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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1년 3월 2일 수요찬양설교: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 - 행 8:26-40

by Peartree 2012. 12. 25.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

행 8:26-40

 

지난주에는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들과 성도들이 각처로 다 흩어졌다는 것 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절을 보시면, 빌립 집사도 핍박을 피해 사마리아로 피해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26절을 보시면,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길은 또 광야라고 말합니다.

빌립은 지금 사마리아에서 할 일이 많았습니다. 새로 들어온 교인들도 훈련시켜야 하고, 전도도 해야하고, 교회 셋업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광야로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하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 갑자가 광야에는 왜 갑니까? 거기에 누가 있다고요, 사람도 없을 텐데요. 이곳 사마리에 예수 믿어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여기만 전도해도 하루에 수백명을 전도할 수 있는데, 왠 광야입니까? ' 라고 반문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두말하지 않고 순종합니다.

계속해서 남쪽으로광야길을 걷다보니, 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내시라고 번역했는데, 국고를 맡은 사람이니까, 재무부 장관이었습니다. 꾀 지위가 높은 사람이죠)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 돌아가는 병거에서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또 명령을 내리시죠. 29절 보시면,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시키시는 대로, 병거로 가까이 가서는,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을 깨닫느뇨?" 라고 물었습니다. 31절에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 말에, 빌립 집사는 성경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는, 35절에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공부의 핵심은 성경의 지식이 아니라, 결국에는 예수를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 물이 있어 그곳에서 침례를 주고는, 빌립이 물에서 올라올 때, 성령님이 빌립을 '끌어 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뿅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내시는 빌립을 다시 보지는 못했지만, 기쁜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알수있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사마리아의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도 훨씬 나을텐데라고 생각할텐데, 하나님의 생각은 이방인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장하는 사역을 Stop시키고, 한 사람을 찾아 가다록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잘 나가는 빌립의 사마리아 사역을 중단시키고, 에디오피아 내시를 찾게 하셨는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을 끌 만한 것이 내시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본문에서 몇 가지를 찾아 보겠습니다.

  1. 첫번째로, 에디오피아 내시는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사모했냐면, 27절에, 이방인이면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 그 먼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던 사람입니다. 거리상으로 1500마일이 넘는 거리였습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인, 마차로 이동한다면, 1주일 이상 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의 열심과 사모함을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의 열심이, 사마리아 지방의 수많은 사람들의 열심을 압도했기에 하나님의 눈은 광야 에 있는 내시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먹으신 것이예요.

요즘은 자동차 때문에 거리 개념이 멀어졌습니다. 걸어서 다니던 시대에 비하면 참 편리한 세상인데도, 조금만 멀어도 멀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조금만 추워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거리가 먼 것이 아니고, 마음이 먼 것인데 말입니다.

예전에 자동차가 없던 시절엔 한 겨울에도30분씩 걸어서 새벽기도회를 다녔습니다. 집을 나서면 얼마나 추운지, 걸어서 예배당 안에 들어오면 훈훈해야 되는데, 예배당 안에도 추워서 발이 시려웠습니다. 그래서 교회 바로 옆 사택에 사시는 목사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가 된지도 모릅니다. 지금 중국이 그렇습니다 . 자전거를 타고도 한 두 시간씩 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멀리서 예배하러 오신분 계십니까? 그 예배를 하나님이 귀히 보실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를 사모하는 열심을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귀하게 보시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 중에서 열심으로 예배를 사모하며 나온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 때문에라도 그 예배를 받아 주시기도 하십니다. 사마리아의 많은 사람을 뒤로 한 채 열심인 단 한 사람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가 축복을 받을 때는, 온 성도가 다 잘해서 축복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교회가 축복을 받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요셉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온 애굽을 복을 받았잖아요. 반대로 아간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여러명 찾지 않으시고, 하나님 향하여 열심으로 사모하는 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1. 두번째는, 에디오피아 내시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관심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내시가 구약성경의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인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본문 32절을 보시면, "저가 사지로 내려가는 양과 같이 끌리 었고 털 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 같이" 라는 구절로 보아 이사야 53장 7절을 읽고 있었습니다. 다같이 찾아 보시겠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며 빌립집사에게 묻는 것입니다. 대체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아무말 하지 않고 잠잠하게 끌려가는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사야 선지가 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입니까? 빌립에게 묻는데, 빌립이 그 사람은 우리가 죽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당신과 나를 구원하시기에 위해서 이렇게 잠잠하게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요. 라고 말했겠죠? 그러니까, 믿고 침례를 받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에디오피아 내시가 겸손한 마음이 전혀 없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빌립집사로부터 복음을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31절 보시면,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당시의 사회구조로 보아 신분의 격차가 엄청난데, 배우기 위해서 빌립을 자기자리로 청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성경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릅니다. 가르쳐 주십시요. 라고하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죠.

