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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1년 2월12일 새벽예배설교: 네 믿음을 보이라 - 행 2:14-26

by Peartree 2012. 12. 25.

네 믿음을 보이라

행 2:14-26

제가 전에도 말씀드렸었는데, 사람은 육체가 사람이 아니라, 영이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영이며, 혼을 가지고, 육체속에 거하는 것이 본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영혼사랑' 이란 말이있죠? 진정한 사랑은 그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한사람을 구원하는 일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을 베푼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영혼'에 대해서 야고보는 더 확실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을 보시면,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영혼이 없는 몸은 사람이 아니라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그러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믿음. 이러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믿음이 있노라 하지만 그 믿음이 밖으로 우리의 삶속에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 믿음이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요, 그저 믿음은 머리속의 확신이나, 구원에 관한 굳은 신념 정도로 이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믿음, 머리로만 아는 믿음을 가리켜 '귀신 같은 믿음' 이라고 말합니다. 19절 보시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귀신들은요,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을 모르는 귀신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말씀도 우리 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죽음이후에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훤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와 귀신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와 귀신의 차이점은 귀신들은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은 그 아는 것을 행함을 통하여 믿음을 보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알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요. ' 귀신 같은 믿음' 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신앙의 상태가 어쩌면 이렇게 머리로 아는데 그치고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좀더 잘 한다는 사람, 또는 믿음이 있다는 사람은, 아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데, 감정으로,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또한 완전한 믿음을 될 수 없습니다. 귀신들도 얼마든지 감정 표현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9절을 다시보시면, '귀신들도 믿고 떤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떤다라는 것은 두려워하는 감정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의 표현만으로는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릴 수 없습니다. 믿음을 보여 드리는 것은 행함으로 밖에 되지가 않습니다.

21절에 보시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그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릴 때, 인정받습니다. 다른 것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지식을 보여드린 것도 아니고, 풍부한 감정과 느낌을 섞어 하나님을 감동 시키지 않았습니다. 독자 아들 이삭을 드리는 행함으로 믿을을 인정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24절 보시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을 하나님께 증명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정말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보이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연 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러한 믿음은 가식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5절보시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사람이 지나가다 하는 말이 " 변변치 못하게 행동해서 거기 빠졌는가?"하고 꾸짖기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유교는 윤리적으로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 잘못을 경책만 합니다.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는 이편으로 나무 가지를 붙잡고 저편으로 돌뿌리를 딛고, 올라오라고 말만 하고 동정의 뜻을 표하며 나오는 방법을 말해 주었습니다. 불교는 자력으로 구원 얻는 지식을 제시하여 뿐입니다.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책망하거나, 물에서 나오는 지식을 전할 여지가 없으므로 자기 자신이 속에 들어가서 죽어 가는 자를 끌고 나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옷을 입히고 사람의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100년전만 해도 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였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 갔을 때,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공장을 세워, 먹이고 입히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의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지금은 말만 무성하지, 행동하지 않는 종교가 되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믿음은 생각속에 있는 믿음이 아니라, 움직이는 믿음입니다. 행동하지 않고, 큰 믿음을 소유한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물위를 걷게 해달라고 하죠. 그때 베드로가 자신의 믿음을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행동으로 증명합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이 행함으로 믿음을 증명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은 소리나는 꽹과리와 같다는 고린도전서의 말씀처럼 소리만 무성한 신자가 되지 않고 움직이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