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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본을 보였노라 - 요13:12-20

by Peartree 2012. 12. 26.

본을 보였노라

요13:12-20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별명이 많이 나옵니다. 지난달에 우리는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을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별명은, 선한목자 뿐만 아니라, 생명의 떡, 포도나무, 양의 문, 모퉁이 돌,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별명을, '때밀이신 예수님' 이라고 붙이신 분이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철저히 낮은자의 모습으로, 겸손의 본을 보여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누군가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닮고 싶어 한다면, 그것이 바로 좋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본을 보였노라"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본'이라는 말은 영어 단어로는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하나는 'example'이라는 말과 다른 하나는 'pattern'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장면입니다. 보통은 하인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는데, 오늘은 반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Pattern의 시작입니다.

여러분 패턴이 무엇인지 잘 아실거예요. 똑 같은 모양이 계속해서 반복되거나, 어떠한 상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우리는 그것을 패턴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거의 패턴을 따라 살아갑니다. 매일 아침 밥먹는 패턴, 주일이면, 교회에 오는 패턴, 저녁이면 거의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패턴, 밤이면, 잠자는 패턴, 우리는 패턴을 따라 살아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14절에 무어라고 말씀하시냐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말씀합니다. 내가 지금 본을 보인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패턴을 따라 하라는 것입니다. 가끔가다 하면 패턴이 아닙니다. 매일 밥먹듯이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 패턴인데, 이렇게 패턴으로 섬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 소이 '세족식' 이라는 이 발을 씻기는 의식을 잘 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서로 발을 씻기라는 표현보다는, '서로 섬기라' 는 '섬김의 가르침'을, 발을 씻기는 것으로, 시청각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을 보였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본' 이란, 'example'이란 말로, 한국어로는 '본보기' 로 번역할 수 있고, 또 '' 이란 'Pattern' 이라고 말하는데, 한국어로는 '견본'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샘플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샘플로,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인들은, 세상에서, 샘플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 샘플이 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간단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닮고 싶어 하는 삶' 이 샘플이 되는 삶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나는 정말 저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라고 한다면, 샘플이 되는 삶이 아닌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왜 저렇게 살아!' 라고 하며, 핀잔을 준다면, 샘플이 되는 삶이 아니죠.

 

여러분! 가끔 식당에 가시죠? 그때, 식사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조용하게 기도하고 음식을 먹죠. 그런데, 교회에서 단체로, 식당에 가면, 식사기도를 어떻게 합니까? 보통 큰 소리로 대표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만약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좀, 유별나다, 교양이 없다" 이런 소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공공 장소에서도, 큰 소리로 기도해야, 신앙이 좋은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굳이 큰 소리로 해야, 하나님이 들으십니까? 그렇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큰 소리로 기도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쾌감을 주고,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감을 심어 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식당에 가시면,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개인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거나, 작은 소리로 기도를 해도, 누가 믿음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크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는데, 굳이 크게 해서, 하나님 욕 먹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터키에 성지 순례를 가면, 에베소의 원형 극장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은 꼭 그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원형극장이, 옛날에 만들어 졌어도, 과학적으로 만들어서, 마이크가 없어도, 소리가 얼마나 잘 울리고, 전달이 잘 되는지, 그래서 시험 삼아, 단체로 찬송을 부른 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 관광 온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심지어는 손가락질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 찬양 소리 때문에 하나님이 손가락질을 당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께서 보여주고 싶어 하셨던 새로운 삶의 스타일이 있다면 "섬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다른 사람에게 본이 되는 삶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오늘 본문을 가리켜 "때를 가리지 않는 섬김"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조금만 힘이 들어도 섬기지 못할 이유가 됩니다. 가진 것 없어서, 바빠서, 섬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데, 예수님은 가장 힘든 순간에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하루 전날 이었거든요. 여러분 죽기 전에, 이렇게, 본을 보이고, 가르치시고, 섬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장 내일이면 죽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섬김이란, 시간과 장소와 환경을 초월해야 진짜 섬기는 것입니다.

 

그럼 오늘 예수님의 섬김의 본은 어떤 섬김이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의 섬김의 본은 섬김의 대상에서 누구도 제외시키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2절에 보시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가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룟 유다도 예수님이 발을 씻기시는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마음에 감추고 있는, 가롯 유다 앞에서도 예수님은 수건을 들고 대야를 놓고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에 있어서 그 누구도 섬김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을 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가르쳐 주신 섬김의 본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늘 자기편과 반대편을 갈라놓습니다. 내편이 아니면, 모두 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도 니편 내편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누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팔려고 하는 가룟유다을,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편 나누지 말라는 말입니다.

 

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 란 책을 보시면, 데이빗 케이프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어떤 음성이냐면, 백인과 흑인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그것도 빈민자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 가서, 그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빗 케이프는"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그들에게 다가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처음 '소웨토' 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을 회심시키고, 그들의 발을 씻겨 줍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자신의 삶을 주님께 헌신하고, 데이빗 케이프와 함께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겪는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섬김의 대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배든, 사형수든, 거지든, 배신자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배신할 사람도, 다 아시면서도, 품으시고 섬김의 본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신, 패턴을 따라, 그대로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흑인, 백인 가르지 말아야 합니다. 범죄자에게도 섬김의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도소 선교를 하며, 사형수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극악 무도는 강도에게도 복음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섬김은, 섬김의 대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섬기셨다는 것입니다.

 

  1. 두 번째, 주님의 섬김은, 낮은 곳에서 행위로 보여주는 섬김이었습니다.

 

여러분 궁금하지 않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설교도 잘하시고, 가르치기도 잘 하셨는데, 그냥 섬김에 대해서, 설교를하시든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신든지, 하면 되는데, 왜 굳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셔야만 했는지요…

 

그 이유는요. 섬김은 말로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섬김은, 이렇게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어야 섬김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손수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최고의 성자라고 일컬어 지는, 앗시스의 성자 '성 프랜시스' 는 본래 부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젊었을 때 부유했기 때문에 무엇이든 최고급이 아니면 만족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그야말로, 그는 귀공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늘 평안하고 즐거운 것 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적인 고민, 종교적인 고뇌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는 홀로 말을 타고, 교외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길가 한 문둥이에, 처참한 모습으로 구걸하고 있는 한 문등병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주 몸서리 쳐지는 모습의 문둥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간 프랜시스의 마음속에 이상한 충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내려 거의 본능적으로 두 팔을 벌려 그 문둥이를 껴안았습니다. 그가 문둥이를 힘껏 껴안는 순간, 그 문둥이는 예수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후로, 프랜시스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웅장한 성당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엄숙한 미사 시간에 만나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평생은 낮은 자리에서 행동하는, 수도사로,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적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지극히 적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섬김은요. 높은 곳에서, 말로만 하지 않고, 낮은 곳에서,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는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소매치기가 6살 짜리 아들 하나를 데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아들이 이웃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쳐 왔습니다. 이것을 안 그의 아버지가 매를 들고 그를 때렸습니다.

 

왜 남의 것을 훔쳤느냐, 먹고 싶으면 돈을 달래서 사먹지 왜 훔쳐! 라고 하면서.....네놈 하나 키워서 공부시켜 보겠다고 소매치기를 하는 것도 지겹고 소름끼치는데 네놈까지 도둑놈이 될 작정이냐! 하면서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매를 맞고 서 있던 6살 짜리 아들이 울면서 하는 말이 '아빠 미워, 아빠도 그러면서 왜 때리는 거야 ! ...' 했다고 하죠. 우린 누구에게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이 잘 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더 전도가 안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보여주진 본을, 그대로 실천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