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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3년 5월 1일 수요설교 : 사귐 요한일서 - 1:1-10

by Peartree 2013. 5. 9.

사귐

요한일서 1:1-10

 

오늘부터 요한1서의 말씀을 가지고 매 수요일마다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요한1,2,3서의 저자는 사도요한입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나이가 어린 제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제자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의 별명이 ‘사랑의 사도’ 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한 일서의 별명이 ‘사랑의 서신서’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유일하게 순교 당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서 복음을 전한 사도가 사도요한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사도요한을 90살 넘게 살다가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게 했을까요? 여러 가지로 우리는 추측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사도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 당했기 때문에 동생 만큼은 오래 살게 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십자가 아래까지 따라온 제자가, 유일하게 사도요한 이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뜩 해서 오래 살게 해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사도요한이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잖습니까? 그래서 사도요한은 사랑이 뭔지 압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베풀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시대 상황으로 보면, 믿는 자들이 핍박에 의해서 뿔뿔이 흩어지는 시대였습니다.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들의 마음은 늘 불안합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런 시대상황 속에서 성도들에게 필요한 사람은 사도요한 같은 사랑의 사도였을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성도들은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사랑으로 품어 줄 사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주님은 사도요한을 끝까지 남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귐’ 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때,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귐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사귐이 없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거예요. 처녀 총각들이 서로 사귀면서 사랑이 깊어지고, 결국에는 결혼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사귐이 없이 곧바로 결혼하신 분 계세요. 옛날에는 그렇게 시집가고 장가갔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대부분은 서로 사귀어 본 다음에 결혼을 합니다.

 

오늘 사도요한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하나님과 사귀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성품을 어떠하며, 혹시 하나님은 거짓말은 잘 하는 하나님은 아닌지하나님에 대해서 알려면 하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귐이 있을 때 신뢰하게 되고, 사귐이 있을 때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태어나면서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엄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엄마하고는 뱃속에서부터 사귀었던 거예요.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을 무조건 다 믿습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길 아이들은 아빠보다 엄마를 더 믿고 신뢰한다고 합니다.

 

이런 유머가 있어요. 목욕탕에서 아빠가 탕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아들이 아빠에게 그 안이 안 뜨겁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아빠가 ‘응 하나도 안 뜨거워’ 라고 하며 빨리 들어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탕에 풍덩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안 뜨거운 탕이 어디 있습니까? 뜨겁죠. 그러니까 아들이 밖으로 뛰어 나오면서 뭐라고 했을까요? 세상에 믿을 ㄴ ㅗ ㅁ 하나도 없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엄마들 같으면 들어오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치하에서 유태인 6백만 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가스실에서 죽어갔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들 둘을 둔 일가족이 수용소에 잡혀 들어왔습니다. 수용소에 들어가면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노동을 시키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스실로 보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노약자와 여자들 어린이들이 가스실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아들 중 하나는 어리고 매우 병약했습니다. 부모는 하루 하루가 걱정이었습니다. 저 아이는 몸이 약해서 틀림없이 가스실로 끌려갈 텐데 어떻게 하나

강제 노역에서 돌아온 일가족은 밤마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노역에서 돌아오니까, 아내의 얼굴과 약한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는 거예요. 이미 가스실로 끌려간 것입니다.

마지막 가는 모습도 지켜보지 못하고 슬픔에 잠긴 이 아버지에게 당시 끌려가던 광경을 지켜보았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해줍니다.

약한 아들을 나찌 군인들이 끌고 가려 하자 안 가려고 마구 울며 발버둥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아들의 엄마가 아들을 품에 안고 눈물을 참으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울지마 이 어미가 같이 간다” 그러자 울며 안 가겠다고 떼를 쓰던 아들이 울음을 그치고 평안히 엄마 품에 안겨 가스실로 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엄마와 깊은 사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귐은 서로를 신뢰하게 만듭니다. 사귐은 서로 사랑하게 만듭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가 오해하고, 미워하고, 헤어지는 일들이 생기는 이유는 깊은 사귐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왜 저 사람은 말을 저렇게 하지 도대체 이해가 안돼’ 라고 하는 분은 그 사람에 대해서 ‘난 전혀 몰라요. 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아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야. 우리가 이해 해야 돼.  라는 말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귐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다가 믿음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교회를 떠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요한이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귀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어야 하는 가장 큰 목적은 다름아닌, 영혼의 구원 때문에 하나님과 사귀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세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어야 하는 이유는, 어둠에 행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리를 행하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은 빛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귀는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게 되어 있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민수기 23: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올바르게 사귀기만 하면, 영혼이 구원받습니다. 7절을 다시보시겠습니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어떻게 사귀는지 말씀을 드리길 원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하면 생각하기를, 감히 나 같은 죄 많은 미천한 존재가 높고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과 어떻게 사귈 수 있냐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지만 낮고 천한 저와 여러분들과 만나기를 즐겨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이 우리 같은 죄인들과 사귀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간단합니다. 나의 고민을 털어 놓는 것입니다. 나의 기도제목을 털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9절에는 ‘자백’ 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8절에도 보시면, 죄를 짓고도 죄 없다고 속이지 말라’ 는 것입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이 모습 그대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닮아 가듯이 말입니다.

 

원하옵기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모두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는 삶을 살다가 주님 만나고 하나님 만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