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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주일예배 설교 : 크리스천이란? - 행 11:19-26

by Peartree 2012. 12. 24.

크리스천이란?

행 11:19-26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하던 게임 가운데, 여러 사람이 둥글게 앉아 귀속 말로 옆 사람에게 어떤 말을 전달하는 놀이가 있었습니다.

이 놀이의 재미는 마지막 사람이 맨 나중에 전달 받은 그 말을 크게 복창할 때 처음 시작한 말과 상당한 차이가 있어서 엉뚱한 말로 둔갑할 때 웃음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자가 "사과는 건강에 좋습니다. 그러나 저녁에는 안 좋습니다."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한 바퀴 돌고 나니까 "사과하지 마세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이란 것은 돌면 돌수록 변해가는 것이 말이란 것입니다. 그래서 말을 전달할 때는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보고 들을 대로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인' 이란 단어의 뜻이 이렇게 변해버린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날 그리스도인하면 그냥 교회 나가는 사람을 보편적으로 일컬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 이 단어가 사용될 때만 해도 같은 의미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 보시면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처음 사용된 곳이 안디옥이라는 도시였는데, 이 안디옥이란 도시는 당시 인구가 50만에 달할 정도로 로마 제국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습니다.

본문 19절 보시면, 스데반의 순교 이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성도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안디옥은 새로운 선교의 중심도시가 된 것입니다.

 

순교와 박해는 복음의 확산을 막은것이 아니라, 새로운 복음의 중심도시를 만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처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안디옥에 새로운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교회 공동체가 세워지고 복음을 전하는데, 놀랍게 부흥하게 됩니다. 21절 보시면, "수다한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 오더라" 그렇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니까, 이들에게 누가 필요합니까?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자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나바를 사역자로 파송했습니다. 바나바를 파송한 다음에 안디옥 교회가 더 크게 성장하는데, 24절 보시면,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한 두명씩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무더기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도저히 바나바 목사님 혼자서 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는 몇 천명, 많게는 몇 만명으로 추산하는데, 사역자는 달랑 바나바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안되겠으니까, 25-26절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교회가 이렇게 마구 부흥하게 되니까? 믿지 아니하는 세상사람들이 비로소, 드디어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호칭을 붙여준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지금까지 2000년 동안 변함없이 불리워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란 말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지 이 시간에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Christ라는 단어에 ~ian라는 접미사를 추가한 것으로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이 명칭은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스스로 사용한 명칭이 아니고, 믿지 않는 자들 즉 불신자들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26절에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게 만들었는가? 라는 사실입니다. 특이한 것은 바나바와 사울 두 지도자의 가르침을 1년 동안 본격적으로 받고 나서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6절 보십시요.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게 됩니다.

그 일년간 도대체 무슨 가르침을 받았을까요? 확실하지 않지만 제자 훈련을 받았을 것입니다. 제자'란 문자 그대로 말하면 '따라가는 사람'(follower)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제자 훈련의 초점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어떻게 그분을 따라 살 것인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 훈련의 핵심은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삶의 전달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중세의 유명한 독일의 수도사인 영성 작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라는 책을 쓴 토마스 아켐피스의 표현을 빌리면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n of Christ)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전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의 핵심은 그리스도처럼 말하고 그리스도처럼 섬기고 그리스도처럼 행동함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시절 안디옥 시민들은 당시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이런 그리스도의 냄새를 맡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그들을 부른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불과 제자 훈련을 받은지 1년 밖에 안된 이들이 이런 변화의 흔적을 드러낸 것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늘 아이러니 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다면 예수 믿고 교회 나온지 수십년이 된 분들 중에도 전혀 예수 냄새가 안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안디옥 교인들처럼 교회 나온지 1년밖에 안되었어도 그리스도의 냄새,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한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된자가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 된다고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기도 제목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만큼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기 원합니다. 가 기도 제목이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은 변치 않습니다. 우리 꿈의 성도님들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 만큼은 식지 않는 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여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늘 이웃을 어떻게 섬기고,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2)둘째로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다 보면 한번 더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곳을 발견하게 됩니다. 행26:28입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여기서는 바울이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심문을 당하면서 오히려 그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라고 전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헤롯이 네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라고 불리운 것이 그냥 얻어진 별명이 아니고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보시면, 처음 예수의 제자들은 안디옥에 오기 전까지는 주로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을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에 와서 그들의 삶은 획기적을 달라집니다. 눈을 멀리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인 복음의 땅끝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그들은 안디옥에 이르러 삶의 안전지대를 뛰어 넘어 이방인들인 헬라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본문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낮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고 밤에는 그리스도를 꿈꾸는 사람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말과 삶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람,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3)세번째는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인' 이란 말이 꼭 세 번 나옵니다. 두 번은 사도행전에 나오고 한번은 베드로 전서에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인이란 단어를 세 번째로 언급한 베드로 전서를 살펴 보겠습니다. 벧전4:16 보시면,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에 묘사된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입니까?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붙들고 그 이름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삶이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불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19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그때에 스테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더니" 지금 이들은 믿음의 박해로 그들이 흩어져 안디옥까지 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이제 여기 안디옥에서는 조용히 사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비록 박해로 흩어지긴 했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24절에 보시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4:36에 보시면 이 착한 지도자 바나바의 삶을 성경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37)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름 바나바는 그의 별명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명은 요셉입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웃의 필요, 공동체의 필요를 보고 자기의 자산인 밭까지 팔아 하나님 나라에 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은 희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필라델피아의 한 벽돌공장에서 일하는 존(John)이라는 이름의 소년이었습니다.

고작 13세 밖에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그는 가난한 가정형편으로 일찍부터 일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소년은 해가 지고 퇴근을 하여 집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소년은 자신의 몸이 진흙탕에 뒹군 것처럼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이 사는 동네의 도로는 포장이 안 되어 있어 조금만 비가 내려도 걷기가 영 불편했고, 질퍽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동네 어른들은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옷자락을 치켜 든 채로 힘들게 걸으면서도 불평만 토로할 뿐, 막상 길을 고치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게 만약 우리 마당이라면…?"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그 길을 공장의 벽돌로 포장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다음 날부터 소년은 얼마 되지 않는 임금을 쪼개어 조금씩 벽돌을 사서 그 길에 놓기 시작했습니다.

넓고 긴 길을 모두 벽돌로 깔기 위해서는 2년이 넘게 걸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달 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을 사람 한 명이 우연히 소년이 벽돌을 까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존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소문이 마을 전체로 번지기 시작하면서, 두 달이 채 안돼 마을의 도로 전체가 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벽돌 30개와 비교도 되지 않는 YMCA 회관을 전세계에 무상으로 지어 주었습니다.

 

백화점의 왕으로 칭송받는 존 워너메이커(John Wanamaker).

우리 시대에 이런 죤 워너메이커와 바나바 같은 희생과 헌신을 소명으로 알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많이 필요할 때입니다.

이런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있는 교회는 오늘 말씀처럼 날마다 그 수를 더해가는 부흥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