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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면류관을 받아쓰기 위한 규칙들: 결산 - 디모데후서 4:6-8

by Peartree 2012. 12. 26.

면류관을 받아쓰기 위한 규칙들: 결산

디모데후서 4:6-8

 

오늘도 계속해서 '면류관을 받아쓰기 위한 규칙들', 네번째 시리즈로, '결산'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지난주에는, 시험을 잘 이겨낸 성도에게, '생명의 면류관' 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은 결산을 잘하는 성도에게 '의의 면류관' 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여러 종류의 면류관을 언급하고 있는데, 베드로 전서 5:4절을 보시면, '영광의 면류관' 이 있습니다. 이 '영광의 면류관' 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잘 기르신 목사들이나, 선교사님들에게 주시는 상급 입니다. 또 이런 상급의 면류관 말고요, 주님께서 쓰신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입니다. 주님은 가시 면류관을 쓰셨지만, 우리에게는, 금면류관을 씌어 주신다고 주님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종류의 상급의 면류관 중에, 오늘은, 어떻게 하면, '의의 면류관' 을 받아 쓸 수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바울의 삶을 잘 연구하면,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겠죠.

 

그럼 의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 번째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려면요, 인생의 황혼이 오는 그날까지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The time has come for my departure' 한국어로 직역하면, '떠날 시간이 막 되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었다' 는 말은, 구약성경에 보시면, 하나님께 제사할 때, 짐승의 피를 부었다는 말입니다. 이 짐승의 피를 부으려면 그전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 짐승이 먼저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피가 생기죠. 지금 사도바울은, 이 구약의 짐승처럼, 하나님께 다 드리고는, 이제 남은 것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평생의, 땀과 눈물과 모든 열정을, 하나님께 다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정말 남은 거라곤, 하나님 앞에 가는 일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별거 아니 것처럼, 들릴 지 모르지만,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생의 황혼이 오고,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주님, 저는 주님을 만난 후로, 딴 마음 먹은 적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 사랑하며, 지금까지 왔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흘린 땀과 눈물이, 5 gallon 넘을 거예요. 이제는 더 이상 흘린 땀도 눈물도 없습니다. 주님 만날 일만 남았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냐는 거예요.

오늘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순간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통 한인 교회를 가보면,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안내를 합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미국교회만 가보더라도,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주일 예배에 안내를 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안내를 하는 것보다,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안내를 하는 것도 많은 장점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장점은, 아마도 평안함일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에게 , 나이 지극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반갑게 맞아 주시면, 얼마나 마음에 안정감이 있겠습니까? 황혼에 인격에서 배어 나오는, 그 고요함과 평안함이, 새 신자들로 하여금,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마음을 먹냐면, '여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늙어 가는 구나! 나도 예수를 믿고, 주의 일 하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늙을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먹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정말로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백발의 모양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고요하게, 주님을 섬기는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한평생, 주를 위해서, 헌신하며, 충성하다가, 더 이상 일할 힘이 없을 때, '나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고 하는 그 순간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섬겼습니다.

 

여러분, 해 뜨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해가 지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해지는 석양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저녁 노을이 훨씬 아름답습니다. 하루 종일 빛을 발하며 일하다가, 저녁 무렵 빛을 잃어가며, 서산으로 넘어 갈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오늘 바울의 모습은, 석양이었습니다. 백발의 모습에, 오른 손에는 지팡이를 잡고, 얼굴엔 주름이 가득하고, 허리를 구부러졌지만, 누가 뭐래도, '의의 면류관' 을 받기에 충분히 아름다운 인생을 산 사람이 사도바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꿈의 성도님들도,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사도바울처럼 마음 변치 마시고, 백발의 모습으로, 신앙인의 성숙함과 고요함을 간직하며, 사시다가, 주님 만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 번째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려면,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7절을 보시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한 싸움을 싸울 수 밖에 없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한 선한 싸움' 이요.

'싸움' 이라는 것은,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세계적으로 나라마다 얼마나 많은 싸움을 합니까? 이스라엘과 이란이 싸움을 합니다. 시리아가 내전으로 싸움을 합니다.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 가지네 땅이라고 싸움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이 말하는 싸움은 이런 싸움이 아닙니다. 'good fight' 입니다. 선한 싸움입니다. 이 선한 싸움은 그냥 '싸움' 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냥 싸움은, 상대방을 무너뜨리기 위한 싸움이지만, '선한 싸움' 내 믿음을 지키기 위한 싸움입니다.

 

여러분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떤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이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지만, '의의 면류관' 이 준비되어 있는데, 많은 성도들이 이 선한 싸움을 하지 않고, 그냥 포기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요즘 경제적으로 다들 어렵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믿음으로 극복하며 나가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어떤 분은, 이유 없이 교회를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헌금 때문에 부담이 되서 못나오겠다는 분도 있습니다.

