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없는 자가 돌로치라
요 8:1-11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큐블로 라는 분이 쓴 '인생수업'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임종을 앞둔 사람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레슨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배워야 할 과목들은 무엇인가? 그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정리하여 만든 책이 '인생수업' 입니다.
그 책에 보시면, 우리가 인생에서 배워야 할 과목들을 열 가지 정도를 죽 나열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인생에 빠뜨리지 말고 꼭 배워야 할 과목이 있는데, 그것이 '용서' 라는 과목이라는 것입니다. 이 용서는 선택 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 이라고 말하면서,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하고, 인생을 살면서 내가 실제로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고 용서 하는 삶. 이것이 인생에 정말 힘을 주고, 평안을 주고, 능력을 주고 감사를 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책은 실제로 용서에 도움이 되는 세가지 단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고 할 때,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단계는, 그 사람을 한 인격체, 한 인간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비인격체로 바라보면, 예를들어, 그놈, 그 나쁜놈, 이렇게 비인격체로 바라보면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도 나와 같이 연약한 인간이란걸 인정하고, 불쌍히 대해주는 마음과 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저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는가?, 내가 왜 저 사람에게 분노의 감정을 갖고 있는가?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향하여 분노하고, 용서하지 못하면, 용서의 마지막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이 분노의 감정을 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노의 감정, 증오의 감정, 그 사람과 맺고 있는 잘못된 감정을 풀 때에만 내가 진정으로 용서를 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않으면, 자유가 없습니다. 내가 용서받지 못하면 자유가 없는 것 처럼,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않아도 나에게 자유가 없습니다. 평안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신앙생활 잘 한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막힌 담이 없어야 하듯이, 성도들 사이에도 막힌 담이 없어야 합니다. 그 막힌 담을 허무는 열쇠는 '용서'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서 받아 보시적 있으세요? 아니면 용서 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어떤 분은 '용서하기 쉬워요' 라고 말 하지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용서하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나는 그 사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라고 마음먹으면요. 그때부터 우리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아마 기도도 제대로 안 나올꺼예요. 말씀도 안들어 올꺼예요. 왜냐하면, 내가 용서하지 않는 그 사람이 걸려서, 성령님이 내 안에서 '용서하라' 고 자꾸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지 못했어 ! 라고 한다면, 그 분은 아직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실한 크리스천이라면, 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 앞으로 내가 어떤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용서하실꺼야! 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사람들은 그 어떠한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용서함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신 것이 아니고,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종교지도자들이 질질 끌고 와서는, 이 여자를 돌로 칠까요? 말까요? 예수님께 물으러 왔기 때문에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이든, 남자이든, 이 둘을 끌어다가 현장에서 돌로 쳐서 죽이라는 법 조항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그 법을 들먹이며,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예수님께 묻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들이 이 율법을 몰라서 예수님께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니예요.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이 질문을 던지는 거예요. 여러분 같으면 이 질문에 뭐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만약에,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라' 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려고 할 참입니다. '야! 예수님이 말과 행동이 다르네, 언제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고 하셨는데, 그리고 자기는 죄인의 친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보니, 사람을 죽이라고 하네! 아마 이렇게 소문 내고 다닐 판이었습니다. 반대로, 사랑해라! 용서해라!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사람은 모세의 법에 '죽이라' 라고 했는데, '당신은 모세의 법을 어기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산헤드린 공회에 고소할 판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돌로 치라고도 할수 없고, 돌로 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완벽한 상황을 만들어 와서는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고 있는 거예요.
오늘 이 딜레마에 빠진 예수님, 예수님은 이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셨는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방법을 찾아보시며, 말씀에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 첫째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6절을 보시면,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열심히 쓰기만 하셨지, 예수님께서는 그저 침묵을 지키고 계셨다는 거예요. 전혀 그들의 말에 댓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 ! 너희들 정말 이런식으로 사람을 죽여야 하니?' 너희들이 정말 몰라서 나에게 묻고 있는거니?' 예수님은 이런 말 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침묵하셨습니다.
침묵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돌을 들고 흥분해 있는, 분노에 가득 차 있는 이 사람들을 향하여 냉정을 찾도록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격해있는 군중들을 향하여 '너희들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하시는, Cool Down 시키는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도 삶을 살다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고, 그 상황을 피할 길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궁지에 몰린 쥐처럼, 고양이라고 물고 싶어집니다. 공격해 오는 그들을 향하여 정말 한마디 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정말 한 마디 던지고 나면, 나의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심각해 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교훈이 있다면, 누군가 나를 공격하고, 비난할 때에, 함정에 빠뜨릴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지혜를 잘 붙드셔야 합니다. 침묵하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시라는 것입니다.
