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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고자질 하는 사람들 - 요 8:1-11

by Peartree 2012. 12. 26.

고자질 하는 사람들

요 8:1-11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한 두번정도, 설교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본문을 가지고, 다른 각도로 접근해 보기를 원합니다.

보통 설교자는 이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설교합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 밖에 없는 간음한 여인을, 주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쓰시는 지혜로운 방법으로, 저들의 양심을 건드려서, 여인을 구해 주셨다는 식으로 말씀을 전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떠한 죄도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다 죄인이다. 라고하며 말씀을 전개해 나갑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간음한 여인의 입장이 아니라, 여인을 향해서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있는, 이 사람들의 입장에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고자질 하는 사람들' 입니다.

'고자질' 이라는 말은, 그렇게 좋은 상황에서 쓰이는 말이 아닙니다. 남의 죄를 보고, 가만있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일러 바치는 것이 고자질입니다.

 

당시에는, 오늘처럼, 이렇게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 법이었습니다. 아마 지금도, 이스라엘 말고,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같은 나라는, 간음한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돌로 쳐죽이는 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돌로 쳐 죽이냐면, 현장에서 죽였습니다. 범행현장에서 말이죠. 그래서 사실 재판할 필요도 없이, 사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돌을 던지면, 그것이 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이들이 현장에서 법을 집행하지 않고, 3절과 4절에,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왜 왔습니까? 고자질 하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고자질 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이며, 고자질은 정말 해도 괜찮은가? 말씀에서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고자질 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면, '나는 깨끗하다' 는 생각이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돌을 들고 서있는 군중들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정말로, '나는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저 여자를 죽일 수 있다.' 는 사람과,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양심을 속이고, 안 그런 것 처럼, 자신을 속이고 서 있는 사람', 이렇게 군중들은 둘 중의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둘 다, 죄인인 거 아십니다.

'나는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짓지 않았다.' 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죄인인 것을 발견하지 못한 죄인이고, '돌에 맞아 죽을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 은, 양심을 속이는 죄인들입니다. 어쨓거나, 다 죄인인 것입니다. 실제로 죄인들이거나, 아니면, 양심을 속이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시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거기에 두 아들이 나옵니다.

작은 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기 몫을 미리 달라고 해서, 외국에 나가서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됩니다. 말 그대로, 죄인입니다. 눈에 보이는 죄인. 아버지는 이 아들 때문에,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 이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큰 아들이 있습니다.

이 큰아들은, 열심히 일만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다고 할 정도로, 겉으로 보기엔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완벽에 가까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속을 들여다 보니까, 얼마나, 아버지를 증오하고, 동생도 미워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매일 같이, 집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런 탕자를 왜 기다리는지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를 더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속으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큰 아들도 죄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인, 아버지는 이 아들 때문에도, 마음 아파했습니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밑에서 일을 잘 하는 것 처럼, 보였을 지 몰라도, 속으로 죄 짓고 있는 아들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이 두 아들은, 집 밖에 탕자와 집안에 탕자라고 말합니다. 또는 겉으로 보이는 죄인과, 겉으로 보이지 않는 죄인으로 나눌 수 가 있습니다. 어쨓거나, 둘다 죄인입니다.

 

돌을 들고 서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두 종류의 죄인들이었습니다. 나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며, 돌을 들고 고자질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죄를 지으면서도, 자기 양심을 속이고, 죄 없는 사람처럼, 돌을 들고 고자질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결국엔 다 죄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웃긴 것입니다. 죄인들이, 죄인을 고자질하고 있으니 말이죠. 뭐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라는 격입니다. 내 눈에는 들보가 있는데, 남의 눈에, 티끌을 보고, 빼내려고, 하고 있던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도 간음한 적이 있으면서,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양심을 속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끝까지 양심을 속이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이, 양심을 깨우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돌아온 사람은, 구원의 백성이 되는 것이고, 서기관, 바리새인, 유대인들처럼 끝까지 양심을 속이면, 멸망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어느정도 양심을 속였냐면,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자기들의 양심을 건드리니까, 너무 듣기 싫어서, 예수님을 모함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벧전 3:21절에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 반대로 악한 양심은, 하나님과 등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다행이도, 처음에는 자기 양심을 속이고,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었는데, 주님께서 땅에 무엇인가 쓰신 그 글씨를 읽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뒷 걸음쳐 도망갔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이 죄짓는 것을 보면, 같은 교우가 죄 짓는 것을 보면, 아니면, 세상 사람들이 죄 짓는 것을 보면, 습관적으로 돌을 집어 듭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하지 마시고, '나는 깨끗한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요. 그러면, 내 안에 남아 있는 양심이, 대답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돌을 내려 놓게 될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죄인을 다루시도록 맡기고는, 나는 멀리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서, 땅에 글씨를 쓰신 것입니다.

