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향하여
행 20: 17-35
지난 주에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미신타파 하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미신이 '아데미 여신' 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의 에베소 사람들이 이 미신을 섬기고 있었는데, 바울은 그들과 어떻게 싸웠냐면, 정면승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담대하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라고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17절을 보시면, 바울이 여러 도시를 거쳐서 밀레도라는 도시에 왔습니다. 여러도시를 거치는 동안 별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드로아라는 도시에서는, 7절부터 12까지 보시면, 바울이 밤중까지 설교를 하니까,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 앉아 졸다가, 삼층에서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를 안고 기도함으로 살리는 기적을 행하게 됩니다.
예전에 부흥강사님 들이 설교시간에 졸지 말라고 하며, 이 본문을 가지고 예를 많이 들었습니다. '설교시간에 졸면 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죽는 다는 말이 아니고, 영적으로 죽는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영적으로 약해지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도. 베드로 후서 마지막장 마지막 절에,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읽고, 들어야 믿음이 자랍니다.
이렇게 말씀시간에 졸다가 떨어져 죽은 청년을 다시 살리는 헤프닝이 있은 다음에, 17절에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서, 장로들을 밀레도에 오라고 초청을 합니다. 왜 장로들을 오라고 하였 나면, 바울이 마지막 선교 보고 겸, 앞으로 마지막이 될지 몰라서, 보고 싶었던 거예요. 이 이유가 22절에 나와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절에도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드디어, 그 살벌한 예루살렘으로 들어 갈려고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으면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당시는 어떠했겠습니까? 당시는 예루살렘에서의 복음전도는 순교를 각오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곳에 가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까, 장로들은 보고 싶었던 거예요.
영화 '회복' 이라는 기독교 영화는, 이스라엘에 사는 메시아닉 쥬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영화에 보시면, 2008년 3월 20일 이스라엘의 아리엘시에 사는 데이비드 오르티즈와 그의 아내에게 소포 하나가 배달 되었습니다. 그 소포에는 사탕과 초코렛이 들어 이었고, 15세된 그의 아들이 소포에 들었있던 초코렛을 먹으려고 포장을 뜯는 순간 폭탄이 터졌습니다. 폭탄은 아파트의 창문을 다 부수었고, 수 마일 밖에서도 폭발음을 들을 정도로 강력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실려간 에이미는 다행이 생명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의 얼굴과 온몸에 100여개의 못과, 나사못, 바늘들이 박혔습니다.
이것이 지금 이스라엘의 메시아닉 쥬들의 삶입니다. 현재 이스라엘에는 메시아닉 쥬가 6000명에 15000천명입니다. 아주 극 소수입니다. 그래서 이런 테러를 당해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정부는 공식적으로 메시아닉 쥬들의 예배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런 상황인데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하는 거예요.
왜 가려고 하면, 그 이유를 24절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명 때문에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 힘을 어디서 나오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바울의 사명감당의 힘은 하나님께 매여 있는 데서 나옵니다. .
22절 보시면,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여 있다는 것은 묶여 있다는 말입니다.
10년도 훨씬 더 되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신창원이라는 탈옥수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 하나를 잡지 못해서, 징계를 먹은 경찰이 60명입니다. 서울 경찰정창 까지, 해임되고, 옷을 벗을 고위간부들이 10명이나 되었습니다. 한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18개월 동안 도망 다니다 결국에는 검거되었는데, 부산으로 압송될 때, 기자가 가서 물었습니다. "소감이 어떻습니까?" 그때 단 한마디 "홀가분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붙들리지 않았을 때도 그는 늘 편하지 않고, 마음은 항상 붙들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중압감을 느끼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리고 붙잡히니까, 그 중압감에 벗아나게 되서, 홀가분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비단 신창원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운거 같지만, 자유롭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 재미에 매여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들에게 매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에 매여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에 매여 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가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의 대도 조세형이라는 분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출감해서, 교회마다 다니면서, 간증집회를 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을 때, 그분이 저희 교회에 집회를 왔었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접대를 해야 하는데, 바쁘셔서, 저와 다른 전도사님과 같이 저녁식사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큰 도둑과 같이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정말 도둑이란 느낌은 전혀 없었고, 새롭게 거듭한 집사님이나, 장로님처럼 보였습니다.
