오심의 사건을 재림의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다림에 참으로 익숙합니다. 어렸을 때는, 장보러 가셨던 엄마를 기다립니다. 처녀 총각 때는 군대간 애인을 기다리고 제대 날짜를 기다립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들이 자라면,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립니다. 이렇게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크리스천들은 한가지 더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인 것입니다.

 

이 기다림이란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기다림입니다. 졸업을 기다리고, 회사 승진을 기다리고, 월급이 올라가는 것을 기다리고, 집 장만 하는 것을 기다리고… 등등 기다림에는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현대 사회심리학자 엘리 프롬이란 사이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 인간은 위를 바라보며 미래를 바라보는 자들이다.'

 

2차 대전 때,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포로 수용소에서는 매일 같이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데, 크리스마스 날이 지난 간 후에 갑자기 많은 포로들이 더 죽어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왜 그런지 그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 이 포로들이 '크리스마스 날에는 석방해 주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고통을 참고 살았는데, 크리스마스가 지나도 석방을 하지 않자 그들은 희망을 잃게 되었고 삶을 포기해 버렸을 때, 갑자가 죽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삶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성공입니까? 아니면 걱정근심 없는 안정된 생활입니까? 사실, 이런 것도요. 우리에게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 소망이란,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이 최고의 소망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만나면 "마라타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하며 인사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엇이 다릅니까? 소망의 차원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중에 다시 오실 예수님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고 현재의 삶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소망이 없는 사람들' 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오실 주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고 기다림도 없다면 세상사람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2000년전에 세상에 오실 때도, 세상 사람들의 대 다수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실 거라는 것 쯤은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교활하길래 예수님께서 '여우' 라는 별명을 지어준 헤롯왕도 예수님이 오실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마태복음 2:4절에 보시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오실 것이지, 장소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천사들과 목동들도 알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동방박사 세 사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절을 보시면 '시므온' 이라는 나이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는 있었지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오던지 말던지 하며 기다림도 없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사건의 반복성"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통치하시면서 늘 새로운 방법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고,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은 예전에 사용하시던 방법 그대로 지금도 반복적으로 사용하시며 통치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요. 과거 노아 시대 때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는 물이 아니고 불로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심판하시고, 앞으로도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사건의 반복성' 입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는 방법도 그렇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제사 드리는 것을 수 천년간 한번도 변함없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실꺼예요. '목사님 우리가 무슨 어린양을 잡아 제사를 드립니까? 우리는 그렇게 예배하지 않잖아요?' 라고 하시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어린양을 잡습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예배도 드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건의 반복성' 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전에 예수님은 세상사람들이 다 고요히 잠들어 있는 그 시간에 인적이 드문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에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도적같이 오실 것입니다.

2000년 전에도, 예수님이 오실 거라는 것 쯤은 다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였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극히 적은 숫자였듯이, 앞으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 때에도, 주님이 오신다고 소문은 무성하지만, 정작 기다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건의 반복성'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일어난 사건을 통하여 미래를 대비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과거에도 주님이 오신다고 알고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내가 주님이 다신 오신다고 강단에서 설교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하지만, 정말 주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지, 이것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리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예요.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나, 우리 모두가 정말 주님을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맞는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우리가 기다리던 기다리지 않던 하나님께서 정한 그 시간에 정확하게 오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님 오심을 알았던 사람들을 위해 오시지 않고,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십니다. 주님 오심을 안다고 하면서, 세상에 취해서, 세상에 것만을 위해서 산 사람들을 위해서 오시지는 안는 다는 거예요.

 

그러면 또 이렇게 반문하실지 몰라요. '목사님, 예수님 믿었잖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시지 않다니요? ' 맞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로 예수님 믿었으면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날 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로 예수님 믿었으면 세상 보다는 교회를 사랑합니다. 진짜로 믿었으면 죄를 회개합니다. 진짜로 믿었으면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진짜로 믿은 사람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대로 살려고 좁은 길을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오셔서 주님의 나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께서 데려 가기에 합당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오늘 본문에 두 사람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데,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주님께서 데려가기에 합당한 사람은, 시므온 같은 사람입니다.

 

25절에 보시면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고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를 기다리는 자' 라는 말에 이 사람이 어떤 형편 가운데 있었는지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그 당시는 희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시대가 그 시대였습니다. 아마 이 시므온이란 사람은 죽지 못해 하루 하루 사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 이렇게 살 바에야, 제 생명을 거두어 가 주십시요' 라고 기도했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26절에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라" 라고 성령께 알려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만 살고 싶다고 하니까, 성령님께서 만나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는 예수님의 얼굴을 볼꺼야, 그러니까,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참고 기다려야 한단다' 라고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평생을 주님의 얼굴 뵙기를 소망하며, 사모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 ……' 그의 위로는 주님이었습니다. 주님의 그의 위로였습니다. 그는 죽고 싶어도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는 일사각오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기다리는데 어떻게 기다렸습니까? 25절에 "의롭고 경건하게" 기다렸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하는데, 더러운 모습으로 만날 수 없어 그는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죄를 멀리했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26절에 나와 있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내 맘대로 인생을 산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살았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성령님의 지시가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도 다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지시하시는 거 아십니까?

