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3일 수요찬양편견이 생길 때
행 11:1-18
한국 기독교 역사에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서울연동교회에서 장로투표를
했는데, 당시의 천한 천민 중에 천민인 백정이 장로에 피택이 되었습니다. 그 백정이 얼마나 신앙 인품이 뛰어났으면, 양반이 가득했던 그 연동교회에서 그 많은 양반들을 제껴 놓고 장로로 피택되었겠습니까? 정말 대단한 거지요. 이 백정도 대단하지만, 기독교가 더 대단한 것입니다. 유교 사회에서는 흉내도 못 낼 일이었지만, 기독교는 이런 문화와 전통을 뛰어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일을 이루어 놓고도 교회가 두 동강이 나버렸습니다. 이미 자리잡고 있던 양반 장로님들이 들고 일어나 연동교회를 뛰쳐나가 버렸습니다. `양반이 체통이 있지 어떻게 백정과 당회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지요. 그렇게 해서 나간 장로님들이 세운 교회가 윤 보선 대통령이 몸담았던 남대문 교회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양반이 어떻게 상놈과 당회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유교적 묵은 잣대로 당시에 문화와 전통을 뛰어넘던 기독교의 진리를 묵살해버린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초대교회에 내적으로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사도 베드로의 권위가 세차게 도전 받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냐면, 베드로 사도가 '무할례자이며,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는 사실 때문입니다. `양반이 백정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으면서 친하게 지냈다' 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 기억하십니까? 베드로와 이방인 고넬료의 만남.
이방인에게 복음의 문이 열린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는 얼마나 좋은 소식입니까? 축하할 일입니다. 그 일에 베드로를 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일이죠. 베드로에게는 상을 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만 구원하자고 외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지는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만 구원하자고 목숨을 내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도 구원하자는 것입니다. 양반뿐만 아니라 백정도 구원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여기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를 힐난 (비난)합니다. 안믿는 사람들이 베드로 사도를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사도들과 형제들이 그래요.
편견이 참 무섭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이런 편견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만 선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지금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죠.
이런 편견 때문에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 편견은 자기들의 잣대로 기준을 삼고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잣대에는 살인자 바라바는 내어주고, 예수님을 죽이는 잣대였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위기 속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편견을 헤쳐 나가는지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기를 웝합니다.
- 첫째로, 베드로는 설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4절 보시면,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가로되"
예전에 베드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성질 하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군병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그 많은 군병앞에서 칼로 병사의 귀를 벨 정도로 한 성깔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편견에 의해서 누명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전의 베드로는 어디론가 간데없고, 이 일들을 차례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앞섰던 베드로 였는데, 말로 차근차근 자초지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을 설득하면서, 어떤 방법을 사용 하냐면, 나도 너희들처럼 예전에 그렇게 생각했었다고 과거를 이야기 해줍니다.
5-6절에 보시면, 하늘로부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베드로 앞에 내려왔습니다. 그 안에 네발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였는데, 당시의 유대인들이 먹기를 금했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속되거나, 깨끗지 않은 물건은 입안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면서 거절을 합니다.
이런 일이 세번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나도 너희들 처럼 이방인이 먹는 것 먹지 않고, 이방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방인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라고 그들을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혈기를 내어 침을 튀기면서 싸운 것보다 더한 놀라운 효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18에 보시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가 얼마나 변화되었습니까? 성질 급하고, 실수 많고, 다혈질 적인 성격이었는데, 온순하고, 부드러운 성격으로 어느새 변해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런 침착한 설득력으로 풍랑에 휩쓸릴 뻔한 초대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하실 때, 교회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불신자들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 베드로처럼, 저도 예전에 당신과 같이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차근차근 복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욱하거나, 화를 내면 안됩니다.
2) 두번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17절 중반에 보시면,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라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도 사랑하시는데,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느냐 ! 이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존귀하게 여기신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겉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이면 어떻고, 이방인이면 어떻습니까? -흑인이면 어떻고, 백인이면 어떻습니까? -양반이면 어떻고, 백정이면 어떻습니까? -목사면 어떻고 평신도면 어떻습니까? -베드로면 어떻고 고넬료면 어떻습니까?
그 안에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그는 그리스도인인 것이고, 그안에 주님이 안계시면 그는 사탄의 자식인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이고 할례를 받았더라도 그 안에 예수님께서 안계시면 그는 사탄의 자식인 것입니다. 역으로 아무리 이방인이라도 그 안에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그는 그리스도인인 것이지요.
한국분들은 중국 여행을 하면 우황청심환을 많이 사가지고 돌아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생산하는 우황청심환과 비교해 보니까, 겉이 너무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 생산된 우황청심환은 곽이 화려한데 비해, 중국 산 우황청심환은 종이로 쌓여 있습니다. 시커면 내용물이 그대로 보인다고 합니다. 겉이 초라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국산 우황청심환이 좋다고 한국여행객들이 많이 사간다고 합니다. 껍질이 무엇이냐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내용물이 무엇이냐?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바울은 말합니다.
갈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우리들이 이 땅에서 아무것도 아닌 무명의 사람들로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중심에 모시기만 하면, 우리는 이미 이땅에 파송된 영적 지도자인 것입니다.
연산군에 관한 기록을 읽노라면 그 사람은 왕의 직분과 왕의 옷만 입었지 제비족이나, 창남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왕의 직분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거지처럼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넬료는 당시에 개와 같이 여겼던 이방인일지라도 그 안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니까,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3) 기도 중에 인도함을 받은 일입니다.
원래 베드로는 기도로 인도함 받은 인물이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잘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 같이 되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도, 잠이나 잤던 제자였습니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베드로를 볼 때, 성질이 급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동이 앞섰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 받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베드로는 잘 듣고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를 기도하면서 인도함받 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하고 불쑥 나섭니다.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기도하지 않고 불쑥 불쑥 말하니까, 실수 한것입니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날 밤만 해도 그렇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
주님께서 진심을 다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좀 심각히 듣고 주님께 인도함을 받을 일입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결국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다 보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세 번을 부인했고, 가슴을 치며 웁니다.
그런데 성령을 체험한 후의 베드로는 다릅니다. 그 중 뚜렷이 나타난 것이 기도하는 일입니다. 먼저 기도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이 되서야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할 일 다 해보고, 더 이상 안될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감사하지요. 그러나 아쉽지요. 처음부터 인도함을 받았으면 더 좋았겠구나 하는 아쉬움이지요. 이제 베드로는 더 이상 막가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는 곳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주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할 장소가 없으면, 지붕 위에라도 올라가서 기도합니다. 너무 바쁘니까 기도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합니다.
5절에 "욥바 성에서 기도 할때에"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복음주의 신학자 마티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너무 바빠서 기도할 틈이 없다는 그의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무 바빠서 기도한다.
생활이 바쁘고 정신없는 삶을 살지만, 그런 와중에도, 영혼의 건강을 체크하시고 자신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 늘 기도로 인도함받는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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