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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거기 너 있었는가 - 요한복음 19:23-27

by Peartree 2012. 12. 26.

거기 너 있었는가

요한복음 19:23-27

찬송가 136장은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제목의 찬양입니다. 이 곡은 미국 흑인노예들 사이에 널리 불려졌던 흑인영가에, 가사를 넣어 만든 곡입니다. 이 찬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거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 원합니다.

 

지난주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 의해 대제사장의 집으로 잡혀 갔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주님을 끝까지 따른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그만 여종 앞에서 조차, 두려움에 떨며, 주님을 모른다고 하고는, 밖으로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군병들에게 희롱을 당하시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고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다음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 바로 직전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의 말씀은,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을 서로 나눠 가지려고 하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손에 의해 죽으시는 순간이죠.

자신이 만드신 창조물들에 의해서 죽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힘이 없이 죽으시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도, 사단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몸을 희생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주님은 지금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참 안타까운 것은, 지금 십자가 아래에 몇 명이 있냐는 거예요. 하루에, 적어도 보통 어림잡아, 수 만명씩은 따라 다녔는데, 지금 누가 있냐는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다 도망가 버리고, 달랑 막내 요한과 세명의 마리아와 그리고 예수님의 이모 (누가 복음에서는 '요안나' 라고 하는 여자) 이렇게 남자 1명, 여자 4명만 남고, 다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러면, 그 많던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따라오지 않았습니까?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한복음18:40절을 보시면, 예수님 대신에, 강도 바라바를 살리라고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죠.

왜 갑자가 그들이 돌변한 것입니까? 잘 따라오다 말이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가 불과 1주일전이었는데, 그때 까지만 해도, '다윗의 왕,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외쳤던 그들이었는데, 왜 갑자기 돌변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요…… 희망이 안 보였던 거예요. 힘없이 끌려가서, 가시면류관 쓰시고, 빌라도의 법정에 서 있는 예수님을 보니까,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득이 될 것 않으니까, 생각을 달리 한 것입니다. 차라리, 강도 바라바가 더 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마음만 변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왔더라면, 구원 받을 수 있었는데, 결국 마지막 코스에서 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구원 받는 숫자가 심히도 적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잘 따라 가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진다니까요.

 

그래서, 끝까지 가야 구원인 것입니다. 그래도 최소한은, 중간에 변심했을 지라도, 회개 하고 돌아오면 희망이 있습니다. 열두제자들같은 사람들은 결국엔 돌아 왔습니다. 또 그 외에 약 100여명 정도가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마가다락방에 모이니까, 120명 정도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구원 받은, 120명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를 쓰시고, 그 마가의 다락방이 초대교회 시작이 된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믿음이란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끝까지 마음 변치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초대교회를 시작하셨듯이, 변함 없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신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다섯명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얼마나 보고 싶었겠습니까?

 

사람도요. 돌아갈 때가 되면, 누구를 가장 많이 찾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이런 이야기 종종 들었을 거예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는데, 돌아가실 시간이 지나도 돌아가시지 않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는 막내 딸이라든가, 아니면, 평소에 사랑을 많이 주었던, 자녀가 오지 않으니까, 돌아가시지 않고 있다가, 그 자녀가 오니까, 그 자녀의 얼굴을 본 다음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없이 죽으셨습니다. 성경은 ' 그때 만큼은 하나님도 버렸다.' 고 말씀합니다. 철저히, 외면 당하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는, 제자들이 절대로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와도 절대 주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들의 역사였습니다.

즉, '거기 너 있었는가' 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있어야 할 그 자리,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이 진짜 크리스찬 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왜 우리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 한 가지 이유만 찾아보기 원합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의 그 현장에 있어야 합니까?

다름아닌, 그 자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는, 대속의 자리였기에, 우리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씻기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염소나 양을 끌고 가서, 제사장에 보이면, 제사장은 염소나 양을 잡아, 제단 뿔에 피를 발랐습니다. 그러면, 염소나 양이, 대신 그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죄 지은 사람은, 그때부터, Free 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데, 염소나 양을, 죄를 지은 당사자 꼭 끌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염소나 양이, 죽는 그 현장에 있어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로 말하면, 십자가 현장을 말합니다.

 

지금 똑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양이 되어서, 십자가에 대신해서 죽으시는데, 죄를 지은 당사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건 구원 받기 위해서는, 십자가 현장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것을 '피의 신학' 이라고 말하는데, 기독교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모든 구원은 십자가에서 시작 합니다.

십자가에서 시작한 적이 없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구원받지 않고, 자기 열심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성도는 십자가 현장의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십자가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이는, 대속도 없고, 구원도 없기에, 살기 위해서 십자가 아래로 달려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그는 작정했다' 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너무도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십자가 사랑을 발견하고는, 견딜 수 없던 것입니다.

내가 왜 그때 그 중요한 자리에 없었을까?

그리는 그는 십자가만 자랑하기로 결단합니다. 갈6:14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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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헬라어로 스타로스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불행한 나무>라는 뜻입니다. 십자가형은 원래 이집트, 그리고 로마에서 사용한 사형 도구였습니다. 죄수는 십자가의 형벌을 받기 전에 먼저 채찍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질을 당한 후에는 나무 십자가에 죽을 때까지 매달아 놓는 사형 도구가 바로 십자가형 이였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예수 님의 십자가 위에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 패가 붙여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유대인의 왕도 아닌데,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까, 죽을 때 만큼은 유대인의 왕으로 죽어라' 라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철저히, 무시와 멸시 조롱당하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치 당함의 십자가였습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형은 결코 급소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대못을 박아서 매달아 놓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잔인하고도 고통스런 십자가였습니다. 낮과 밤, 더위와 추위, 해충의 공격, 하늘에는 독수리가 맴도는데서 공포와 함께 서서히 죽어가는 형이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1주일 정도, 보통 사람은 2-3일 정도 매달려 있다가 죽는데, 우리 예수 님은 워낙 많이 얻어 맞으셔서, 여섯 시간 매달리셨다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는, 수치 당함의 십자가였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십자가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셔야만 했습니까? 우리를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야 하는 사람은 우리들인데, 주님께서 우리 대신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대속의 현장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노예제도 속에서의 흑인들은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의 그 장소로 달려갔습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고되지만, 주님의 십자가 만큼이야 더하겠는가 하면서, 영가를 부르며, 자신의 믿음이 변치 않기를 더 다짐한 것입니다. .

한국은, 잔악한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영문 밖의 길] 이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십자가의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왜 그 십자가의 현장에 있어야 합니까? 주님께서 죽을 실 때, 어리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바울도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역사의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은 그 십자가의 현장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제라도, 그 현장에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현장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대속의 죽음의 현장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입니다. 대단히 미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미련하게 여기는 그 십자가의 우리를 구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이 미련한 길 택하여, 끝까지 변치 않고 달려가시는 복 받는 성도님들 되기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