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 된 자가 먼저 됩시다.
마19:30 - 20:16
여러분들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
아시죠. 토끼가
거북이
보다
훨씬
빠르지만, 자기의
능력만
믿고, 나태하게
낮잠을
자다가
그만
거북이에게
졌다는
이야기
입니다. 요즘
또
다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한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예전의
한
번
거북이에게
져서
쓰라린
경험이
있던
토끼는
이번에
다시
열리는
경주에서
반드시
이기리라! 다짐을
합니다. 그리고는
경기중에
쉬기는
켜녕, 혼신의
힘을
다해서
단숨에
도착지
까지
달려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마지막
도착지점에
가보니, 여유만만하게
거북이가
벌써
와서
떡
버티고
서있는
것입니다. 너무도
놀란
토끼가, 아니
뭐
이런
헤궤망측한
경우가
다있어? 거북이
등에
날개라도
달렸나, 하며
너무
억울해
하니까, 거북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은
나
말이야! 닌자
거북이야" 라고
했다고
합니다. 토기와
닌자거북이
이야기
말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먼저
된자가
나중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본받을
만한
신앙의
선배들을
언급할
때 1세기의
초대교회
성도들의
예를
많이
들곤
합니다. 1세기
초대교회
성도들
만큼
믿음의
절개를
지키며, 변함없는
성도들은
역사이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든지, 옥에티는
있기
마련입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성도들은
승리의
믿음생활을
하였지만, 몇몇
성도들의
배도와
변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딤전 1:19-20에
보면
"--어떤
이들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라고
변절자들의
이름까지
기록합니다. 딤후4:10에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기록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당장
오늘의
편안함을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역사의
부끄러운
자들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극은
비단
후메내오, 알렉산더, 데마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과
저의
이야기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된자들이
나중
될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잘
출발하였지만, 나중에
부끄러운
자가
될수도
있으며, 또한
반면에
처음은
보잘
것
없는
출발이었으나
나중
인생을
영광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포도원
일군의
비유'는
바로
먼저된
자들이
나중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먼저
된
자들이
나중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러면
나중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본문에서
몇
가지
원리와
방법들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본문에서
먼저된자가
나중되는
이유는, 흥정의식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의
말씀을
하시게
된
배경은
마태 19:27절에
베드로의
질문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긴
답변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와
매우
솔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19:27에,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아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이것이
바로
흥정의식이예요. 이
베드로는
요,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보이지
않는
영생의
약속으로는
만족할수
없었던
것입니다. 피부에
와닿는
무엇인가를
원했던
것입니다. 손에
쥐고
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구체적인 Balance 원했던
것입니다. 즉
이말입니다. 예수님
지금까지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쫒았는데, 주님은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Give가
있으면 Take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주일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몸
드려
봉사했으면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축복이
내게
돌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잘되거나, 사업이
잘
되거나, 집값이
오르거나,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베드로의
이
같은
질문이
곧
흥정의식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9절에, 반드시
여러배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흥정의식으로
너는
이제
나중된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19:30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시고 20장에, '포도원
일군들의
이야기' 를
들려주시죠.
이
포도원
일군의
비유에서
일군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하나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3절을
보시면, "또
제
삼시에
나가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어떤
단어가
반복됩니까? "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래
부르심을
받기전
인생을
낭비하고
무의미하게
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죄를
사하시고
구원
하신것만
해도
너무나도
감사한데
거기다가
우리를
일군까지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엄청난
은혜인데, 우리는
이
은혜의식을
상실하고
주님에게
따지듯이
흥정의식에
사로잡혀
살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신앙상태를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혹시나
지금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은
네가
나중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두번째로, 먼저
된자가
나중되는
이유는, 비교의식
때문입니다.
본문 11절에
보시면
오전
삼시, 육시, 구시, 에
먼저
와서
일한
사람들이
제
십일시(오후 5시)에
온
사람이
자기들과
동일한
한
데나리온의
삯을
받자
주인을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라고
기록하고
있죠? 왜
원망합니까? 10절에서
대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
씩
받은지라" 나중
온
자와
비교한
것입니다. 이
비교가
불평을
낳은
것입니다. 원망을
낳은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기
전까지
행복했던
내가
상대적
비교를
시작하자
갑자기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진
것입니다.
