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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관심의 능력 - 요 9:1-12

by Peartree 2012. 12. 26.

관심의 능력

요 9:1-12

 

Nursing Home 에서 근무하는 '가이셀' 이라는 의사가 있었는데, 자신이 근무하는 Nursing Home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이 Nursing Home 에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Nursing Home 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강아지를 아주 귀여워해주며, 과자도 주기도 하고, 안고 쓰다듬어 주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몇 주 후에, 가이셀 박사가 강아지의 뒷다리를 절개하고, 강아지의 골수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강아지의 골수는 적혈구로 가득찬 선홍빛을 띤 아주 건강한 골수 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후에, 가이셀 박사는 Nursing Home 사람들에게 몇주동안 강아지에게 무관심하고, 거들떠 보지도 말고, 옆에서 반갑다고 꼬리를 치고 아양을 떨어도 반겨주지 말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강아지는 현저하게 생기가 떨어지고, 잘 먹지도 않고, 잘 돌아다니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몇주가 지난후에, 강아지의 골수를 다시 검사해 보니까, 적혈구가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고, 색깔도 죽은 갈색이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무관심은 강아지까지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아주 무서운 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사람보다는 예민하지 못한 동물도 이렇게 피가 죽어가는데, 사람은 어떻겠습니까?

 

잔 딜린저(John Dillinger)라는 젊은이가 어느 교회의 부흥집회에 참석했습니다.

부흥회가 끝난 뒤 그는 제단 앞에 나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당시 딜린저는 문제아였습니다. 그러나 부흥회 때 은혜를 받고 제단에 무릎을 꿇은 그는 누군가가 자기에게 와서 함께, 기도해주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저 딜린저는 나쁜 아이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교회 사람들이 누구 하나도 그의 곁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딜린저는 교회 밖으로 뛰쳐나와 공중에다 대고 소리를 막 질렀습니다.

"나는 앞으로 절대로 교회에 가지 않을거야!" 그런 일이 있은 후, 딜린저는 악명 높은 깡패가 되어서 살다가 시카고의 링컨 거리에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때까지 딜린저는 한번도 교회에 가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며, 거지였습니다. 아마도 세상 사람들,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9절을 보시면, 이웃사람들이, 이 소경 거지를 잘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 평상시에 얼마나 관심이 없었으면, 이렇게 알아보지 못합니까? 20절에 보시면, 그 소경 거지는 부모님도 있었습니다. 고아도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거지로 구걸하며 살았다는 것은, 부모님 조차도, 이 앞 못보는 소경인데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하고, 무시당해 왔던, 이 사람이 오늘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이 소경거지를 보시고는 어떤 생각이 드셨겠습니까? 단 한가지입니다. '눈을 뜨게 해 주어야 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셨을 거에요. 이것이 관심인 것입니다. 기적은요?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대부분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주님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지난주에도, 간음한 여인은,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빈들에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실 때도, 주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도, 주님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주님의 관심을 끈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거나, 뭔가 특출 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려면,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소경 거지가, 뭔가 특출 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눈에, 불쌍히 보였던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도 불쌍히 보였고, 빈들의 5000명도 불쌍히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도할 때에, '주님, 우리 꿈의 교회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우리 꿈의 교회 속한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불쌍히 보일 때, 주님께서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심을 가지시고, 그 불쌍한 부분을 치료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소경 거지를, 주님께서 어떠한 방법으로 고쳐 주시는 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방법은, 마음의 치료를 먼저 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 벙어리, 문등병자, 이런 환자들은, 사회 통념상, 저들이 하나님께,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저런 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환자들은, 병보다는, 더 아픈 것이 있는데,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사회로부터의 소외와 무관심에서 오는, 마음의 병이 더 깊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환자들은, 사회 생활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낙이 때문에, 이들을 반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 2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이 불쌍한 거지소경을 "삐뚫어진 시각" 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

이 제자들의 관심은, 이 소경 거지를 불쌍히 여기거나, 그를 어떻게 도울지를 고민하기 보다는 그가 소경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소경이 분명, 어떤 죄를 지어서, 저렇게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소경이 된 것이 확실 한데, 저 사람의 죄 때문인지, 부보의 죄 때문이지' 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불쌍한 이 소경 거지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는 못할 망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있던 것입니다. 이럴 땐 차라리, 무관심 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일 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마음에 상처라도 받지 안죠, 그런데, 지금, 태어나면서 소경 된 것도 억울한데, '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묻고 있으니, 듣는 사람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이렇게 철없이,남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절을 보시면,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한마디를 듣고, 소경 거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평생을 죄인 처럼, 살아왔던, 모든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평생을 죄인 취급 받으며, '나는 죄인이다.' 라는 생각에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는데, 오늘 주님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저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이 한마디를 하시니, 눈을 뜬 것보다, 더한 기쁨이 맛 보았을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태어나면서 소경이 된 것이다. 죄 때문에, 소경이 된 것이 아니다.' 라는 이 말 한마디에, 그는 육신의 치료보다는, 마음의 치료를 먼저 받았다는 것입니다.

