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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물동이를 버려두고 - 요한복음 4:27-42

by Peartree 2012. 12. 25.

물동이를 버려두고

요한복음 4:27-42

 

지난 시간에는 '세례요한의 발견'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세례요한이 무엇을 발견 했냐면, '자기발견' 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기발견 이었냐면, 자기는 '예수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 라는 것을 발견을 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오시면, 그 길을 비켜 주어야 하는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있던, 제자들도 주님께 보내고, 자기가 특허 내다시피한, '세례주는 의식' 도 주권 하나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께 다 내어 드리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죠.

 

만약에, 세례요한 이 '자기발견' 을 하지 못하고, 자기 사역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속해서 예수님 앞에서 사역을 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 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던지, 떠날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고집부리면, 그것보다, 더 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세례요한은 정말 짧지만, 깔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있은 후에, 사마리아 여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지,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예전에 한 두번 정도, 사마리아 여인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스킵하겠습니다.

 

그러나 1-26절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시장에 간 상태이고, 예수님은 우물가에 홀로,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기다리셨다기 보다, 물 길러 오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영적인 갈증을 해소시켜 주시기 위해선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그녀의 삶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 온 것을 엿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보는 것도 싫었을 거예요. 어쩌면, Depression이 있는 여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보통은 우물가로, 물을 길러 올 때는, 여러명의 여인들이 함께 물을 길러 오는 법인데, 혼자 물을 길러 왔다는 것은 어쩌면, 다른 여인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여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살고 싶다는 의욕마저, 상실한 채, 하루 하루 살아가는 여인이었을지도 모르고요. 물을 길러 오면서, 이 우물에 뛰어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나는데, 하는 마음으로, 왔다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그만 물을 길어가고, 하던 그런 여인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만나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이 여인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사오라고, 시키고는,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연극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무대를 셋팅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고, 이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아 인 것을 대화 중에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이 여인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 갔습니다.

 

28절을 보시면,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전에, 이 여자가 예수님과 어떤 대화를 했냐면, 생수에 관한 대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 에 관해서 말씀을 하시니까, 이 여인이 그런 물이 있으면, 나에게도 주어 마시게 하고, 이곳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말하죠.

 

당시에는, 물이 음식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이삭도 그랬듯이, 가는 곳 마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우물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우물을 메운다는 것을 전쟁선포나 다름 없을 정도로, 우물은 생명줄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 보통 물 항아리를 여섯개 정도는 비치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도, 물 항아리가 6개나 있었어요.

그래서, 여인들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매일 같이 물을 길어 항아리에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물 긷는 것을 좋아했을까요? 아마도, 이 여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면, 물긷는 것이었습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사람을 피해 다니면서, 물을 길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소서" 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뜬금 없이, '네 남편을 불러오라' 고 말합니다. 아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물을 길지 않고 집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그런 생수를 달라고 하니까, '네 남편을 불러오라' 니, 완전 동문서답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이 여인이, '남편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죠. 그러자 '맞다. 네가 남편 다섯명이 있었고, 지금 너와 같이 사는 사람은, 남편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이 그렇게도 물 길러 오고 싶지 않는 이유를 알겠습니까? 당시의 사회로 보면, 어쩌면, 돌에 맞아 죽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일 정도로, 삶이 복잡한 여인…

 

다섯명의 남편, 그리고, 지금 같이 사는 여섯 번째, 남자는 남편도 아니고, 그냥 동거인…

 

이 여인의 꿈이 있다면, 다른 여인들 처럼, 건강한 가정을 꾸리며, 다른 여인들과 같이, 평범하게 물길러 오는 것이 꿈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우물가에서 한 청년과 대화를 하는데, 이 분이, 나의 속 사정을 돋보기로 들여다 보듯이, 훤히 들여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여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25절에,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줄것이다.' 그러자 26절에 예수님께서 "내가 그로다" 네가 말하는 메시아, 그리스도가 바로 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27절에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왔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타이밍입니다.

