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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생활 속에 감사 - 마 20:1-16

by Peartree 2012. 12. 25.

생활 속에 감사

마 20:1-16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은, '생활 속에 감사' 라는 제목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말씀에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수탉이 물을 먹을 때는, 그릇 속의 물을 한 모금, 입으로 문 다음에, 고개를 위로 젖힌 뒤 물을 삼킨다고 합니다. 이런 닭의 물먹는 모습을 보던 어떤 사람이, "저렇게 고개를 내렸다 올렸다 하면 굉장히 힘들 꺼야" 하면서 혀를 찼습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던 또 한 사람이 말하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다 먹고 살자면 할 수 없죠. 목을 안 들면 그나마 한 방울이라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테니까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두 분 말씀이 맞군요. 하지만, 저 수탉은 한 모금 물을 마실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물론, 닭들이 물을 먹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며 물을 먹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닭의 물 먹는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그림을 보고,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먹고 사는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성경 주석가 메튜 헨리는 (Matthew Henry)는 감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오지만,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종교입니다. 신앙생활의 출발은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처음으로 광야교회 생활을 시작할 때도, 하나님께서는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감사하는 생활부터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감사가 사라지고, 원망이 나오면, 그들의 신앙에서 영적인 빨간불이 켜진것으로 보고,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옛날을 기억하라,' 라고 말씀하시며, 원망에서, 감사로,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감옥과 수도원의 생활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기도하러 가끔, 기도원에 갔었습니다. 자유만 있을 뿐이지, 생활의 질은 감옥이 훨씬 나을 거예요. 세면하는 장소도, 불편하고, 화장실도, 불편하고, 잠자는 것도, 감옥은 독방을 주거나, 두명이서 쓰는데, 기도원은 한방에, 6-7명씩 사용합니다. 그런데, 감옥과 수도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단지 불평을 하느냐 아니면 감사를 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별볼일 식사와, 험한 잠자리 환경은 비슷하지만, 감옥은 원망 불평이 가득하고, 수도원은 감사로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 놓고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감옥 같은 삶이 될 수 있고, 평안과 감사가 넘치는 수도원 같은 삶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포도원의 품군' 의 비유입니다. 1절을 보시면,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품군을 구하려고 아침일찍, 장터에 나갔어요. 3절에 보시면, '제 삼시' 그러니까, 거기에 6시간을 더하면,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이 되는데, 9시입니다. 9시에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었나 봐요. 지금도 Washington D.C 에 가면, Seven Eleven이라는 convenient store마다, 하루 일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 수 십명이 서있습니다. 저도 이사할 때, 두 명이 필요해서, U haul Truck 을 끌고 가니까,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서로 차를 타려고 다투어서, 제가힘들었던 적이 있었어요. 그 당시에도 일거리가 없어서 이렇게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품군들과 하루에 한 데나리온의 돈을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내게 되는데, 9시에도 들여보내고, 12시에도 들여보내고, 3시에도 나가보니까,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이 또 있어서, 3시에도 들여 보내고, 하루 일과를 마치기 1시간 전인 5시에도 나가보니까, 놀고 있는 사람이 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도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들어온 시간은 다 다르지만, 하루 일당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 씩을 약속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일거리가 없어서 다 놀고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일 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입에서, '감사' 라는 말이 저절로 나와야 맞는 것입니다. 우리는 꼭, 대박을 맞았거나, 큰 사고에서, 아무탈이 없을 때만 '감사' 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루에 1시간 일하게 되더라도 일할 수 있는 건강 주시니, 감사하다고, 입술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큰 감사의 조건들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도 목사고 아들도 목사인 두 부자가 한 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 목사가 집에 들어오면서 상기된 목소리로 아버지 목사에게 말합니다. "아버지, 오늘 저에게 참 감사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지, 오늘 교회에서 집으로 오는데, 차가 일곱 바퀴나 굴렀어요. 그런데 상처 하나 없이 이렇게 말짱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아버지 목사님이 말합니다. "나는 너 보다 훨씬 더 감사하다." 라고 합니다. "그럼 아버지는 여덟 바퀴 굴렀나요?" 라고 묻자, "아니다, 나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거든"

 

여러분, 아무일도 생기지 않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시면, 이 포도원 품군들이 그렇게 감사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이, 이 감사의 환경 속에서, 감사할 이유를 잊어 버렸는지, 본문에서 두 가지만 찾아 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이들에게서 감사가 사라진 이유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였기 때문입니다.

 

10,11절을 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 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왜 이 사람들이 집 주인을 원망하였냐면, 12절에 보시면, 맨 나중 온 사람들이 한 시간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았어요, 그리고 자기들은 아침 9시부터, 종일토록 수고해서, 더 받을 줄 알았는데,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공평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요. 처음에 주인과 약속할 때, 전부 얼마를 받기로 약속했습니까? 모두가 한 데나리온의 돈을 받기로 약속했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너희가 언제 시작했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만 있어라, 그러면 약속한 것을 주겠다' 라고 했을 거예요. 그래서 천국에 가는 길도 마찬 가지 입니다. 언제부터 예수 믿어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그 길을 가느냐가 중요합니다. 20년, 30년 다녀도, 그 길을 끝까지 가지 않으면, 주인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인에게서 품값을 받는 그 순간까지, 열심히 충성하며, 이 좁은 길을 끝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9시에 들어온 품군들이, 결국에는 일을 다 마치고, 주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이문제가 불공평의 문제였습니다.