 

  1. 두번째로, 주님께서 고쳐주시는 방법은, 순종을 보시면서,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6, 7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땅이 침을 뱉으신 다음에, 진흙을 이겨서, 소경의 눈에 바르십니다.

미간 요법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하셨는지는,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소경거지가 불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지저분하게 흙에 침을 뱉어 눈에 바르느냐?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이 사람을 안수하여 고친 것이 아닙니다. 앞을 보지도 못하는 소경을 실로암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거기 가서 씻으라는 것입니다. 네 발로 가라는 것입니다. 네 힘으로, 네 믿음으로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네 건강을 위해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병을 고쳐주시는 데는, 거의 두가지 방법중에 하나로 고쳐주셨습니다.

첫번째는, 그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시는 경우였습니다. 혈누병 여인도,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니까, 고침받았습니다. 지붕을 뚫은 문등병자도, 친구들의 믿음으로 고침 받았습니다. 혼인잔에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은, 마리의 믿음을 보시고, 행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대부분의 기적들은 믿음을 보시고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두번째는, 믿음이 없어도, 불쌍히 보시고, 그냥 고쳐주시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 같은 경우가 그렇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병자도, 주님께서 찾아가서,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셨을 때, '믿음이 없었습니다. 누가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갑니다.' 라고 불평하는 그를, 주님은 그의 믿음 보지 않고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소경 거지는, 주님께서 믿음도 보시고, 순종도 보시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구약에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큰 용사였지만, 문등병자였습니다. 그래서 소문을 듣고, 엘리사의 집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을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라고 말합니다. 나아만이 화가 났습니다. 감히 장군이 왔는데도, 나와보지도 않고, 터무니 없는 처방을 내리고 있으니 말이죠.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는데, 종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선지자가 더 큰일을 명하였으면,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당신의 몸을 고치려고 하는 것인데, 밑져야 본전 아닙니까?' 그래서, 가서 몸은 일곱번 씻으니, 어린아이 살 같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몸을 일곱번 씻으라는 것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믿음을 보신 것입니다.

 

오늘 소경 거지는, 실로암으로 가면서, 얼마나 많이 고민을 했겠습니까? 또 실로암으로 내려가는 길은 상당히 먼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동문 밖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기혼샘이라는 실로암이었습니다. 눈에 흙을 발라서, 실로암까지 가는 동안에 그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비웃고 조롱했겠습니까?

그래도 이 소경거지는, 주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며 가서 씻었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문제 해결 받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순종하는 사람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우리 주님을 보세요.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순종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시고 기뻐하십니다.

 

호주라는 나라는 땅 면적이 미국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구는 2천만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은 2억마리가 넘는 다고 합니다. 캉카루도 많다고 하는데, 실제로 제가 호주 살 때, 레스토랑에 갔는데, 캉가루 고기가 메뉴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양이 많으니까, 사람이 다 통제를 하지 못하고, 훈련된 개를 통하여, 컨추롤 하는데, 보통 개 한마리가, 양 3000마리를 돌본다고 합니다.

그 개들의 시선은, 주인의 손가락 끝을 떠나지 않는다고 해요. 손가락의 움직임 따라서, 때로는 빨리 뛰기도 하고, 느리게 걷기도 합니다. 그래서 호주에서는 1년에 한차례씩 , 어떤 개가 양을 잘 모는지, 양몰이 대회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개들이 얼마나 시력이 안 좋은지 아십니까? 모든 개들은, 색맹입니다. 개들은 색깔 구분하지 못합니다. 개들의 눈에는, 다 흑백으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들이 칼라 TV를 보고 있어도, 흑백TV를 보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개의 시력은, 0.2 밖에 되지 않는 다고 합니다. 눈이 많이 안 좋은거죠. 그런데, 어떻게 그 광활한 목장에서, 양을 몹니까? 주인을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할 때,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소경 거지는, 순종할 때 눈이 뜨였습니다. 그런데 보시면, 영적 장님도 있습니다. 13절에 바리새인들이 나오는데, 이 바리새인들은, 도대체 주님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뜬 장님들이었습니다. 이 소경거지가 그렇게 예수가 고쳤다고 해도,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40절 같이 읽겠습니다. "바리새인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우리도 소경인가'

맡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본다고는 하지만, 영적 소경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믿고, 순종하여, 영적인 안목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밝은 눈 가지고, 시대를 살피며,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