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의 구원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3:9-12
경건하게 예수님을 믿는 한 농부가 어느 날 큰 도시에 나왔습니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서 식사를 하려고 큰 식당으로 들어갔더니, 건너편에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큰 소리로 노닥거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주문한 식사가 나오자 그 농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젊은이들이 이 농부를 곯려주기로 마음먹고 그 중 한 젊은이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봐요, 시골 양반, 당신네들이 사는 동네에서는 누구나 다 그렇게 합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 경건한 농부는 고개를 들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다 그러는 것은 아니고, 돼지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국 트렌취 교회의 입구에 이런 시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평탄한 길에 조그마한 구렁텅이만 있어도 벌써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기의 가는 험하고 캄캄한 길에 조그마한 빛만 비추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비로우신 빛이라 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감사를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감사를 하니 안하니 해도 그리스도인만큼 감사를 잘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라고 우리는 자부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리스도인들의 감사할 조건은 참 많이 있습니다. 사업을 번성케 하시고, 직장이 안정되게 하시고, 가정이 평안케 하심에 너무나 감사할 다름이지요. 그러나 이런 감사들 말고 뭐니뭐니해도 우리 크리스천들이 감사 해야 할 것은, 우리의 구원에 감사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는 너무 커서 우리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한계를 넘어 간다고 하죠. 그래서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 들린다고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가 그런 것 같아요.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크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으로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이 가지 않으니까? 그냥 '감사한 일이구나!' 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이 구원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이 구원의 은혜' 가 어찌나 감사 했는지, 평생을 복음 전도자로 산 것입니다.
오늘 본문23절을 보시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 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죽게 된 사람들이었는지 12절 보시면 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말씀하죠. 이 말씀을 쉽게 말하면 쓸모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 말에 너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한번 자신의 모습을 들어다 보세요. 우리가 구원 받은 주의 자녀지만, 우리 안에 얼마나 욕심이 많고, 때로는 분노도 치밀고, 시기, 질투 미움, 다툼 등등…… 지금도 이런 죄악의 근성 때문에 우리는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은 후로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충만하지 못하면 다시 이런 죄악의 근성들이 고개를 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항상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나는 죄인이며, 어떠한 것으로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으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가 있어야지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인데,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얼마나 오해를 하고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어떠한 오해를 하냐면, 도덕적 행위에 근거한 구원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말할 때 자신들의 행위로 인하여 구원이 가능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20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는 '이것이 죄고, 저것이 죄다' 라는 것은 알 수는 있는데, 알기만 했다 뿐이지, 그것을 지킨다고 구원 받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인간 스스로가 어떤 노력으로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은혜' 를 주셔야지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필리핀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성 금요일에, 연례 행사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행사를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카톨릭 신자들이 이런 행사를 합니다.
작년에도 23명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았다고 하는데, 이 행사를 보려고 해마다 1만명의 관광객이 그 마을을 찾는다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천국에 한 발자국도 들여 보내지 못합니다.
이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다면,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그럼, 착하게 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특히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죠. 그러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더 못되었더라,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이런 말 많이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의도는, '이런 예수쟁이가 구원 받으면, 그보다 더 착하게 산 사람도 구원 받겠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그건 그 분들 생각이고, 그분들 이론이지, 우리가 아무리 착하고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 없는 선함, 예수님 없는 착함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을 위해 장로교에서는 '하이델 베르그 소요리 문답' 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교리집이 아니고, 당시에 이렇게 애매하게 질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건데, '선' 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향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아무리 선한 일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 한 선한 일은 선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고 한 선도 선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지 않은 것도 선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왜 입니까?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악한 일이라고, 오늘 12절에 '무익하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어떤 일이든, 정말 착하고 선한 일이다 할 지라도, 하나님 없이 한 일을 '무익하다' 는 말입니다. 쉬운 말로, '쓸모가 없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닌, 절대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둘째로, 사람들이 구원에 대해서 어떠한 오해를 하냐면, 종교적 행위에 근거한 구원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활동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세우는 것 중의 하나가 율법을 가졌다는 것과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은 그러한 종교적 행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도의 세 힌두교 성자들이 강을 건너려고 배를 탔습니다. 늙은 뱃사공은 배를 젓기 시작하는데 그 중 한 성자가 물었습니다. "노인, 힌두교에 대해서 좀 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뱃사공은 "나는 평생 노만 저었기 때문에 그런거 모릅니다" 라고 퉁명스럽게 쏘아 붙입니다.
그러자 두번째 성자가 말합니다. "허허, 당신은 대부분의 인생을 헛 살았군요."하고 말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다른 세 번째 성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정말 힌두교에 대해서 모른다면 당신은 인생의 반평생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데,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와 그 나룻배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세 학자는 사람 살리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그 노인 뱃사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여보시오, 나는 종교는 모르지만, 사는 방법을 배웠소" 라고 하며 헤엄을 쳐서 살아났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도 종교라는 범주에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 기독교가 종교의 틀에 있다고 해서, 종료 놀음이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야 구원받지, 종교 행사하면 구원 받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유대인에게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자꾸 '복음' 을 종교화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적 틀을 만들고, 종교적 의식을 만들고, 종교적인 구원론을 만들어, 율법을 지키면 구원 받는 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종교를 통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진정한 복음 붙들기 원합니다.
종교 붙들고 있으면, 구원이 없어요. 우리의 행위로도 구원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 복음 붙들고, 끝까지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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