여기서 '이 때에' 라는 말은, 이 여인과의 대화가 막 끝났을 때를 말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구원하시려고, 먹을 거 사오라고, 제자들을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사람들 만나는 것을 꺼리는 여인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있으면, 분명, 이 여자는 예수님과 대화는 커녕, 도망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대화가 끝남과 동시에 제자들이 나타나죠. 참 멋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죠.

 

그리고 이 여인이 동네로 갔다고 하는데, 이 동네가 어느 지역이냐면,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이, 개 취급하던 사마리아 땅…

 

신학자들은, 이 우물가의 여인을 '최초의 여자 선교사' 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아 ! 나 같이 죄많은 사람도, 구원 받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구나, 생각하니까, 이 여인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를 뛰어 간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렸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그토록 내려 놓고 싶어도, 내려 놓으면, 안될 것 같아, 내려 놓지 못했던, 내가 그토록 붙들고 놓지 못했던, 나의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고집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자녀들일 수도 있어요. 나의 욕심일 수도 있습니다. 나의 가치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주님을 믿음과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을 내려 놓았습니다.

 

물 동이를 버리고, 갔으니, 어쩌면, 그 여섯번째, 동거남이, 때릴 수도 있고, 괴롭힐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남자에게도, 예수님을 전하고, '믿음 안에서, 건강한 가정을 세우자' 라고 하며, 복음을 전할 생각 하니까, 너무도 좋은 거예요.

 

그래서, 정말 건강한 가정, 천국 같은 가정을 만들려면, 우선 믿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 내가 그토록 붙잡고, 버리지 못했던, 나의 물동이를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물동이는 무엇입니까?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1. 둘째로,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28절을 보시면,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이르되………" 29절에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라고 말합니다.

 

아니, 이 여인이,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 몰래 물을 길었던 여인이 맞습니까? 이 여인은 분명, 사람 만나는 것을 즐겨 하는 여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변해 버렸습니다.

 

전도 방법에는, 크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Go and Tell 모델과, Come and See, 모델입니다. 오늘 29절을 영어 번역은, 'Come and See'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Go and Tell 모델은, 말 그래도 가서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과 같은 모델입니다. 이 모델은 제자들 처럼,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대로 훈련 받지 않고, 가면, 일을 망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마다, 전도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Come and See 모델은, 전도훈련 받지 않아도 됩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한번 와 보세요' 라고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초기 사역 가운데,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 보라' 라고 말하죠. 그 때 빌립은 전도 훈련을 아직 받지 않은 상태 였습니다. 그래서 '와 보라' 라고 말한 거예요.

 

오늘 이 여인도 '와 보라' 라고 말합니다. 아직 훈련이 안된 상태죠. 지금 바로 예수 믿었기 때문에, '와 보라' 라고 밖에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요. 이 Come and See 모델은, 훈련이 아직 안 되었지만, '변화된 자기의 모습' 을 보여 주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여인처럼, '물 동이를 버려두고, 세상의 그늘에만 있었는데, 당당히 사람들에게 나가, 이제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닙니다.' 라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랬을 거예요. 저 여자가 예전엔 저렇지 않았는데, 변하긴 변했구나, 저 여자를 저렇게 변하게 한 것이 무엇인가, 궁금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께로 많이 나왔다고, 30절에 말씀합니다.

 

그래서요. Come and See 모델을, 내가 변하지 않고, 무조건 오라고만 하면, '당신이나 가세요.'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Come and See' 모델은,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Go and Tell 모델보다, 더 어려운 거예요.

 

이렇게 이 여인이 사람들 만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되어 '와 보라!' 라고 전하니까,

 

39절에, 사마리아 인이 예수를 믿는 지라.

 

이렇게 한 사람이 변화되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실 때도, 한 사람 한사람, 만나주셨습니다. 오늘도 수가성의 여인이라고 하는, 사마리아 여인 한 사람 만나기 위해서 주님은, 그렇게 우물가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거예요.

 

이렇게 해서, 저와 여러분을 만나 주신 분이 예수님이예요. 오늘도,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 주신 주님이, 수가성 여인이 한 것처럼, 우리들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를 주님은 기대하신 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