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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교회안에, 차별화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 약2:1-6

by Peartree 2012. 12. 26.

교회안에, 차별화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약2:1-6

 

한 남자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에게 다가가 머리에서 좋은 냄새가 난다고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직원은 불쾌하다는 듯, 즉시 상사에게 가서 그 남자가 자기에게 성희롱을 했다고 일러바칩니다. 당황한 상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직장 동료가 칭찬한 게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여직원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남자는 못생겼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못생긴 남자가 칭찬하면, 그건 성희롱이라는 말입니다. 잘 생긴 남자가 칭찬하면, 그것은 '관심' 이라고 말합니다. 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잘생긴 남자가 거리를 뛰어가면, 매우 바쁜 일이 있는가 보다.

그런데 못생긴 남자가 거기를 뛰어가면, 남한테서 돈 빌리고 도망치는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고 해요.

또 잘생긴 남자가 자기를 쳐다보면, 혹시 나한테 관심 있는거 아냐? 라고 생각하고,

못생긴 남자가 자기를 쳐다보면, 곧 바로 경찰에 신고한다고 합니다.

또 잘생긴 남자가 바닷가에서 혼자 서 있으면, '무슨 고민이 있는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못생긴 남자가 바닷가에서 혼자 서 있으면, 혹시 자살 하려고 온거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의 세상은, 외모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일단은, 잘생기고 보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지금 영국 런던에서는 올림픽이 한창이지요. 어제도 한국의 박태환이란 선수가 수영에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얼굴이 얼마나 잘 생겼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운동을 하더라도 잘생겨야 인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에서는, 신입사원을 뽑는 대기업의 면접관들이 선호하는 얼굴을 컴퓨터로 합성해서, TV 에서 방송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로, 젊은 사람들이 취업하기 위해서, 그 컴퓨터로 합성한 사진을 들고는, 성형외과를 찾아가, 이 사진과 똑같이 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물론 그 컴퓨터로 합성한 그 사진을 저도 보니까, 미남 미녀였습니다. 만약에 이렇게 너도 나도, 한 사람의 얼굴로 고치고, 거리를 걷는다면, 우습지 않습니까?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여기 저기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세상이 무서울 거예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외모를 중요시 하고, 잘 생겨 지기를 원합니까? 그것은 세상이, 사람들을 외모로 차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제로, 한국에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젊은 남녀를 대상으로, "외모가 취업에 영향을 미치는가?" 라는 질문에 98%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또 대기업의 인사 관련 담당자들이 사람을 채용할 때 "외모를 고려하는가?" 라는 질문에 94%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생겨야, 취직도 잘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렇습니다. 사람을 보는데 있어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교회 안에서는 어떻습니까? 물론 교회 안에서도 사람을 외모로 보고 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야고보 사도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사람의 얼굴 생김새 가지고, 차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쉬운 한글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하지 마십시요"

 

야고보 기자가 2000년 전에 이렇게 쓴 것을 보면, 이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수천년된 아주 고질적인 문제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시면, 사무엘 선지자도, 사람을 외모로 보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들 중에 한 명에게 기름을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이새의 아들들 중에, 큰아들 엘리압이 오는데, 보니까, 키도 크고, 용모가 준수한 거예요. 그러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차별하신다면, 우리에겐 큰 불행입니다. 얼굴이 잘 생겼습니까? 권력이 있습니까? 돈이 많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것들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그 사람을 평가하신 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얼굴은 좀 못생겼더라도, 마음 중심이 아름다운 사람이 있습니다. 가진 것은 없더라도, 베풀기 좋아하고, 대접하기를 즐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운 것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를 즐겨하고, 사모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잘 생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날의 교회 안에서도, 사람의 차별화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해야, 이 차별화를 없앨 수 있으며, 모두가 존귀함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외모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6절을 말씀을 보시면,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들을 괄시 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 즉, 외모로는 보잘 것이 없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셨는데, 사람들이 그들의 외적인 모습만 보고, 괄시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외모에 속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미국 서부의 명문대학인, 스탠퍼드 대학교가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지, 그 배경은 아주 유명한 일화중의 하나입니다. 미국은 Donation 문화가 아주 잘 정착된 나라입니다. 한번은 어느 돈 많은 재벌 노부부가 생의 말년에, 자기들가 가진 전 재산을 사회에 헌납할 생각으로 미국의 명문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허술하게 차려 입은 이 노인 부부가 하버드 대학의 정문에 들어가려고 하자, 정문을 지키는 수위가 불친절한 태도로 맞습니다. 이 노인 부부가 대학 총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자, 수위는 경멸하는 태도로, '총장님은 댁들 같은 사람들을 만날 만큼 한가하지가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대학 하나를 더 세우려고 찾아왔습니다.' 라고 말하자, 수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학교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수위의 태도에 마음이 상한 노부부는 집으로 돌아와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을 털어, 미국 서부에 대학교를 세우게 되죠, 이 학교가 스탠퍼드 대학입니다. 이 사실은 뒤 늦게 안, 하버드 대학은 무척이나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라는 야고보서 2:1절의 성경구절이 붙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요.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을 보고, 순간적으로 상대방을 판단합니다. 그러다가 잘못 판단해서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오늘 2,3절의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지금의 예배당은, 상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예배당은, 높은 사람들이 앉는 상석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VIP 좌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는 아무나 앉지 못했습니다.

