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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구원인가, 떡인가 - 요한복음 6:22-40

by Peartree 2012. 12. 26.

구원인가, 떡인가

요한복음 6:22-40

 

제가 질문한가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먹기 위해 일하십니까? 아니면, 일하기 위해 먹습니까? 사람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겠지만, 솔직히 이야기 하면,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씀 드리면,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적으로 말씀 드리면,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도 벌지 말고, 양식도 사먹지 말고, 그냥 죽으란 말입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죠. 성경은 또 이렇게 말씀하고,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땀 흘려 수고해서 먹고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지 말라' 고 말씀하신 이유는, '먹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서는 안된다' 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인생이, 먹고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우리 인생은 짐승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한다면, 저 넓은 풀밭에서 열심히 풀을 뜯어 먹는 송아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오로지 자식을 낳아 기르는데 만 평생을 바친다면, 호랑이도 자식을 낳아 애지 중이 키우는데,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죠. 또 명예와 권력을 얻고 기뻐한다면, 사자가 밀림에서 패권을 잡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짐승과 완전히 구별되게, 만든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끝날, 이 땅에서의 삶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영원히 끝도 없는, 천국의 삶을 위해서 일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신 것이 이 말씀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 , 이 땅의 것은 먹어도 배고프고, 그러다가 언젠가는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다' 그래서 나를 믿으면, 영원히 주리지 아니할 것이다. 오늘 본문 35절이 이 말씀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니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오늘은, 당시에 예수님을 좇았던, 사람들과, 지금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을 비교해 보며,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좋았는지, 지금은 어떻게 좇아가고 있는지, 찾아보며,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지난번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구운생선 두마리로 장정만 5000명을 먹이신 사건과, 계속해서 연결되어지는 말씀입니다.

지지난주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그 기적을 맛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배에 태워,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 놓으시고는 자신은,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바다 건너편으로 가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바다위를 걸어 오셔서, 바람을 잠잠케 하시고, 제자들을 구해주시는 이야기까지가, 지난 주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기억나시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4절을 보시면, "무리가, 거기 예수님도 없으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이 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2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과,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공통점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믿든, 저렇게 예수님을 믿든, 믿는 것은, 매 한가지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썩을 양식을 위하여 드리는 사람이 있고, 영의 양식을 위하여 드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도,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오시는 분도 있고, 복 받기 위해서 나오시는 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나오는데, 덤으로 구원까지 받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거의 지배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믿는 분과, 복 받기 위해서 믿는 분과, 이왕이면, 구원도 받고, 이 땅에서 복도 받기를 원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종류의 신자들 중에, 여러분, 가장 위험한 신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복도 받고, 구원도 받겠다는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분들은 복을 받으면, 구원도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이 떠나면, 구원의 소망도 같이 버릴 수 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복이란, 어쩌면, 함정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보시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이 부자는 영혼의 구원을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좇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이렇게만 말씀하셨다면, 참 야속하죠, 다 팔라니요. 그런데, 이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니라" 더 큰 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이 청년은, 이 땅에서의 물질의 복과 구원을 같이 움켜 쥐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복과 부유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도 덤으로 받고 싶었던 거지요.

그리고는 결국 근심하고 떠나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더 위험하죠? 물질을 버리고 가난해야 된다고 말씀하니까, 구원도 팽개치고 돌아서는 사람이 그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요. 영혼 구원에 있어서, 물질은 필요하지 않다는 거예요. 가난해도 구원받을 수 있고, 건강하지 못해도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구원은 오직 예수만 믿으면 되는 거예요.

 

