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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기 위한 규칙들- 요한복음 3:1-15

by Peartree 2012. 12. 26.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기 위한 규칙들

요한복음 3:1-15

 

지금 런던에서는 올림픽이 한창입니다.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또 시합에서 패한 선수들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기쁨의 눈물도 아니고, 슬픔의 눈물도 아닌,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눈물인지 아십니까? 억울함의 눈물입니다. 이번 올림픽에, 한국 펜싱의 여자선수 신아람이라는 선수가 있었어요. 경기는 거진 다 이긴 게임이었고, 남은 시간은 1초였는데, 그런데, 그만, time keeper 가, 시계를 누르지 않아, 시간은 멈추었고, 그 멈춘 시간에, 한 점을 내주어, 결국 패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다 이긴 게임인데 말이죠. 그래서 너무 억울해서, 경기장을 못 떠나고, 주저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까,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이 신아람 선수가, 여자 단체전에서, 아무 메달이라도 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억울함이라도, 좀 덜 수가 있죠. 그런데 마침내, 어제, 여자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땄습니다. 본인에게는 그 메달 하나가,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세상에서는, 이렇게, 이 경기에서 못 따면, 다른 경기에서 따면 됩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라톤 경주는, 다른 경기가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면, 단 한번 출전하게 되는 거예요. 태어남과 동시에, 8-90년 긴, 인생 여정의 마라톤을 마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심판대라는, 결승점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심판대 앞에서도, 세 종류의 눈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쁨의 눈물과 슬픔의 눈물, 다른 또 하나의 눈물은 억울함의 눈물입니다.

 

주님 사랑하며, 좁은 길로, 잘 걸어간 사람은,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또 예수 믿으라고, 그렇게 말해도, 듣지 않은 사람들은, 슬픔의 눈물을 흘린 거예요. 그리고 이 세 번째, 억울함의 눈물은 어떤 사람들이 흘리겠습니까?

 

이 세번째, 억울함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예수를 믿는 다고는 하나, 말로만 믿었던 사람, 경주자로서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훈련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믿음 생활한 사람, 이런 사람은 실격처리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 갈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너는 실격이다' 라고 하니까, 예수는 믿기는 믿었는데,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니까, 억울해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신아람 선수만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억울함을 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심으로 교회를 다니긴 다녔는데,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국 문 앞에서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몇 년 전에, 유행한 유머 중에는 이런 퀴즈가 있습니다. '버스가 길을 가다가 한 밤 중에 대형 사고가 나서 그 안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다 죽었는데, 그들 중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1번, 69번 버스를 타려다가, 그만 착각해서 96번 버스를 탄 사람.

2번 버스가 출발할 때 놓칠까 봐 부리나케 달려가서 간신히 버스를 잡아 탄 사람. 3번,버스 안에서 졸다가 내려야 할 곳에서 내리고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다가 사고 당한 사람. 누가 더 억울 하겠습니까?

 

이와 마찬 가지로 천국 소망을 바라보며 무언가 열심히 믿고 살았는데 만약 죽어서 지옥 간다면 이처럼 억울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인생의 마지막 결승점에 도착했을 때,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우리는 올바른 믿음 생활 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제가, 올림픽을 보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요, 모든 선수들이, 실격 당하지 않으려면, 규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아무리 경기를 잘하고, 점수를 많이 따도, 실격입니다.

 

우리의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믿음 생활은, 실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최후의 순간에,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고, 천국으로 입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앞으로 몇 주 간에 걸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기 위한 규칙들' 이란 제목으로 시리즈로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1. 그래서 오늘은 그 첫 번째로, 우리가 승리의 면류관을 받아 쓰려면, 이 땅에서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면,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교회 생활을 잘하고, 전도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했을 지라도, '거듭난 사실' 이 없으면, 규칙 위반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선수들에게 있어서, 훈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경기 규칙을 잘 알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은 '거듭남' 이라는 규칙을 알고, 경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요, '거듭남' 에 대해서 성도들에게 잘 말해주지 않습니다. 또 성도들도, '거듭남' 에 대해서 관심도 없고, 또 알려고 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바리새인들은, 한 주에 여러 번 회당에 나가고, 금식도 하고, 구제도 하고, 나름대로 종교적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이 정도면,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니고데모는, '그렇게 종교적 열심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닌데,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을 텐데' 하며, 고민하며,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런 니고데모의 고민을 주님은 꿰뚫어 보시고는, 난데 없이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을 무슨 말입니까? 너는 아직 구원 받지 못한 상태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니고데모는 아마, 충격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도대체 거듭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라면,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 갔다가 나오는 것을 말합니까? 그렇다고 하다면, 저는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 갈 수 있습니까? 이렇게 늙었는데 말이죠.' 이렇게 4절에 질문하죠.