우리
여자성도님들
좋아하시죠? 물건을
쇼핑을
하면,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쇼핑정보를
공유합니다. 나는
어디에서
얼마주고
샀어, 자기는
어디에서
얼마주고
샀어? 물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불행하게도
서로
똑
같은
물건을
산
거예요, 그런데
값이
틀려요. 한사람은 20불
주고
사고, 한사람은 15불
주고
산거예요. 그다음에 20불
주고
산
사람은, 표정이
갑자기
시무룩해집니다. 자기보다
똑같은
물건을
더
싸게
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행복이
달아난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을
극복할수
있습니까? 비교의식의
성경적
처방은
창조의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한
사람도
똑
같지
않게
다르게
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얼굴도
다르고
개성도
기질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따라서
인생의
가는
길이
다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독특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
소명을
발견하고
내가
갈길을
나
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옆집
아줌마처럼
꼭
같이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각자
삶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교할
일도
질투할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나중됨의
길을
걷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3) 세번째로, 먼저된자가
나중되는
이유는, 공로의식
때문입니다.
10절에
먼저
온
자들이
더
받을
것을
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더
받을
만큼
공로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당연히
더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로의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공로의식에
사로잡히는
순간
반드시
우리를
찾아오는
귀신들이
있습니다. 섭섭
귀신입니다. 내가
이
집안에
시집와
이만큼
했는데, 이
직장에서, 이
만큼
일
했는데, 혹은
이
교회에서
이만큼
공로를
세웠는데, 나를
알아주지
않다니,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섬김의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생활의
감격을
상실합니다.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공로의식을
극복할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출발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다윗은
왕이
되서도
자신의
기도실에
목동시절의
의상을
늘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그가
목동의
자리에서
출발한
것을
잊지
않고자
한
것입니다. 초심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올챙이
시절을
기억해야만
이
공로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라고
하셨습니까? 장터에서
놀던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출발점은
인생의
목적도
없이, 소망도
없이, 장터에
그냥
서있는
사람과
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값을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빚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잘못된
공로의식을
극복하는
유일한
처방이
바로
이
빚진자
의식을
갖는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1:14에서 "--나는
빚진자라"고
말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자라"
이
빚진자
의식이야
말로
우리를
겸허한
봉사자로
살게하는
유일한
성경적
처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값없이 선물로 주어지지만 그러나 이 선물이 나에게까지 전달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강물이 되어 흐르고 흘러 저와 여러분들이 마침내 복음의 소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빚진자 들입니다. 갚을수 없는 은혜에 빚진자 들입니다. 이 빚진 자의 의식이 우리를 지배하는 한 우리는 방종할수 없습니다. 교만할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함으로 한 평생 주님과 주의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빚진자의 의식을 상실한다면 우리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주의 책망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평생 이런 빚진자의 의식으로 산다면 오히려 나중된자라도 먼저 되어 주 앞에 설 것입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먼저 된 자든지, 나중 된 자든지,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빚진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중되는 사람 한사람도 없이 모두가 먼저되는 귀한 성도님들이 다 될 것입니다.
'설교자의 창고 > 비전나리의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1년 3월 2일 수요찬양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 - 행 8:26-40 (0) | 2012.12.25 |
---|---|
2011년 2월27일 주일예배설교: 회개의 문제 - 눅 3:7-14 (0) | 2012.12.25 |
2011년 2월26일 새벽예배설교: 신본주의 신앙이란? - 약 4:1-10 (0) | 2012.12.25 |
2011년 2월19일 새벽예배설교: 말의 위력 - 약 3장 1-12 (0) | 2012.12.25 |
2011년 2월13일 주일예배설교: 여호와의 생명책 - 말라기 3:13-18 (0) | 2012.12.25 |
2011년 2월12일 새벽예배설교: 네 믿음을 보이라 - 행 2:14-26 (0) | 2012.12.25 |
2011년 2월5일 새벽예배설교: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자 - 약 2:1-9 (0) | 2012.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