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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복음의 능력 - 로마서1:16-17

by Peartree 2012. 12. 26.

복음의 능력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1:16-17

 

지난 시간에는, 로마서 개관을 말씀 드리면서,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의 능력' 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울이 이 '능력의 복음' 을 로마교회에 전해 주려고 한 목적은, '열매를 맺게' 하려고 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로마교회에, 복음이 들어가고, 믿는 성도들이 많아졌지만, 정작, 그 안에서 '변화의 열매' 가 맺히지 않고 있던 것입니다. 삶이 전혀 변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동성연애' '불의,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등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1:27, 29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로마서의 주제가 '복음의 능력' 이라는 말씀 드리기만 했어요. 그래서 오늘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는 말씀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복음' 이란 말을 참 많이 하고, 많이 듣고 살아갑니다. 그럼 복음이 무엇입니까? 한국 말로, 복음은 '복된 소리' 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Good News' 라고 하죠. 그러면, 복음이 왜 Good News 입니까? 1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서, 천국 가는 운명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보다, 기쁜 소식이 이 세상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Billion Dollar 를 주어도, 살 수 없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 구원을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셨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이며,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믿는 것' 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고,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이 복음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복음은,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이해 해야 합니다.

 

1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당시에 '복음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 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실제로요 당시에,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좀 전에 복음이 예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예수 믿으라고, 전한다는 것이,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너희는 복음을 부끄러워 할 지 몰라도,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당시에 예수님이 어디에서 돌아가셨습니까? '십자가 형틀' 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형틀' 이었습니다. 지금의, 사형수들에게 사용하는, 'Electric Chair' 나 '교수대' 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이 십자가 형틀은, 아무에게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정치범이나, 흉악범들에게만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은, 중죄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흉악범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치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믿는 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는 말은, '중 죄인을 믿으세요.' 라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16절에 사도 바울은, 나는 부끄러워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바울은 '나는 오히려, 십자가 만을 자랑하겠다' 고 고백합니다. 또 다른 서신서에는 '나는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 고 고백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고린도 전서 1:18절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것이, 부끄럽다고 하며, 믿지 않으면, 멸망을 받으며, 그런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십자가가 사형대라고 하지만, 부끄러워 하지 않고, 그것이 복음인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구원을 받는 다는 말입니다.

 

21C 위대한 복음주의 설교자로 알려진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1964년 4월 12일부터 6월 21일까지 약 두달 동안, 11번에 걸쳐서"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님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분을, 복음주의 설교자라고 하고, 복음주의 설교의 거장이라고 합니다. 신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죠.

 

신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신학생들은, '나는 사도 바울처럼 복음만 전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다가, 성경 지식을 쌓고, 여러 가지 학문을 접하면서, 복음의 열정이 식어지고, 비 복음적인 것을 하나 하나 접목시키게 되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가 배운 그 엄청난 지식과 학문을, 배설물로 여기고, 세상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십자가만을 전했으니 말이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세상의 자랑은 한 낮, 아침에 맺히는 이슬 같은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아이들 중에, 자랑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 봐야, 자기집에, 텔레비전 있다. 냉장고 있다. 그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최고의 자랑은, '우리 아버지 회사 다닌다' 는 자랑이 최고였던 것 같습니다.

모두다 농사꾼 인데, 아버지가 회사 다닌다고 하면, 사람이 달라 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사실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랑해도, 고지 듣지도 않는 시대예요.

대통령 하겠다고 나온 후보자들 보세요. 요즘은, 별거 아닙니다. 한국은 지금 '소통' 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통하는 세상' 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국민과 소통하지 못하면, 대통령 되기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소통하려면, 자신들의 눈높이를 국민의 눈 높이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격식이 없어졌습니다. 자기의 배경 자랑하다가는 떨어집니다. 자기의 겸손을 무기로 하고, 낮아 져야 합니다. 그래야 당선됩니다. 옛날과 많이 바뀌었습니다.

세상도 그러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무엇을 자랑해야 하겠습니까? 죽으나 사나, 십자가 자랑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겸손입니다. 십자가 자랑하는 사람은 겸손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신 있게 '크리스천' 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분도 있습니다. 삶이 본이 안되니까, 그렇습니다. '크리스천이 왜 그래!' 하는 소릴 들을 것 같으니까, 아예, 크리스천인 것을 숨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거기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가 부끄러워했던 것이 무엇이고 내가 자랑스러워했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 한번 곰곰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고 한 고백은, 그 고백 뒤에, 엄청난 삶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을 어떻습니까? 성도들도, 큰 교회를 찾아 갑니다. 그리고는, 큰 교회 다닌다고 자랑을 합니다. 건물을 자랑하고, 프로그램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랑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 번째로, 복음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복음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칼빈은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앞에 있는 믿음은 수동적 믿음이고, 뒤에 있는 믿음은 능동적 믿음이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처음에 이 복음을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요,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진리를 아는 감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때서야 비로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으면 누구도 복음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전도하면서 많이 경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 우리가 복음을 믿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발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으로 복음을 믿기 시작하였으면, 그 다음서부터는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욱 키워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칼빈이 해석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의 믿음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시작된 믿음이고, 두 번째 믿음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시작된 믿음이, 우리의 삶에 열매로 맺는 믿음으로 성장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 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일찍이 말했습니다.

합2:4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된다' 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그분이 복음의 핵심인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복음은,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고, 구원을 얻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구원 얻은 주의 자녀들은, 또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자라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처럼, 복음 안에서 사시면서,

그리고 이 복음의 가치를 알았다면. 바울처럼 복음에 빚을 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