40절 보세요.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을 것' 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물질의 복과 구원을 함께 받으려고 했던 사람들만 위험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복만을 보고 믿었던 사람들도 위험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계속해서, 떡을 찾고 있지 않습니까? 24절 보시면, 떡을 찾으러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는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떡을 위해서, 믿지 말고,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믿으라고 주님께서 그렇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예루살렘 거리가, 살벌하게 변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집안에서 떨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면,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은, 적게는 수만명, 많게는 수십만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남은 사람은, 마가 다락방의 120명이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도망갔습니다. 떡을 얻어 먹은 사람도 도망가고, 기적과 표적을 본 사람들도 도망갔습니다. 오로지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마가 다락방에서 일심으로 기도하던 120명 만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삼박자 구원론으로 유명해서, 대형교회가 된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있습니다. 삼박자 구원론 이란 이런 것입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네가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는 성경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이 구원 받는 것 뿐만 아니라, 가난과 병을 물리치고, 물질의 복도 함께 받는, 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 때문에, 한 때, 순복음 교회는 기복신앙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메어지지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강과 부에 대한 갈망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 성도들은, '교회 다니면,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을 때, 저와 제 아내가 순복음 교회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은 아니고, 평택 순복음 교회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때에도, 그분이, 부부가 서로 손잡고 축복기도 해 주라고,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위해서 축복기도 해주고, 부모가 자녀를 위해서 축복기도 해주는 것은 당연히 성경 적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신 그 배경은, 삼박자 구원론에 근거한 것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그냥 영혼의 구원인 것입니다. 거기에, 덤으로, 물질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을 껴 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물질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영혼의 구원도 흔들리는 것입니까?

흔들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어서, 복을 받지 못하니까, 떠났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그렇게, 떡을 찾는 사람들을 향하여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35절을 보시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38, 39절에도, '내 뜻은, 내게 보내신 영혼을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즉 영혼의 구원만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삼박자 구원론이 맞다면, 당시의 예수님 때문에, 가난하고 헐 벗고, 굶주렸던 사람들, 히브리서 11:38절에, "광야와 산중와 암혈과 토굴에 유리 방황했던"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삼박자 구원론을 가르치면, 무엇이 문제냐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소홀해 집니다. 그래서 복과 건강을 원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지만, 결국 그들의 목적은 떡이였기 때문에, 떡이 떨어지면, 떠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영혼의 복을 가르쳤어야 하는 거예요. 주님이 그렇게 가르치셨고, 사도바울도 그렇게 가르치셨고, 제자들도 그렇게 가르치셨습니다. ,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라고 말한, 사도요한이 이 말씀을 한 것은, 구원론이 아니라, 사랑하는 장로 '가이오' 에게, 안부를 묻은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고, 하는 일도 잘되고, 건강하기를 내가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쓴 동역자에게 편지를 쓰면서, 서두에 쓰는 첫 인사하는 내용이였습니다.

 

성경은 물질의 복을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딤전 6:9절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 고 말씀하고, 딤후 3:1절에는, "말세에는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게 될것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 2:9절에는, "네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 라고 말씀하고, …… 수도 없이 많은 성경 구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물질을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 부분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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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 예수 믿으면, 물질의 복을 받는다' 라고 한다면,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부자 청년은 기가 막힌 샘플이죠.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면서, '나를 믿어라, 그리하면, 이 청년처럼, 부자가 될 것이다." 이 부자만 데리고 다니면, 전도가 저절로 됬을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다 나누어 주고, 빈 털털이로, 나를 좇으라고 말씀합니다.

 

왜 그러셨을까? 묵상을 해보니까? 만약에 예수님께서, 이 부자청년을 부자상태로, 그대로 데리고 다녔다면, 사람들이, '나도 저 청년처럼, 예수 믿어, 부자가 되어야 겠다' 라는 생각을 할 것 같아, 빈털터리로 따르라고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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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러분, 마지막에 남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 남는지 아십니까?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믿는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성경이 역사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자도 떠나고, 병고침 받은 사람도 떠나고, 기적과 이사를 본 사람도 떠나고, 오로지 영혼구원을 받기 원해서, 믿은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삼박자 구원론이 위험한 것입니다.

살기 좋을 때는, 모르는데, 돈 없고, 힘들면, 그때도, 여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힘들고 고난이 오고, 가난이 오면, 그때에도, 여전히 영혼의 구원 받기 위해서, 믿음이 변치 않을 수 있냐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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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그래서 주님은 분명히, 우리를 달아 보십니다. 시금석이 뭔지 잘 아시죠. 금이 진짜 금인지, 가짜 금인지, 달아보는 것이 시금석입니다.

주님께서, 언젠가는 우리에게 시금석을 들이대시면, 그때에도 여전히, 진짜 그리스도인 인 것으로 판명 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세상의 사람들이, 영혼구원 말고, 다른거에 매달리고 있을 때, 기독교 본질을 흐리지 말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에 있음을 기억하시고, 진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