 

그 때 예수님께서, 거듭나는 것은, 이렇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처음에는,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나지만, 두 번째는,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듭나면, 저와 여러분들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 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집안에, 낯선 사람이 들어와 살기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언제든 'free' 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면, 반드시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마귀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해도, 하나님의 자녀면,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여러분, 참 궁금할 거예요. 목사님 ! 그러면 내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분들에게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 라고 물으면, 네, 몇 년도에, 침례 받았습니다. 라고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저는 집사입니다. 저는 장로입니다. 라고 합니다. 저의 질문의 핵심은,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났습니까?' 라고 묻는 것인데, 자꾸 교회 안에서의 직분을 말한다는 것이죠. 여러분, 거듭남과 교회직분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라도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 갈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런 직분이나, 침례 받은 거나, 한때, 열심히 다녔다거나, 하는 것들은 '거듭났다는 증거' 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거듭났다는 증거는 무엇입니다.

요한일서 3: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 즉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마십시요.' 라는 말이 아니라,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짓지 못한다' 는 말입니다. 비슷한 말 같지만, 많이 틀립니다.

다시 말하면, 거듭난 사람은, 죄를 지어도 되고, 짓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거듭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죄를 싫어 한다는 말입니다. 죄를 보면, 몸서리 쳐 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다가 죄 지으면, 괴로와서 견딜 수 없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죄를 멀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라는 거에요.

과거에 좋아하던 것이 싫어지고, 육신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싫어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것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거듭난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미움이 변해서 사랑이 되고, 죄를 쫓아가던 걸음이 거룩를 추구하게 됩니다. 심지어 얼굴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집니다. 술친구들이 멀어지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믿음의 친구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100년전에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교회들은 '거듭난 사람들의 행동 규범' 이라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서는, 살인이나, 강간, 절도 같이, 사회 법으로, 중형에 해당하는 규칙도 있었어요. 이런 죄들은, 나라에서 죄로 규범하고, 걸리면, 감옥에 보내죠.

그런데, 나라에서 죄로 분류하지 않는 죄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무당, 미신, 굿, 점 보는 것, 제사 지내는 것, 조상 숭배, 이런 것들은, 시회적으로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거 한다고 감옥에 보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교회에서는, 이러한 것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리스트를 만들어, 교회에 붙여 놓고, 들어가고, 나올 때, 읽었습니다.

'이러한 죄들을 짓지 말라고 금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났다면, 하지 못한다.' 라는 말입니다.

 

왜 못합니까? 거듭났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시, 1907년도에 경기도에서 활동하던 S. F. 무어(Samuel Foreman, Moore) 선교사님이 이런 증언을 했습니다.

"전에 김 씨는 농사를 지었는데, 술을 즐겨 마셨고 예쁜 첩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후 첩을 내보냈고 술과 노름도 끊었습니다. 겨울 사경회 기간 중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진보했음을 확인했고 매서인으로 활동해 주기를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라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매서인이란, 초대 기독교 시절, 성경과 기독교 서적을 가지고, 전국을 돌려, 보급하여, 전도의 일을 하는 사람을 '매서인' 이라 불렀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이렇게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않았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듭난 사실을, 세상 사람이 다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거듭난 양반들은, 첩을 내보내고, 가정을 세워갔습니다. 또, 자기들이 부렸던 종들과 같이, 예배당 안에 앉아서, 손뼉을 치며, 찬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당들은 동네에서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굿도 하지 않았습니다. 점도 보지 않았습니다. 초기의 기독교는 이렇게 강력했습니다.

100명 사는 마을에, 기독교인 20명만 있어도, 그 20명으로 인하여, 동네 전체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초기의 기독교가, 막강하게 사회를 변화시키며, 정화시키지 시작했습니까? 그 이유는, 거듭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요. 아무리 교회가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사회를 정화 시킬 힘은 약해집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있어야, 변화의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국의 순회 설교자, 죤 웨슬리 (John Wesley) 목사님이, 설교 중에 'Almost Christian'이라는 말을 자주 쓰셨다고 합니다. 한국어로 "거의 그리스도인"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책을 들고 교회에 가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인 것 같은데 실상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헌금도 하고, 교회에 열심히 봉사하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 것 같은 데 실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10, 20년을 교회 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웨슬레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도, 구원과 구원이 아닌 것, 믿음생활과 종교생활을 분명하게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달가운 설교는 아니였지만, 그 설교를 듣고, 변화 받고, 거듭난 사람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Almost Christian' 은 크리스찬이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도 아니예요. 이런 분들이, 하나님 앞에 선다면, 반드시, 억울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이렇게 변명하며 말이죠. '하나님, 저는 크리스찬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 하시겠습니까? '너는 거듭나지 않은, Almost Christian 이었다" 라고 하실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거듭나기 원하십니까? 천국에 가지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진짜 크리스천이 되시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오늘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난, 그 후에, 어떻게 된거 같습니까? 네 그는 철저히 거듭났습니다. 완전히 변했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 7:51절에 보시면, 니고데모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변호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그 바리새인들이 자기의 동료들이고, 친구들이었었는데, 이제는 그들과 반대의 편에 서서, 주님과 같이 서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이런 것입니다.

 

찬송가 102장의 가사처럼,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이것이 거듭난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이 됩니까? 요한복음 19:39절을 보시면,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할 정도로, 그는 주님과 마지막까지 함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으로 인해, 주님을 찾았고, 진리를 발견하고는, 그 길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저와 우리 꿈의 성도님들도, 천국을 소망하며, 주님 가신 길, 좁은 길, 잘 따라가다 보면, 먼 훗날에, 우리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께서 넉넉하게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 계신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