왜 일한 시간은 다른데, 품값이 똑같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인에게 막 따지고 있는 거예요. 그때, 주인이 뭐라고 합니까? 13절을 보시면,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집 주인은, 정직하게 계산하고 있는 거예요. 약속한 돈을 주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냐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이, 1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들의 품값을 본 것이 문제였습니다. 한 시간 전에 들어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 받는 모습을 보지만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건데, 그 모습을 보고, 나와 비교하는 순간, 감사가 떠나가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삶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십시요. 비교하는 순간, 감사가 떠나갑니다. 그래도 비교 하고 싶으시면, 정말, 나보다 못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하여야 합니다. 눈 높이는 높이는 순간, 감사가 사라진다니까요.

 

나의 자녀가 전교에서, 2등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감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옆집 아이가 전교에서 1등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여전히 감사가 나올 수 있냐는 거예요.

같은 직장에서, 친구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인과 시간당, $10 받기로 고용계약을 맺었습니다. 요즘 같이 경기가 않좋은 시기에,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친구가, 시간당 $12불 받기로 주인과 계약을 맺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여전히 입에서 감사가 나올 수 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비교의식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원망과 불평의 대부분은 비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 교회 여자 성도님들은, 동창회 모임 같은데, 가지 마십시요. 그런 모임에 나가면,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하고, 찌질 했던 친구가, 남편 잘 만나, 고급 승용차 끌고 와서는, 늘어지게 남편 자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음식값은 내가 다 낸다.' 라고 말하기도 하죠. 갈 때는 기분 좋게 갔는데, 돌아오는 길이 왜 그렇게 기쁘지 않은지… 괜히 열등감이 생겨나고,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반갑게 달려오는 강아지를 걷어차고, 수고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괜히 바가지를 긁습니다. 지금까지 비록 부족하지만, 나의 환경이, 최고인줄 알고 행복했는데, 친구와 자기를 비교하는 순간 감사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포도원 주인은요. 포도원의 품군들을 단체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한명 한명 개별적으로 불러주시고, 개별적으로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로 마찬가지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은 나를 인격적으로, 개인적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설 때에도, 단체로 천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난 다음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인 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내 인생의 모든걸 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여나, 다른 사람 바라보며 비교하다간, 하나님에 대한 감사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참 멋있는 왕이었습니다. 키도 크고, 예언도 하고, 그런데,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다윗을 향하여, 여인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다" 란 말을 듣는 순간, 자기와 다윗을 비교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생각이 더 커지니까, 나중에는 다윗을 죽이려고, 얼마나 많이 시도합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다른 교회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교회 생활에 감사가 사라지게 됩니다. 목사를 다른교회 목사와 비교하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목회자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최고라는 마음을 가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목회를 재미없어 하고, 결국 오래 있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에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한 데나리온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데나리온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1. 두 번째로, 이들에게서 감사가 사라진 이유는, 사랑의 결핍 때문이었습니다.

 

7절에 보시면, 포도원 주인이 놀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그러자. "우리를 품군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하루종일 일할 곳을 기다려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아마도 몸이 약하거나, 나이가 많이 들었거나, 뭔가 일하기에 부족해 보였기 때문에 불러주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해는 저물어 가고 있었어요.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이 장터에 있었다는 것은,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떠한 절박한 상황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루 종일 선택 받기를 기다리며, 얼마나 조마조마 하며 해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랬겠습니까? '오늘도 빈 털털이로 집에 들어가면 안되는데' 하며, '단 한 시간 만 이라도 일했으면 좋겠다' 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거예요.

그때, 1시간을 남겨 놓고, 선한 포도원 주인에게 일할 수 있는 선택을 받습니다. 이들은 너무나 감사해서, 자기를 불러준 것만으로는 갚을 길이 없어, 해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 하며 최선을 다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9시부터 일한 사람과, 5시부터 일한 사람은, 어떠한 차이가 있겠습니까? 9시부터 일한 사람은, 보상을 바라고 일을 했습니다. 목적은 돈 이었습니다. 빨리 여섯시가 되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5시부터 일한 사람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안타까웠을 거예요. 나를 불러 주신 주인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최선을 다해 일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감사하는사람의 모습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이 닫히기 한 시간 전에 불러 주셨습니다. 불쌍히 보시고 선택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찬송가의 가사처럼 '날 불러 주시니, 고마워라' 하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고, 억지로, 예배하고, 끝날 시간만 기다리는 9시에 온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할 시간이 없다고 하며, 틈나는 대로, 충성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감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며, 충성하는 사람에게 포도원 주인은, 먼저 온 사람과 같은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9시에 온 사람이, 보고 막 화를 내며 주인에게 따졌습니다. '저사람이 한 데나리온이면, 나는 최소한 8데나리온정도 받아야 하지 않느냐' 라고 하면서요.

 

이것이 이 사람에게서 감사가 사라진 이유입니다. 늦게 들어온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 너는 늦게 나마 포도원에 들어 왔지만, 열심히 일했고, 그동안 사람들이 너를 써주지 않았으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니?" 이런 말 한마디 해주며, 등이라도 토닥거려 주고, 격려를 해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9시에 들어온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 16절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오늘 포도원 품군의 비유를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이, 한 교회 안에서, 함께 충성하며, 함께 신앙생활 하는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그리고 최근에 들어온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해 주어야 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그 교회는, 그 직장은,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사랑하는 귀한 꿈의교회 성도님들, 다른 것 보지 마시고, 오늘날, 하나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 그 약속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그 약속을 붙들고, 열심으로 충성하는 삶을 살았을 때, 내게 주실, 한 데나리온, 그 귀한 상급을 오늘도 소망삼고, 감사함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