 

  1. 두번째로, 고자질은,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 군중들이 간음한 여인을, 그 자리에서 돌을 던지지 않고, 예수님께로 끌고온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 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면서, 많이 겪는 일이죠.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잘못을 고자질 할 때, 그 아이는 고자질 한 후에 엄마 아빠에게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이 엄마, 아빠가, 다른 아이를 혼내쳐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대 부분의 엄마나, 아빠는, 그 아이의 말만 듣고, 혼내 치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 엄마나 아빠는 작은 함정에 빠지는 거예요. 고자질 한 아이의 성의를 봐서, 최소한 혼을 내 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무턱대로, 혼을 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갈등이 생깁니다.

 

오늘 본문은 이보다 더 한 함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용서해 줍시다' 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자는 죽어야 마땅하니까요. 반대로, '이 여인은 죽어야 한다' 라고 말하면,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가르쳐 오신, 사랑과 용서의 법에 어긋나니까, '사람들이, 당신은 사랑하고 용서하라고 가르치고는 왜 용서하지 않습니까?' 라고 할께 뻔합니다. 그래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완벽하게 , Set up 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남의 얘기를 하거나, 남의 잘못을 들춰 낼 때는, 항상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거 아십니까?

남의 죄나 잘못을 말 할 때, 같이 맞장구 치지 않으면, 거기에서 또 기분이 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함정에 빠집니다.

 

그때, 우리 주님이 어떻게 하셨는지, 지혜를 짜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주님께서는, '죄 없는 자가 돌로치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와서, 남의 죄를 말하고, 고자질하는 그에게, '당신은 죄가 없습니까?' 라고 말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럼 완전 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얘기하면, 끝장입니다. 다시는 안볼 거예요.

그러면, 말을 아낀다고, 예수님처럼, 땅에 무언가 쓰신 것처럼, 땅에 뭔지는 모르지만 쓰시고 앉아 있겠습니까? 그러면 또, 정신이 나갔냐고,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정말, 그런 난처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7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돌을 들고 있는 군중을 향하여 딱 한마디 하십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을 좀 부드러움 말로 바꿀 수 있습니까? 이렇게 바꾸면 좋겠습니다.

" 다 죄인 걸요.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줍시다"

 

사실, 우리는 모두는, 이 간음한 여인보다 낳은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 여인은 죄가 드러난 것 뿐이고, 우리는 죄를 숨기고 있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의 불꽃 같은 눈으로 보니까, 다 똑 같은 죄인들인 것입니다.

 

여러분, 혹여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그들의 죄를 들춰내면,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아십니까? '네가 나를 함정에 빠지게 하는구나!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네가 말하는 그 사람도 죄인이지만, 너도 죄인인데,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 죄인도 사랑하고, 너도 사랑한단다.' 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지금까지, 손에 돌을 들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정말 그랬다면, 이제는 잠시 돌을 내려놓고, 내 양심에,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도 저, 간음한 여인처럼, 죄인은 아닌지,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고자질 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고자질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 중 하나가, 어느날 신발가게에서 신발 한켤레를 사고 난 후 주인에게, '돈은 내일 주겠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 제자가 돈을 들고 찾아가니, 주인이 죽은 것입니다. 그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양심에 걸려 매일 고통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 보이던 신발이 이제는 '흉측한 가시' 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신발 값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가게를 찾아가 돈을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제게는 살아 있습니다.'

 

맞습니다. 양심이 죽으면,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죄가 보이지 않으면, 회개도 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영혼이 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내 안에, 살아 있는 양심으로, 하루 하루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