이러한 겸손한 모습 때문에라도, 하나님은 사역 잘하고 있는 빌립집사를 광야로 내몰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1. 세번째로, 에디오피아 내시는 은혜받기 위해서는 체면따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6절에 보시면, 복음을 듣고, 길을 가는 중에 물이 있는 곳을 발견합니다. 그때 에디오피아 내시가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말하고 가던 병거를 세우고 빌립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내가 침례 받는데, 체면 때문에 받지 못할 일이 뭐 있겠는가? 이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침례를 받으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에디오피아의 재무부 장관이 많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물속에 들어가, 옷이 흠뻑 젖은 상태로 올라온다는 것은 감히 아무나 할 수 있는 아닙니다. 구원받기 위해 체면 같은거 따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마음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 차리면,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신앙이 은혜받기에 아주 좋습니다.

한국 교회사를 보면 1907년에 평양에서 큰 부흥의 불길이 일어날 때, 이와 비슷한 장면이 불씨가 되어,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당시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회가 진행 중에 있었을 때, 강사는 블레어 선교사였고, 참석자는 1,500여명 정도였습니다. 그들 모두는 성령 충만 받기를 기도하였지만 분위기가 냉냉하였습니다. 부흥강사는 누가 먼저 회개하시겠습니까? 라고 계속해서 묻고 있었고,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누구하나 선뜻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국교회의 처음으로 새벽기도를 만드신, 길선주 장로가 일어서서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회개를 하였습니다.
가까운 친구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을 잘 정리하여 자기 아내가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는데 부탁대로 하지 못하고 친구의 100불이나 되는 미국 돈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낭비하여 모두 써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 부흥집회에 참석해보니 그 죄가 기억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회개의 고백이 있은 다음에 다른 사람들도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장로님을 미워했었다는 고백을 했고, 설교하신 블레어 목사님도 미워했든 사람도 나와 회개하고, 어떤 사람은 음식점에 돈 떼어먹은 것, 앞문으로 들어갔다가 뒷문으로 도망친 것까지 회개했습니다. 어떤 여성도는 아기를 남몰래 유산시키려고 한 것까지 회개하였습니다. 저녁 7시부터 시작된 부흥회가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고 그곳은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은혜와 부흥이 넘쳤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지 안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이 이런 상황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순수한 믿음, 순수한 신앙,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높으면 얼마나 높습니까? 높아 봐야 하늘보다 더 높겠습니까?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습니까? 지위가 있어봐야 대통령밖에 더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체면불구하고 낮아지는 것이 은혜 받기에 최고인 것입니다.

제가 호주 멜번에 살 때, 가깝게 지내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두 아들과 엄마였는데, 큰 아이를 테니스 선수를 만들기 위해서 테니스 때문에 호주에 온 분이었습니다. 아이의 이름이 준범이고 준범이 엄마라고 불렀는데, 이 분이 자신은 무교인가, 불교인가, 하여튼 불신자 집안으로 시집왔는데, 교회에 다니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호주에 와서 마음 놓고 교회에 나갈 수 있어서 좋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하나님을 찾았지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 신앙은 깊이 자라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있기에 하나님은 언젠가 귀하게 쓰시겠죠.

그때 그 생각을 해 보면은,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구원받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조금 해보니까, 하나님을 조금은 알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 하나님은 사모하는 사람을 구원하시고, 사모하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하나님이신걸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요. 찾는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사모함이 없는 사람은 그래서 불쌍한 사람입니다.

오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예배를 사모하고, 말씀을 깨닫기를 사모하고, 어린아이처럼 체면도 없이 물속에 들어가는 그런 사람이야말로 구원받기에 충분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눈동자를 고정시키지 않으면 누구에게 고정시키겠습니까? 사랑하는 꿈의교회 성도님들 열심으로 사모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을 빼앗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