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갈등하고 계십니까? - 행 15:36-41

by Peartree 2012. 12. 25.

갈등하고 계십니까?
행 15:36-41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다는 것은, 늘 갈등하면서 선택하는 것이 사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갈등을 합니다. 일찍 일어날 것인가? 좀 더 잘 것인가? 밥을 많이 먹어야 할까? 조금 먹어야 할까? 어느 옷을 입어야 할까? 누구와 이야기할까?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결국 우리는 늘 갈등속에서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참 훌륭한 목회자인 두분, 바울과 바나바가 다툰 사건입니다. 에이 설마,,, 바울이 다투다니요. 사도 바울이 어떤 분인데요? 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39절 보시면, '서로 심히 다투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다툰것도 아니고 아주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여러분 여기 서있는 제가 우리교회 장로님과 심히 다투었다고 하면, 어떻게 교회의 리더들이 그렇게 할 수 있냐고, 시험에 드는 분들도 계실것입니다. 게다가 목사는 매일 강단에서,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서하라, 이해하라, 설교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설교하고 본인은 실천하지 않는지, 자기 말에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니, 언행일치가 안되는 사람이니 하면서 비난할 수 도 있습니다.

빌2:3절을 보시면,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한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 바울이 그들에게 뭐라고 설교하냐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 라고 설교했습니다. 다투지 말라고 설교 해 놓고, 정작 본인은 동역자와 심하게 다투고 갈라서기 까지 한 것입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왠만하면, 이 위대한 사도바울과 바나바의 다툼을 성경이 기록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성경은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성경에서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함으로, 살다 보면 누구나가 겪게 되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지 위해서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타난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을 통하여, 갈등이란게 무엇인지, 어떻게 해결 해야 하는지, 그리고 갈등을 극복한 후엔 어떠한 유익이 있는지 본문에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번째는, 갈등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본문에서 갈등의 원인을 보시면, 마가가 그 갈등의 원인제공자입니다. 마가는 바나바 와는 조카 삼촌 사이입니다. 전에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 전도여행을 떠난적이 있었는데, 전도 여행중에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버린 것입니다.

왜 떠났는지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는데, 마가가 "향수병을 앓았다, 애인이 그리워서 갔다, 어머니의 건강을 염려해서 갔다, 베드로와 함께 일하고 싶어서 갔다, 혹은 바울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 삼촌이 밀리는 것이 싫어서 그만 뒀다," 등등……그러나 동기야 어찌 됐든 도중에 그만 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시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떠날 때에 바나바가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가자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무책임한 사람과 같이 일할 수 없다. 그는 우리와 같이 사역할 사람이 못된다고 하면서 반대한 것입니다. 결국 마가를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둘이 의견이 충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의견을 절충하지 못하고, 심히 다투다가 갈라서 버렸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마가를 데라고 가겠습니까? 떼 놓고 가겠습니까? 바울 편입니까? 바나바 편입니까? 지금 손 드는 게 바로 여러분의 행동 양식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손 안 드신 분들은? 갈등상황입니까?

대부분의 갈등의 원인은 다름 아닌 성격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성격이란 각자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에 따라 다르며 독특하게 나타납니다. 이런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 개와 고양이는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왜 싸우는지 아세요? 개는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면 고양이는 공격신호로 받아들입니다. 고양이가 반가워서 꼬리를 내리면 개는 위험을 느꼈을 때 취하는 행동으로 여깁니다. "요게 나 보고 겁 먹었구나" 하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이게 차이의 결과입니다.  결혼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자기와 다른 것이 좋았고, 매력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점차 서로 다른 것을 수용 못합니다. 그래서 살면서 더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싸움 하지 맙니다.부부싸움 하시는 분들은 '나는 남편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라는 표시예요. '나는 아내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라는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과 바나바는 성격이 너무 달랐습니다. 바울은 '일중심의 사람' 이고 바나바는 '사람 중심의 사람' 이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은 모든 일에 있어서 결과를 중시합니다. 사람 중심의 사람은 과정을 중시합니다. 일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일을 하면, 어떤 일을 하는데?, 그 일을 통해서 어떤 이익이 있는데? , 하면서 일에 대해서만 묻습니다. 그러나 사람 중심의 사람은 일 보다는 일에 연결된 사람들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일을 누가 하는데?, 그 일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어떤 유익이 오는데? 하면서 사람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 둘중에 어느것이 옳습니까? ? ? ? ?

사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옳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두 사람다 중요합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이 두가지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로의 의견의 차이는 생길 수 있지만, 서로 이해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간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충돌하면 우리는 이것을 '갈등'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심히 다투는 갈등의 원인은 성격과, 생활양식, 가치관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갈등을 해결하는 가장 큰 해답은 이해와 수용입니다.

2) 두번째로, 그러면 이 갈등 이후에 어떠한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선한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라는 위대한 두 선교사가 여전히 함께 다니는 것은 어찌 보면 낭비입니다. 바울과 바나바, 이 두분이 서로 의지하고, 돕고 하니까, 서로는 좋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인력낭비였습니다.

이들은 각자 혼자서도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각기 따로 떨어져 다른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유익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선교 사역의 확대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훗날 이런 말을 합니다. 빌립보서 1:15-18에,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무슨말입니까? 이 말은 사람들이 다른 뜻으로 갈라지고, 싸우고 해도 결국 전파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그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 싸우면서 전도하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런 갈등가운데서, 하나님은 선하게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소립니다.

3) 세번째는, 갈등을 우리에게 주신이유는 변화 하라고 갈등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대화가운데 가장 무서운 사람은 "
나는 뒤 끝이 없어" 하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실컷 상처 주고. 자기는 아무렇지 않다는 소리입니다. 그 다음으로 무서운 사람 "나 원래 그래!"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마음에 거리낌도 없이, 상대방이 상처 받건 말건, 할말 다하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네가 이해하고 들으라' 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이 성숙되지는 못합니다.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고, 마음에 갈등을 겪을 때, 균형 잡힌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런 갈등를 겪으면서, 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를 보시면, 여러 면에서 변화된 바울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여전히 일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딤후4:5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에게 마지막 부탁도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건 거의 안 바뀝니다. 그럼 뭐가 바뀌었을까요? 그것은 일 중심이지만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을 알고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바울은 일 때문에 거절했던 마가를 이제는 데리고 오라고 전합니다. 딤후 4:11절 찾아 보겠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일 중심의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꾼것입니다.

또 딤후 4:10,16절 보시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곁을 떠났습니다. 관계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이라, 피곤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그런 사람들을 비난하며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16절 보시면,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저희에게 허물이 없다. 다만 갈 길이 달랐을 뿐이다라는 말입니다. 자기와 다른 길을 가는 사람을 용인해 줄만큼 관용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바울은 갈등이라는 걸림돌을 성숙의 디딤돌로 삼았습니다. 갈등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성장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아이가 아프면 성숙해집니다. 부쩍 키가 크든지, 말하는 것이 어른스러워지든지, 달라집니다. 어른도요. 갈등을 겪지 않으면 성장이 안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은 좋아하고 다른 사람은 배척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비슷한 사람은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한다."

여러분 우리가,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이 갈등을 사용해야 합니다. 갈등은 다른사람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 자신과 다투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성숙한 사람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갈등을 잘 극복하는 꿈의 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