어떤 수도사에게 한 부인이 찾아 와서는 상담을 했습니다. '수도사님 ! 저는 남편과 매일 부부 싸움을 해서 남편 때문에 못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수도사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저 창고에 가서 물 한병을 가져오라' 고 그리고 집에 가져가서 남편과 싸우게 될 때, 남편에게 무엇인가 한마디 쏘아 붙히고 싶을 때, 이 병의 물 한 모금을 마시지는 말고, 입에 잠시 물고 있다고, 마시라고, 그러면 이 물이 도움이 될꺼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이 부인이 그 물병을 집에 가지고 가서, 또 남편과 싸우게 되었어요. 이 부인이 병 뚜껑을 열어 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있다가, 삼키고 나니까, 그렇게 흥분해서 쏘아 부치고 싶었던 그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평화가 점점 회복됩니다. 사이가 좋아 졌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해서, 수도사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그 신비의 물병을 또 달라는 거예요. 수도사가 웃으면서 이렇게 얘기 했다고 합니다. '그거, 신비한 물 아닙니다. 평범한 물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건 물이 신비라 아니라, 침묵이 신비라는 거예요.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께서 이 종교지도자들을 향하여 얼마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이 침묵은,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라는 주님의 방법이었습니다. 나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는 중이다. 너희들도 생각하면 좋겠다. 먼저 행동하기 전에, 너희들 마음 가운데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라 ! 그래도 늦지 않다. 지금 예수님께서 침묵으로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돌을 들고 있는 이 사람들을 향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살면서 분이 가득찰 때가 있습니까? 남을 용서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까? 그럴 때, 입을 열면, 분명히 그 말은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럴 때, 잠시 입을 다물고, 마음을 가라 앉히라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은, 마음이 분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 침묵하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두번째로, 이런 상황속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알려주셨습니다.
7절에 보시면, 사람들이 지금 양손에 돌 하나씩 쥐고 있어요. 그 돌로 죄인 하나를 용서의 감정도 없이 내리치기 직전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분노에 찬 그들을 향하여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격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딱 한마디 하셨습니다. "너희중에 죄 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아주 유명한 말입니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도 다 아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없는데……' '너희들도 역시 죄인인데, 같은 죄인끼리 왜 그러니……' 지금 예수님은 짤막하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 죄인이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세가지 죄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첫째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입니다. 이 여인을 저는 공개적인 죄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드러난 죄인이예요. 아마 머리채를 잡혀서 질질 끌려 왔을 거예요.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이 여인을 가운데 세워 놓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의인이고 가운데 서 있는 이 여인만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보여줍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 공격하는 거, 이거 참으로 잔인한 거예요.
그러나 공격하는 이 사람들은 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양손에 돌을 들고 서 있는 군중들. 이 사람들이 두번째 또 다른 죄인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비공개적인 죄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군중들 틈에 숨어서, 그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는 것 같지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라는 말 한마디에 들고 있던 돌을 내려 놓고 뒷걸음질 치는 죄인들입니다.
또 세번째 죄인이 있습니다. 돌을 들고 있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은 의인인척 하는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저는 이 사람들을 가면 쓴 죄인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 세종류의 죄인들 중에 누가 가장 큰 죄입니까? 다 같은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간음한 여인은 적어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을 들고 있는 군중들이나, 가면 쓴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더 큰 죄인들입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묘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악성이 있어서, 자기의 죄는 전혀 모르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듣고 즐기는 악성이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 어둠의 영들, 자살의 영들이 뒤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살했는데, 요즘은요, 자기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게 나서 자살했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시면, 댓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리플(Riffle) 을 단다고 합니다. 이 리플을 다는 사람을 보면, 간접 살인은 저지르는 사람이예요. 한 두 문장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잔인한 말을 씁니다. 인터넷이라, 얼굴도, 이름도 밝히지 않아도 되니까, 자기는 의인이고, 다른 사람은 다 죄인 취급하면서, 악성 댓글을 다는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성글을 쓰는지. 그래서 연예인들이 많이 자살을 합니다.