2,3 절을 보시면,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들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고,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을 가지고, 4절을 보시면, '악한 생각으로 판단'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만약에, 교회가 이렇게 세상이 보는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한다면, 그때부터,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이 차별화를 용납해서는 안되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겉 모습과, 외모와, 그가 가진 배경과 그가 가진 돈 때문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된 일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저희 모교회에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때도, 요즘처럼, 선거철이었습니다. 그날 주일예배에, 국회의원 후보자 한분이 저희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방문자를 소개를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 국회의원 후보자자 앞으로 뚜벅 뚜벅 걸어나가더니, 마이크를 잡고, 아주 짧은 멘트를 했습니다.

예배가 마치고, 집사님들끼리,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왜 거룩한 예배시간에,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이라 하지라도, 앞에 나가서 예배를 방해하냐, 교회가 선거 유세하는 장소냐? 하면서,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맞습니다. 만약에, 거룩한 예배시간에, 남루한 옷 차림의 사람이 와서, 마이크를 잡고 멘트를 한다면, 그때도 허락하시겠냐는 거예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는, 신분의 차이도 없어야 한다는 거예요. 교회 안에서는 빈부의 격차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성도만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저에게, '목사님, 미국에서, Government Office 같은 곳에 가려면, 잘 입고 가셔야 합니다. 미국도 한국처럼, 어떻게 옷을 입느냐에 따라서, 대우가 틀려집니다' 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일반적인 모습인가 봅니다.

세상은 자기를 잘 포장하기 위해서,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자기를 잘 포장하기 위해서, 부자인척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속일 수 있거든요.

 

교회 안에도, 이런 비슷한 일들이, 있을 거라고, 오늘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속지 않은 비결은 무엇입니까?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심을 보라는 것입니다.

 

  1. 두번째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사람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사람을 보는데 있어서, 육신의 눈으로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외모를 보고 속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행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라고 말씀하죠.

그러니까,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그냥 '주여 믿습니다' 라고 말로만 하는 믿음이 아니라, 그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야고보가,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바라 보라' 는 것은,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행동을 하는지, 아니면, 말로만 믿는 다고 하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행함은 믿음 따로, 행함 따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믿음은 정말 좋은데, 행위는 별로야! 이런 말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주 좋으면,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믿음에서 좋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야고보가,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라' 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속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이 눈으로 보지 않고, 속단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버섯을 봐보세요. 먹을 수 있는 식용버섯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느타리 버섯은, 전혀 예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은은한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독 버섯을 보시면, 얼마나 색깔이 화려하고, 예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안에 사람을 죽이는 독이 있어요. 그래도, 독 버섯인지 잘 알 수가 없을 때는, 그 버섯이 어떠한 버섯이었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쉽게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년 전입니다. 저와 제 아내가, YMCA Park 에서, Walking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버섯을 발견했는데, 송이버섯하구 똑같이 생겼습니다. 땅속에서 막 나오기 시작한 건데, 얼마나 맛있어 보이는지, 그것을 따다가, 찌게에 넣어 먹으련 참 좋겠다고 하고, 버섯을 20개 정도 따서, 모아놨습니다. 그런데, 불안한 거예요. 이 투산에, 모든 식물이 가시가 있고, 동물들도 독이 있고, 순한 것이 없는데, 이 버섯이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근처에 뛰노는 아이들이 있길래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먹으면 아플것' 이라고 말하고 갑니다. 그래서 장난 치는지 알고, 또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먹으면 아플 걸' 하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들이니까, 어른 한테 물어 보기로 하고, 어른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절대 먹지 말라고, 독 버섯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렇게, 겉모양을, 그렇듯 하게 포장한 버섯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때, 겉모양만 보고 쉽게 속단하고, 먹었더라면, 병원에 실려 갈 수 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 사도는, 사람을 보는데, 쉽게 속단하지 말고, 그 사람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데, 믿음의 눈이란, 그 사람이 믿음이 있는 행동을 하는지 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 3절을 보시면, 사람들이,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예배당에 들어오니까, 생각하지도, 않고,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합니다.

이런 것들이, 다 믿음의 눈으로 보지 않고, 겉만 보고 쉽게 판단해서 그런 것입니다. 4절 보시면, 이렇게 겉만 보고 쉽게 구별하는 것은 '악한 생각' 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랑하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하더라도, 이 사업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속지 않습니다. 실패가 없습니다.

직장을 다니더라도, 이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일인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가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를 바라볼 때, 믿음의 눈으로 봐야지, 성도들 간에,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눈으로 봤다가, 실망하고, 미워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교회 안에서, 서로 불신하고, 실망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외모만 보다가, 실망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중심을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영혼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한번도 속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서기관 바리새인들, 유대인의 관원들의 속을 보니까, 시커먼 거예요. 그런데, 가난한자, 과부, 창기와, 세리들의 마음을 보니까, 식용버섯처럼, 겉은 아름답지 않지만, 속 마음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도,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외모를 보면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눈으로 사람의 중심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여전히 차별화가 존재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꿈의교회 만큼은, 이 안에, 외모의 격차도 없고, 빈부의 격차도 없고, 잘난 사람도 없고, 못난 사람도 없는,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족 같은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