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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흔들리지 않은 신앙-행 21:1-14

by Peartree 2012. 12. 25.

흔들리지 않은 신앙

행 21:1-14


지난주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마지막 작별인사하며, 고별설교하는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라고 할 정도로, 앞으로 당할 고난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었던 힘은, 하나님께 매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눈물의 기도에서 비롯된다고도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도바울이 여러도시를 거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최종목적지 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도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존스토트 목사님의 십자가란 책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땅에 오셔서, 갈릴리에서부터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적지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이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최종 목적지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영적인 가나안 땅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계시록 21:10절을 보시면, 그곳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쉽게 달려간 사람은 한명도 없다는 거예요. 얼마나 힘들고 고난의 길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통하여 우리의 천국가는 길과 비교해 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천국가는 길은 성도간의 사랑과 교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가는 곳 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먼저 찾기도 했고, 그들이 바울을 찾아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기도하고, 서로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4절보십시요.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며" 이 교제가 얼마나 감동의 교제였는지 모릅니다.

4절 하반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해석학 보다는, 그 만큼 바울을 걱정해 주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바울도 제자들이 왜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결박과 환란이 나를 기다린다" 라고 말했듯이 앞으로 당할 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말긴다고해서 도중에 포기할 바울이 아닙니다. 누가 뭐래도 갑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너무나 안타까운 거예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가지 말라고 말렸던 거예요. 이렇게 성도간에 가족같이 아껴주고 염려해 주고 하는 것이 바울 목회의 특징이었습니다.

 

5절 보세요. 바울을 보내면서도 염려하는 모습이 역역합니다.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을 하고' 그래도 안심이 안되는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바울을 전송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천국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 교회안에서, 형제 자매란, 아주 특별한 관계입니다. 천국에 함께 들어갈 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중에 누구하나라도 연약한 사람이 있으면, 함께 염려해 주고, 기도해주고 돌봐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1. 두번째는, 천국가는 길은 유혹을 이기며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두로의 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바울은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11절에 보시면,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사람,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손과 발을 묶고, 성령이 말씀하시는데, '예루살렘에 가면, 바울을 이렇게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줄 것이다. 그러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라고 예언을 합니다.

 

지금 바울이 가는곳 마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올라가면, 환란을 당하게 될거라는 거예요.

 

마귀가 유혹을 하면, 단번에 물리치면 그만인데, 친한 사람들이 유혹을 하면 물리치기가 더울 어렵습니다. 더더욱 어려운건, 기도하는 사람들이, 성령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서 유혹을 하면, 정말 결단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바울이 지금 이와 똑 같은 상항에 처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보통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면, 분별을 잘해서 물리치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친한 사람들이 어떤 말을 하면, 그때는 잘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시험이 더 많이 있습니다. 더더욱 이겨내기 힘든 것은, 교회 안에서, 기도좀 한다는 사람들이, 오늘 본문에서처럼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서 말을하면, 그때는 분별을 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기도원 같은 곳에 가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예전에 충남 공주에 금란 기도원이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기도원 원장이 아주 신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병자도 고치고, 기적도 일어나고, 그 기도원이 추적 60분에 '기도원의 실태'에 대해서 방송에 나왔었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젊은 여자 신도들이 있었는데, 집에 가지 못하고, 그 기도원 안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왜 집에 가지 않냐고 기자가 물었을 때, 기도원 원장이 그러는데, 집에 가면, 큰 봉변을 당한 다는 거예요. 병 고치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은, 기도원 밖에 나가면, 그 병으로 죽는 다고 하고, 부부간의 문제로 찾아온 사람은, 밖에 나가면, 이혼하게 된다고 하고, 젊은 여 신도들에게 밖에 나가면, 죽을 지도 모른다고 해서, 신실하게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간 성도들을 겁을 줘서, 꼼짝못하게 만들어 그 안에서 봉사하게 만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님은 한분이신데, 왜 이 사람에게 한 말이 틀리고, 저 사람에게 한 말이 틀리냐 라고 할지 모르지만, 성령님은 이사람 저사람에 다르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성령님의 음성에 해석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해석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4절도에도,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성령님께서 들어가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것을 성령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의 생각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11절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손발이 묶일 것을 성령님이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으로 가지 말라고 말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언이라는 것은 바로 보고 바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신학교 뒷산에 기도원이 있었습니다. 산 중턱이었는데, 가끔 기도소리가 학교까지 들려서 시간이 좀 있어서 산책이라도 할 겸 올라갔습니다. 천막을 치고, 6명 정도 예배를 드리는데, 뒷자리에 앉아서 저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예언기도시간이라고 해서 한사람 한사람 예언기도를 해주는데, 지금도 잊지 않는 것이, 제가 아주 큰 교회 목회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듣기는 좋았는데, 이러한 예언도 받아 들이는 사람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1000명 목회해서, 그 중에 50명 구원시키면, 100명 목회해서 100명 구원시키는 것 보다 작은 목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교회의 건물이 크고 작은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잣대는 성도수에 있지 않습니다. 온통 하나님의 관심은 그 교회에 진정으로 구원받을 하나님의 백성이 몇 명인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목회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목회가 큰 목회일지도 모른다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가는 길에 수 많은 종류의 유혹과 미혹이, 우리의 발목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올바른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해달라고, 지혜의 영을 구하며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 세번째로, 천국가는 길은, 일편단심 하는 길입니다.

 

14절 보시면,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현대인의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서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천국가는 길은 누가 말린다고 도중에서 멈추는 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아가보' 라는 사람은 성령님을 들먹이며 가지 말라는 거예요. 지금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며, 꼭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길 가려느냐고 하면서 말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그렇게 예수믿어야 하느냐? 수요예배 가야 천국가느냐, 꼭 새벽에 호들갑을 떨어가며 신앙생활해야 하느냐? 하나님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했지, 매 예배마다 그렇게 갸야 하느냐? 얼마나 많이 성경을 들먹이며,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고 있습니까?

 

오늘 바울의 신앙을 보십시요. 아무리 말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앞에 두손들었습니다.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이 이런 일편단심의 신앙을 가지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러면 미혹하려는 사람은 더 이상 미혹하지 못하고, 떠나갑니다.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더 이상 유혹하지 못햇다" 라는 말로 바꿀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다 보면, 남의 말에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 생활 가운데 자주 넘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이 시험에 들면 함께 시험에 들고, 남이 떠나면 함께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58절에 보시면, 바울은 이렇게 우리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고전 16:13절에는 "남자답게 강건하라" 고 권면합니다.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믿음의 대장부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타우센트라는 선교사가 남미를 전도하는 중에 돈 빌레모라는 한 원주민 젊은이에게 복음을 전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돈 빌레모라는 친구는 그 사랑이 너무 감격하여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타운센트 선교사를 찾아와 사표를 던지며 "전 여기까지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묻자 사람들이 욕하는 소리와 비난하는 소리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의 불평을 듣던 타운센트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누구를 위한 복음 전도자인가?" 라고 묻습니다. '그야, 주님이십니다" 그러자, 그렇다면, 그 사표를 받으실 분도 주님일세, 주님께 직접 그 사표를 내는 것이 어떨까?

그러자 그 청년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제가 주님께 사표 낸다고 말씀드리면, 아무래도 안 받으실 것 같은데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타우센트 선교사는 호통을 치며, "주님께서 사표를 받지 않으신다면, 그 분은 아직도 자네를 사용하시고, 자네가 끝까지 달리길 원한다는 뜻이네"

 

우리 주님은 우리가 끝까지 달려가기 원하십니다.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모르지만, 제일 마지막 골인 지점은 영광의 순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