안타까운것은, 이 물질에 대해서, 선한 싸움 한번 싸워보려고 시도해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고, 싸움을 포기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주일을 지키는 문제로 인해서 선한 싸움 한번 해보지 않는 성도도 있습니다. '저는 주일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주일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말 한번 해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 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교만과 싸워야 하죠, 거짓과 싸워야 하죠, 욕심과 싸워야 하죠, 분노와 싸워야 하죠. 요즘은 특히, 자살의 영과 싸워야 합니다. 사탄이 힘들고 어려우면, 자살하라고 얼마나 부추기는 모릅니다. 그래서 자살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런 것들과 싸우되, '피흘리기 까지 싸우라' 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최고 여배우였던 마릴린 먼로가 이런 글을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나는 젊어 아름답습니다. 나는 돈도 많고 사랑에 굶주리지도 않았습니다. 수 백통의 팬 레터도 매일 받습니다. 누구 보다도 건강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웬 일일까요? 나는 너무도 공허하고 불행합니다.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없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왜 불행한지 뚜렷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왜 모릅니까? 자살의 영과 싸우지 않으니까, 이유를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선한 싸움을 싸우면요.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단 마귀가, 자살을 부추기는 것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싸움을 하지도 않으니까,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결국엔, 1962년 마를린 먼로는, 이 한마디 짧은 글을 남기고 자살했습니다. "나의 인생은 파장하여 문 닫는 해수욕장 같다."

문닫은 비치 가보시면, 얼마나 공허합니까?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선한 싸움을 위해서 모집된 주의 군사들입니다. 군사는 싸우라고 있는 것입니다. 싸움을 하지 않는 군사는, 패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선한 싸움을 해야지 만이, 끝까지 달려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오늘,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고 고백할 때는, 선한 싸움을 싸웠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꿈의 성도님들은, 이 선한 싸움을 잘 싸워 승리하시길 소망합니다. 어떤 분은, 한방에 나가 떨어지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몇 달 만에 나가 떨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까지, 잘 싸워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 세 번째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기 위해서는,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시면,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주님 다시 오심을 사모하는 자' 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주님은 세상의 만왕의 왕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는 신랑으로 오십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신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어떻습니까?

세상을 좋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한눈 팝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는 오로지, 신랑 생각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산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만 생각하며 평생을 산 거예요. 다른데 한눈 팔 겨를이 없었습니다.

8절을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다른 서신서에는 '주님이 다시온신다' 라고 말할 때, '기다리다'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영어로는 'Wait'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또 "Looking forward" 라는 단어를 섰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의의 면류관' 을 받아 써야 하는 사람들은,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어단어로는 'have longed'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현재완료형입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갈망하며 사모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은, 잠깐 동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기다려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신랑 되신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립니까? 세상에 취해서, 세상 재미에 쏙 빠진 신부가 신랑을 기다립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부가 가장 신랑을 기다릴 것 같습니다.

어느날, 신랑이 돈을 벌어 오겠다고 하고는, 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감감 무소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부는, 혼자서 살림을 해야 했습니다. 혼자서 시부모님도 모셔야 했습니다. 얼마나 고생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것 까지는 참을 수 있는데, 빨래하러, 동네 우물가로 가면, 사람들이 숙덕거리는 거예요. 남편이 죽었을 거라고 하기도 하고,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을 거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이 신부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것 없습니다. 오직, 신랑이 다시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신랑을 기다린다' 이라는 표현을 씁니까? 아니죠, 이 표현 보다는, 아마도 오늘 바울처럼, '신랑을 갈망하다, 신랑을 사모하다' 라는 표현을 쓸 것입니다.

 

유튜브에서 재밌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 여자의 남편은 미군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 나간 군인이었던 같아요. 이 여자분의 생일날, 온 가족들이, '피자헛' 같은 피가 가게에 모여서 이 여자분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습니다. 온 가족이 피자를 주문하고, 피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피자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분의 남편이 군복을 입고, 피자를 서빙하고 있는 거예요. 이 여자분만 모르게 감쪽같이, 다 짜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 여자분은, 피자를 서빙하는 사람의 얼굴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순간, 피자를 들고 있는, 남편을 얼굴을 보고는, 이 여자분이 놀라는데, 놀래서 기절하기 직전이었습니다. 소리를 치고, 마치 미친사람 같았습니다. 이 깜짝 생일 파티가, 이 여자분의 생일 선물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라면, '미친 노인네' 소릴 들을 정도로, 주님을 사모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다리는 사람들이, '의의 면류관' 을 받아 쓴다고 우리게 격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결산을 어떤 식으로 하시겠습니까? 원하옵기는 사도바울처럼, 인생의 최종 결산을 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인생의 황혼이, 추한 황혼이 되지 않고, 그 안에 주님을 계시기에, 신앙의 성숙함과, 고요함, 평안함이, 가득한, 황혼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사단의 어떤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되, 피흘리기까지 싸워, 끝까지 살아남는, 주의 군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마지막으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며, 세상의 어떠한 것에도, 한눈 팔지 마시고, 신랑을 기다리는 거룩한 신부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이렇게 만 살아간다면, 먼 훗날에, 주님으로부터, '의의 면류관' 받아 쓰고, 주님과 영원토록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