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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 마 24:35-44

by Peartree 2012. 12. 26.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마 24:35-44

 

오늘도 계속해서, '마지막 때 나타날 현상들 시리즈로 여섯 번째'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마지막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제목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노아의 때' 와 같은 시대인데, 이 시대 가운데, 정말 우리 크리스천들이 살아야 하는 삶이 따로 있는데, 그런 삶은 어떤 삶인지 본문에서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36절을 보시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 몇년, 몇월, 며칠날 오시는지,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 만이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성경 여러 군데에, 그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런 이런 사건들이 일어 날 것이라고, 징조들을 말씀해 주시며, 힌트를 주셨다고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면, 그때가 세상의 끝이라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제 3의 성전이 세워지는 것을 뉴스나 신문을 통해서 보게 되거든, '아하!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드디어 찾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도 역시 마지막 때에 대한 힌트를 주시는데, 37절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말세는 노아의 시대와 같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노아의 시대를 연구하면, 마지막 시대가 어떤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8절을 보시면, 노아의 시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고 말씀합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은, 별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죄를 짓는 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들이 일상생활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저도 하루 세끼 먹고, 마십니다. 또 결혼 적령기가 되면, 장가가고, 시집도 가야 하죠. 이런 일들은 아주 일상적인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한 마디로 '일상 생활의 도취 시대' 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마지막 때는, 변화를 싫어하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살다가 가겠습니다.' 하고, 고집부리며, 변화를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보시면, 혼인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참석 좀 해달라고, 종까지 보냈는데, 하나는 밭으로, 하나는 사업차로, 갔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옆에서 복음을 전해도, 꿈쩍하지 않는 세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아주 일상적인 일 말고는, 다른 일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오는 것, 마지막 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일일 것입니다. 주중에 성도들끼리 모여서, 구역예배 드리는 것,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이런 일 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늘 하던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일, 이런 일상적인 패턴에서, 예수를 믿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는, 그런 특별한 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39절을 보시면, 노아의 시대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시대" 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한 마디로, '영적 민감성의 상실 시대' 이라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지막 때에는 모든 사람들이 철저하게 부패하여 죄악의 깊은 잠을 자고 있게 될 것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오는 심판의 나팔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서서히 끓어 오르는 컵속의 개구리처럼, 바로 죽기 전까지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실험을 했는데요, 컵속에 개구리를 넣고, 처음에는 아주 약한 불로 시작해서, 조금씩 온도를 높여가며 물을 끓였습니다. 그런데도 개구리는 알아채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구리는 죽기 전에, 한번 꿈쩍하더니, 그냥 죽더라는 것입니다. 바락 한번 하지도 않더라는 거예요.

마지막 시대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는시대, 세상 속에서, 그냥 편안하게, 재미있게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새 우리의 영혼은 죽어가고 있는 시대, 살아보려고 발버둥 한번 쳐 보지 못하고, 죽기 전 까지 전혀 모르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죽지 않으려면, 미지근 한 물에도, 온도를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물이 서서히 끓어 오르기 시작하면, 컵에서 얼른 뛰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이 세상에 그냥 몸담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몸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세상을 볼 때, 세상이 제대로 보여집니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보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끓는 물속에서 개구리가 무엇을 봅니까? 그저 따뜻한 물 밖에 보이지 않죠. 그 컵에서 나와야, 그 컵이 불로 달구어져 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교회로 와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창을 통해서 봐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가 바로 이런 시대였습니다. '일상 생활의 도취 시대, 영적 민감성의 상실 시대' … 그리고 주님은, 마지막 때의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노아의 시대와 같은 마지막 시대가운데,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노아처럼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노아처럼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노아는 그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 40, 41절을 보시면,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같은 장소에 두 사람이, 같은 모습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생김새만 다르지 똑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 두 사람 사이에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밭을 갈고 있을 때나, 맷돌을 갈고 있을 때는 같아 보이지만, 밭을 갈지 않고, 맷돌을 갈지 않고 있을 때는 달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렇게 모여서 예배드릴 때는, 다 같아 보입니다. 똑 같이 찬양을 하고, 똑 같이, 설교를 듣고, 똑 같이 친교를 하고 돌아갑니다.

그러면, 언제 다름니까?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돌아가면, 각자 다 다른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먹고 마시는데, 열중인 분이 있을 것이고, 어떤 분은, 세상에 푹 빠져, 세상 재미와 오락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분도 있을 거예요.

반대로 어떤 분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인지, 고민하며, 진짜 그리스도인처럼 살려고 몸부림 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데려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모습으로 밭을 갈고, 멧돌을 간다는 것은, 똑 같이, 교회에 나오고, 똑 같이 믿음생활 하지만, 분명히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밭을 갈고 맷돌을 돌려야 먹고 살수 있었어요. 노아도 역시 밭을 갈고, 맷돌을 갈아야 먹고 마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노아나 겉으로 보기에는 먹고, 마셔야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노아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세상재미에 빠져있을 때, 노아는 산 꼭대기로 올라가 방주를 지었습니다. 다가올 홍수를 대비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노아의 다른점 이었습니다.

 

열처녀의 비유를 잘 아실거예요. 겉으로 보기에는, 열 처녀 모두 똑같습니다. 결혼 예복을 입었으니까, 똑 같을 것이고, 등불도 들고 있으니, 똑 같아 보였을 것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것도 다 같이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틀린 것이 있다면, 다섯 처녀는 등잔에 기름 준비하고 기다렸고, 다섯은 등잔에 기름 없이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미련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죠.