저도 아침이면, 인터넷에서 뉴스를 보려고 신문을 클릭합니다. 그리고 그날 탑 기사에 별거 없으면, 그냥 닫아버립니다. 그런데 종종 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기사가 있으면 그때는 클릭해서 읽습니다. 남의 죄에 대해서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 기사를 다 읽고 나면, '이런 나쁜 사람' 이 있나, 그러면서 저도 한편으로 '적어도 나는 저런 죄인은 아니다.'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다른 사람의 죄를 듣고 즐겨하는 것,죄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가지고, 폭로하는 것.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는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만 죄인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주님이 보실때는 그 여인만 죄인이 아니라, 그 여인을 고발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죄인이고, 돌을 들고 서있는 군중들도, 똑 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안에서도요, 저를 비롯하여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들춰내면, 냄새 풀풀 나는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혹시나, 내가 돌을 들어 누군가를 향하여 던지고 싶을 때, "너도 죄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찬양을 드리는데, 왜 내가 은혜를 받지 못할까요? 내가 분명 예배를 드렸는데, 왜 내 안에 감동이 없을까요? 원인은 여기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의식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의식만 있다면, 예배의 순서나, 설교의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교회 안에 들어와 의자에 앉는 순간부터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드리러 가는 순간부터 의인 행세를 합니다. 그러면, 남의 죄만 보이게 되고, 허물만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저를 비록하여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서로 서로 성도간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 세번째는, 이런 상황속에서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의인은 딱 한 분 예수님이었습니다. 오로지 죄인을 정죄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11절을 보시면, 그 예수님께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정죄하셨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다 지옥으로 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미국 역사가운데 남북전쟁 당시에 일어났던 아름다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1860년대 미국의 북부와 남부가 이해 관계가 달랐습니다. 북부는 상공이 발달해서 노예가 많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예제도 반대했고, 남부는 거대한 목화농장에 일하는 노예 때문에 노예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을 당시에 노예 해방을 위해서 남북전쟁이 일어납니다. 당시에 북군이 남군에 비해서 군인이 세배는 더 많지만, 이상하게 전쟁하면 자꾸 패하는 거예요. 그래서 북군의 병사들이 군대에서 탈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법이 군에서 탈영하면 사형이란 제도를 만듭니다. 많은 병사들이 탈영했다가 많이 붙잡혀 들어와 사형을 당하게 되는데, 당시에 또 무슨 법이 있었냐면, '사면청원제도'(Pardon petition) 라고 해서 딱 한번의 사형을 면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 한번만 살려달라는 청원을 하는데, 반드시 탄원서를 첨부해야 했습니다. 부모님이라든지, 친지라든지, 유력한 인사의 탄원서를 붙여야 했습니다. 이 사람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주십시요. 라고 하는 소원장 같은 것입니다. 하루는 링컨이 사무실에 있을 때, 그의 책상 위에 청원서 하나가 올려졌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뒤에 탄원서가 붙어 있지 않는 거예요. 누군지 자기가 살려 달려고 청원을 하긴 했는데, 가족이나, 친지의 탄원서가 붙어 있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참모에게 물었습니다. 이사람 탄원서가 없지만 풀어줍시다. 라고 말합니다. 그때 참모가 안된다고 펄쩍 뛰는 거예요. 법은 법이라는 거예요. 이 사람은 살려주면, 다른 탄원서가 없는 사람도 다 살려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죽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사람 가족은 어디있나? 물으니까, 전쟁에 다 죽었다는 거예요. 친구는 있는가? 물으니까, 친구도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 때 링컨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럼 내가 그의 친구가 되어 주지…내가 탄원서를 써주지….내가 청원서에 사인해주지……이 사람 살려주게…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설 때,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의 가족도, 친한 친구도 나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혼자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할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죄의 무거운 짐을 어떻게 해결 할 수 있냐는 거예요. 그 누구도 해결할 사람이 없습니다. 단 한분 죄없으신 예수님 말고는요. 그 예수님께서,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친구가 되어 줄께, 태가 탄원서 써줄께. 내가 사인해주지.
오늘 이 간음한 여인을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용서 받은 우리는 다시, 용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간음한 여인의 현장 가운데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입니다.
원하옵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용서가 메말라가는 세상입니다. 남의 죄를 즐겨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향하여 손가락질 하며, 정죄하기를 좋아하지는 않는지, 그러나, 내가 손가락질 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꿈의 교회 안에는, 정말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는 주님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이 많이 지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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