예를들어, 친구와 싸웠다고 해요. 그러면 속에서는 두 마음이 싸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단의 음성이고 하나는 성령의 음성입니다.

한쪽에서는 '네가 먼저 사과해!' 라고 할꺼예요. 또 다른 한쪽에서는 '무슨 잘못을 했는데 사과해 절대 못해' 이렇게 두 마음이 싸울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지시대로 산다면, 당장 가서 손을 잡고 화해를 해야 합니다.

오늘 시므온은 이렇게 성령님의 지시대로 살았다는 거예요.

 

성령님의 지시대로 살기가 참으로 힘들죠. 그러나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산다면, 충분히 그렇게 살수 있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지 않고 땅에 두고 살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News week 라는 잡지에 이런 내용이 실린 적이 있다고 합니다. 중국의 문화 혁명 때, 반 혁명세력으로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한 어떤 중국인을 소개한 내용인데, 이 분이 감방생활이 너무 고통스럽다보니까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난동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감옥의 창 밖으로 연 하나가 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연의 무늬가 예전에 자기가 아들에게 직접 만들어준 것과 같은 무늬였어요. 그 날부터 하루에 두번씩 어떤 날을 세번씩 연이 창밖에 떠 올랐습니다. 이 사람이 알아차립니다. 밖에서 아들이 연을 날리며 자신을 기다린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요. 그 후로 이 사람이 어떻게든 꼭 살아서 아들을 만나야 겠다는 소망을 갖게 되고, 결국엔 감옥에서 나와 아들을 보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소망이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이 땅의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왜 인생을 삽니까? 80평생을 왜 사십니까? 짧다면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소망 때문에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험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1. 두 번째로, 주님께서 데려 가기에 합당한 사람은, 안나 같은 사람입니다.

 

36절에 보시면,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7절에는 그녀의 나이가 84세이며 남편과 7년을 함께 살았고 지금까지 혼자 살아 왔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분은 남편과 이별인지 사별인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헤어진 그후로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고 한 평생을 살아 왔다는 거예요.

 

특별히 보시면 안나에게는 시므온처럼 예수를 만날 것이라고 성령께서 알려 주지도 않았습니다. 오로지 안나가 한 것이라곤, 37절에 성전을 떠나지 않고 성전에서 기도하며 살았다는 거예요.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이 그녀의 삶의 우선이었습니다.

성탄절에 한번 교회 오고 부활절에 한번 오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어디가 아프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이번 주에 교회 빠지면 어떡하지?' 하며 '하나님 이번 주에 교회를 갈 수 있도록 그 전에 아픈 것이 싹 낫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84세가 되어도 성전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몸이 조금만 이상하면 주일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안나 오셨어요' 물으면 감기가 걸려서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래도 심하지 않으면 나오셔야죠.' 라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 옮길 까봐요 그럼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같으면 다른 사람에게 옮겨도 나오겠습니다. 내 영혼이 먼저 살고 봐야죠.

 

여러분 취미생활과 신앙생활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취미생활은 하고 싶지 않으면 안해도 된다는 거예요. 피곤하고 마음내키지 안으면 안해도 되요. 그리고 취미생활은 시간 남을 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억지로 지고 가는 십자가입니다.' '때로는 고단하고 피곤하더라도 눈물을 머금고 가는 길이 이길입니다.' 시간 남을 때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있으나 없으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안나 할머니가 이렇게 평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가끔 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합니다. 자랑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요. 도전 받으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관절염으로 36년을 앓았습니다. 게다가 다리를 심하게 절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시다가, 나중에는 조그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는데, 겨울이면 얼마나 자주 미끌어 지시는지, 한번은 잠을 자는데 새벽에 개짖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 소리 같은 것이 밖에서 들리는 거예요. 그래서 밖으로 뛰어 나가보니까, 넘어지셔서 못 일어나시는 거예요. 그래서 막 뛰어가서 일으켜 드리면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새벽기도를 가고 한 것이 한 두번이 아니예요.

그리고 심하게 아프실 때는, 경운기에 태우고 가서 업어서 교회에 들어가고, 업고 나오고 했어요. 그렇게 아프셨는데도요 매 주일예배, 수요예배 , 새벽예배 일년에 한번 빠질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하, 이것이 신앙생활이구나. 천국은 이렇게 가는 거구나,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보고 살았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유별난 것이 아니구요. 성경에 나오는 신앙의 선배들이 다 이런 길을 갔습니다.

과거 몇 십 년 전만 해도 다 이렇게 믿었습니다.

 

저희 모교회 이은학 할머니라는 분이 계세요. 허리가 90도 이상 완전히 구부려지셨어요. 지팡이 잡고 교회 오는데, 한 시간도 넘게 걸어오십니다. 일주일에 한번 말고요.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매일 새벽예배…… 천국에 가는 길을 이런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 할머니를 통하여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두 가지를 찾아냈습니다.

첫째는, 삶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냥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로 삼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교회를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누가 들림 받는지 아시죠.

교회가 들림 받습니다. 교회 건물이 들림 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속한 주의 백성들이 들림 받는 것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이 오는 이 계절에, 우리 사랑하는 꿈의교회 성도님들은 세상소리에 귀 기울이지 마시고, 조용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이해를 마무리하는 진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