몇 달이 지나서, 저는 그분이 일본에서, 보석을 훔치다 걸렸다는 말을 듣고,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정말 그분이 아니길 바랬습니다. 예수님을 믿긴 믿는데, 도벽근성에 매여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지 못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자유 해야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부터 자유해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인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하나님께 매인바 된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세상으로부터는 자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의출신 배경이, 그의 학문이, 그의 잘못된 열심이 얼마나 그를 올가 맨지 몰라요. 그런데 예수 믿고는 그 잘난 베냐민 지파 출신도 버렸습니다. 그 잘난,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대단한 학문도 배설물같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매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바울의 고별설교입니다. 마지막으로 에베소에 3년 동안 사역하면서, 많은 리더들은 세웠는데, 그 리더들을 모아 놓고, 나는 성령에 매여서 예루살렘을 갈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죽으러 가겠다는 말입니다. 나는 체포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37절에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얼마나 사역을 잘 했는지 모릅니다. 저도 이렇게 사역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목회자와 성도가 원수가 되서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서로 눈물로 기도해 주고, 헤어지면서 까지, 못내 아쉬어 하고, 걱정해 주고 하는 모습. 이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이렇게 되기 까지는, 세상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매여 사역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바울이 늘 그의 목회에서 고민했던 것이, 이 두사이에서 갈등이었을 겁니다. 저도 얼마 해보지는 않았지만, 이 두사이에서 고민을 많이 하게 됩니다. 세상에 매여 목회를 하느냐, 하나님께 매여 목회를 하느냐? 바울이 이 고민을 하다가 결국 결단한 것이, 갈라디아서 1:10절 "이제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 매이기를 소망하는 고백…..
- 두번째, 사도바울의 사명 감당의 힘은, 깨끗함에 있었습니다.
33절 보시면,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지금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을 모아 놓고, 고별설교를 하는데, 이 설교의 마지막 부분이 무엇이냐면, 내가 물질을 탐내지 아니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신학할 때, 목사님들이 사역지로 떠나기 전에, 마지막 고별 인사 하면서, 우스개 소리로, '혹시, 제게 돈 빌려주시고, 못 받으신 분 안 계시죠?" 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이 우스개 소린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오늘 사도 바울이 고별설교 준비 하면서, 아 그때 목사님들이 한 말이 이 말이었구나 ! 이제 알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사님들이 이 물질의 문제로 넘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들뿐 아니라, 성도간에도, 돈 문제로 인하여, 갈라서고, 중상모략하고, 심지어는, 이문제로 교회 전체가 홍역을 치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 여호수아 7장에서도, 아간 한 사람의 탐심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전체가 고통을 받았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가룟유다의 탐심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힘있게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이, '물질의 깨끗함' 에 있었습니다. 물질에 대해서 걸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이 물질에 자신있는 삶을 살았냐면, 35절 보시면,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이것이 사도바울 사역의 힘이었습니다.
- 세번째, 사도바울의 사역의 힘은 눈물의 기도였습니다.
19절에, "모든 겸손과 눈물" 로사명 감당했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31절에도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 눈물이 사도바울 목회의 저력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고귀한 액체가 세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땀과 눈물과 피라고 합니다. 땀을 흘리는 것보다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어렵고, 눈물 보다는 피를 흘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땀은 노력의 상징이고, 눈물은 감정의 상징이고, 피는 생명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땀과 피는 경우에 따라서 동물들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유일하게 사람만 흘릴 수 있는 액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사람에게만 주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목회도 겸손과 눈물의 목회였습니다. 마태복음 21:5절에도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다" 고 기록하고 있으며, 밤이 맞도록, 눈물로 기도하는 목회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를 한 번 살펴보면, 우리는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가 본 받을 만한 것은, 겸손과 눈물입니다.
저도 이런 목회자가 되기는 것이 소원입니다. 겸손으로 섬기며, 눈물로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목회자…
오늘은 바울의 고별 설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오늘 설교는 저 자신에게 하는 설교였을지 모릅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우리 모두가 주의 사역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세상에 매여 있지 말고, 하나님께 매인바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질에도 일절 깨끗함으로 사역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눈물과 겸손으로 섬기며,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역하므로, 복음의 확장에 크게 사용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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