 

여러분,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생활의 패턴으로 인해, 잘 움직이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를 싫어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별일 없었는데, 뭐 특별한 일이 생기겠나? 하며, 특별나게 신앙 생활 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을 '일상 생활의 도취'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생활에 만족하며, 취해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꿈의 성도님들은, 세상과 다르게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사람들이 다 넓은 길로 갈지라도, 좁은 길을 고집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살 다가, 주님 오실 때, 데려감을 당하는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 번째로, 노아는, 세상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42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 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고 말씀합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모든 사람들이 다 잠잘 때, 깨어 있으라는 말입니다. 낮에는 깨어 있으라고 하지 않아도, 다 깨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밤에 깨어 있으라는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사람들과 반대로 살아라, 좀, 다르게 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역사로 보면, 가장 악한 시대가 두 시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아의 시대고 하나는, 마지막 때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시대는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했고, 마지막 시대는 불로 심판을 할 것입니다. 역시 이 두 시대의 공통적의 죄들이 있는데,

미국의 방송 성경공부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M. R, DeHaan 목사님께서, 노아시대의 죄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창세기 있는 성경 구절에 근거해서, 세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21절을 보시면,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아주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원시부족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음악 만큼은 발달했다는 거예요. 목사님 음악이 뭐가 어떻습니까? 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음악이 사람의 영혼을 공허하게 만듭니다. 록큰롤이나, 헤비메탈 음악 같은 경우는, 사탄을 찬양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자살을 선동하는 음악도 있어요. 동성연애를 찬양하는 음악도 있습니다. 그런거 들으면, 영혼은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M.R. 디한 목사님이, 1963년도에 이 글을 쓰셨는데, 뭐라고 말했냐면,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모든 건물에 음악을 틀을 것이다. 공원을 걸을 때도 음악을 들으며 걸을 것이고, 작업실에서도, 샤워실에서도, 자동차 안에서도,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는 음악을 피하여 살 수는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노아시대는 이렇게 음악과 더블어 타락한 시대였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완전히 타락하려면, 세가지가 다 타락해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문화적 타락, 둘째는, 도덕적 타락, 셋째는 윤리적 타락. 이렇게 이 세가지가 타락하면, 완전한 타락이라고 말하는데, 이 음악이 문화적 타락의 기본입니다.

 

또 창세기 6:11절을 보시면,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폭력이 난무하고, 사람 목숨을 하찮게 여겼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타락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윤리적 타락은 성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한번 말씀드렸는데, 노아의 손자 가나안의 후손이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하면, 동성연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이 말하길, 노아의 손자 가나안이 소돔과 고모라에 동성연애를 전파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또, 노아가 술에 취해 벌거 벗고 잠자고 있을 때,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가려주지 못하고, 형과 동생에게 일러바치죠. 나중에 노아가 이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하지 않고,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 합니다. 그래서, 그 때, 노아는 아마도, 가나안이 동성연애를 하고 있어서, 저주 하였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하여튼, 전적 타락인 세번째,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가 노아시대였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시대와 지금 이 시대와 비교해 보면, 더 나은 것 있습니까? 나은 거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동성연애자를 목사와 신부로 세우는 시대입니다. 세상은 또 얼마나 포악합니까? 그리고 얼마나 쾌락을 위해서 삽니까?

 

그런 시대 가운데, 노아는, 그 시대의 풍조를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의인으로 살았습니다. 그 당대에 완전한 자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 동행을 하였습니다. 그 세대에 살았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기가 힘들다고 말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면, 주일을 지키고, 새벽기도를 드려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교회 밖의 세상의 유혹이 너무 심해서 신앙을 지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이 하니 나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세상풍조를 따라 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노아는 찬송가 490장 처럼 "세상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 …… 이렇게 고백하며, 세상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세상 사람들이, 음악을 하며, 춤을 추고, 쾌락을 위해 살 때, 노아는 배를 만들기 위해, 연장을 등에 지고, 산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뒤에서는 '미친 노인네' 라는 비웃음과 조롱이 쏟아지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올라갔습니다. 마지막 때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노아의 모습은 문자 그대로 광신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해외 토픽 감이었을 것 입니다.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하며 미친 노인데 라고 했을 것입니다.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드는 것을 취미생활도 아니었습니다.

방주의 길이가 150m, 폭이 25m, 높이가 15m가 됩니다. 축구장보다 큰 배였습니다. 취미생활이 아니라, 중노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묵묵히 방주를 지어나갔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누가 알아주든 말든, 방주를 지어나갔습니다.

 

여러분, 오늘날 이 시대는 노아의 시대와 같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홍수가 나서,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는 시대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는 시대, 주님의 오심에는 관심이 없는 시대

그저, 먹고 마시고 놀고 흥청망청하는 시대,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천박한 시대…이러한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노아와 같은 사람입니다. 타락한 세상 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며, 깨어 준비했던 사람…………

 

지금도 세상이 얼마나 소란합니다. 전쟁의 소문이 끊이지 않고, 살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이상기온과 가뭄, 전염병, 살인, 동성연애, 이렇게 세상이 혼란하고, 죄악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들리면, 주님은 너희는 머리를 들라고 말씀합니다. 깨어나라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스스로가 '조금 만 있다가, 조금 만 있다가' 하며,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지는 않습니까?

 

그런데요,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주님은 우리의 사정 봐 주시지 않고, 도둑같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44절의 말씀대로,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신다' 는 것입니다. 혹시 조금 만 조금만 하면서, 준비하는 것을 미루다가, 주님을 놓치는 일이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리며, 우리 꿈의교회 속한 성도들은, 모두가 깨어 있다가 주님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