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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광야 같은 인생에서 - 민 11:1-9

by Peartree 2012. 12. 25.

광야 같은 인생에서

민 11:1-9

멕시코 어떤 마을에 온천과 냉천이 함께 솟아나는 신기한 곳이 있다고 해요. 한쪽에서는 부글부글 온천이 끓어 오르고, 또 그 옆에서는 얼음같이 차가운 냉천이 솟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네 여인들은 빨랫감을 가지고 와서 온천에서 빨래를 삶고 냉천에서 빨래를 헹구어 집으로 가져가곤 한다고 해요. 그 모습을 본 관광객이 안내원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사람들은 찬물과 더운물을 마음대로 쓸 수 있어서 참 좋겠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많겠죠?" 그러자 안내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만에요. 이 마을 사람들은 불평이 더 많습니다. 더운물과 찬물이 나오는 것은 좋은데, 왜 빨래 비누는 안 나오냐고 불평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망과 불평을 한번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거예요. 참으로 우리는 많이도 원망을 하며 살아갑니다. 나는 왜 이런 집안에서 태어났나, 나는 왜 이런 사람과 결혼했나, 나는 왜 이런 교회를 다니나, 나는 왜 돈이 없나, 나는 왜 머리가 안 좋은가, 나는 왜 이렇게 성격이 안 좋은가,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겼나, … 이유를 대자면 한도 끝도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이유도 많고, 원망도 많은, 인생을 살아가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원망에 대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너그럽게 대해주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300만명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광야로 나왔어요. 그리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진행하는데 있어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빼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 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원망이란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그렇게 가볍게 넘길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원망을 언제 하냐면, 삶이 고단할 때 원망이 나옵니다. 삶이 막막할 때 원망이 나옵니다. 그리고 옛날보다 지금이 못할 때, 원망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악한 말로 원망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까? 이집트에서 살 때 보다, 광야에 나오니까, 너무 삶이 피곤하고 불편한 거예요. 예전보다, 지금의 삶이 훨씬 질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원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원망의 싹이 조금씩 트기 시작할 때, 원망을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 정도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어, 그래서 세상 사는데, 아무 불편함이 없어!' 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새 원망은 사라질 거예요. '나는 가진게 별로 없지만, 끼니 걱정 안하고, 누울 수 있는 집이있으니, 괜찮아' 라고 하며 생각을 원망에서 감사로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작고, 불편하지만,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하고, 진리의 말씀을 지키려고, 하잖아' 이렇게 좋은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시면, 우리의 생각 속에는 두 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고, 또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의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망각의 주머니에 집어 넣습니다. 이것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인 경우예요. 그런데, 우리의 머리 속이,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혼돈이 일어난다고 해요. 그래서, 기억해야 할 일을 망각의 주머니에 넣기도 하고, 잊어버려야 할 일을, 기억의 주머니에 집어 넣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일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으로 돌변하게 된다는 거예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머리 속에서 혼돈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고, 인도하신 모든 것들을, 다 망각의 주머니에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은혜도 모르고, 감사도 모르고, 원망만 키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이 생기는지, 오늘은 그 이유를 본문에서 두 가지 만 찾아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원망 하냐면, 과거의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경험한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마 가장 큰 은혜는 애굽 땅에서는 노예로 살았었는데, 지금은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구원의 은혜' 라고 말합니다. 은혜 중에 가장 큰 은혜는 죄악에서 건진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 뿐 만이 아닙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셔서, 들짐승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홍해 바다에 다 수장 될 뻔 했는데,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하시고, 물이 없으면, 반석에서 물이 나게 하시고, 매일 같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셔서, 먹이시고, 메추라기를 보내, 고기도 먹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생활 속에서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은혜와 생활속의 은혜를 다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함을 받은 9명의 문등병자들 처럼 말입니다. 10명의 나병환자가 다 치유함을 입었어요. 하지만,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그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은혜를 기억한 그 한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 하십니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은 그들을 찾고 계셨습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떠난 그들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아홉명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고 있다면, 돌아온 한명일 가능이 높고요, 원망과 불평의 삶을 살고 있다면, 주님이 찾으시는 그 아홉명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시면, 다윗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려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는 것이, 원망의 불씨를 없애는 지름길이예요.

혹시 우리 중에, 하나님을 원망하시는 분이, 계시지는 않습니까? 혹시 계시다면,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지, 되 돌아 보십시요. 벌거숭이 같은 나를 입히시고, 만지시고, 그냥 두면, 또 다시, 진흙탕으로 갈 것 같은 나를, 또 다시 잡아 씻으시고, 지금도, 노심초사 염려하며, 나를 붙들고 계시는 주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생각하면, 원망이 나오려다가도 들어 갈 꺼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자주 원망을 합니까?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냐면, '너의 하나님을 기억하라,, 강한 손과 펴신 팔로 너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라, 옛날을 기억하라' '기억하라, 기억하라' 왜냐하면, 우리 주의 백성들은요.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면, 그 은혜가 있던 자리에, 원망으로 채워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은혜 떠난 성도가 무서운 것입니다. 은혜 떠난 집사도 무섭습니다. 은혜 떠난, 권사는 더 무섭고, 은혜 떠난 목사 장로는 더더욱 무섭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게서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 고 몸부림 친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지 않게 말이죠. 여러분, 지금까지 날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요,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은혜 떠나면 언젠가는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돈 떨어 지는 것은 괜찮지만 은혜 떨어 지면 안 됩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은혜 떠난 영혼은 사는 법이 없어요.

 

옛날 1500년대에, 영국에서 청교도 운동이 한참 일 때, 한 벙어리 소경 거지가 거리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 그는 늘 왼손을 펴고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왼 손바닥에 누군가 돈을 쥐어주면, 그는 즉시로 오른 손 바닥을 펼쳐 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오른 손바닥에는 "Thank you" 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고 해요. 그 광경을 지켜보던, 청교도 운동의 지도자, 토마스 왓슨은 '아하 그렇구나, 은혜를 기억하면, 감사가 나오는 구나!' 깨달았다고 해요.

그 후로, 청교도 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몸부림 쳤습니다. 이 청교도 인들이 자주 썼던 기도문 중에, 이런 기도문이 있다고 합니다. "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더 구하옵는 것은, 저희에게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여러분, 지난 세월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 번째로, 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냐면, 현재의 축복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광야 생활의 불편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풍족하지 못한 삶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축복을 다 거두어 가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매일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꽃 같은 눈으로, 지키시고, 살피시는 임마누엘의 축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현재의 축복을 잊어버리고, 원망을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이 원망은요. 아주 전염성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안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서, 원망 불평 해 보십시요. 그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술렁 술렁 할 거예요. 그리고는 몇 일 안되어, 같이 원망하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이것은 거의 공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요. 본문, 4절을 보시면,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전부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섞여 사는 무리들이, 탐욕을 품고, 원망한 거예요. 그랬더니, "이스라엘 자손 다시 울며 가로되"… 무슨 말입니까? 처음에는 원망이란 것을 몰랐어요, 그저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공동체 안에 원망하는 몇 사람을 보고, 전염되었다는 것입니다. 같이 동조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원망하는 섞여 사는 무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 할 때, 순수 이스라엘 백성들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는 애굽 사람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애굽의 체제가 맘이 들지 않았거나,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출애굽 때, 같이 섞여서 따라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절을 보시면, 이 세상 사람들의 탐욕스런 라이프 스타일을,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고 배우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서, 5절을 보시면, 이들이 광야에서 어떤 것을 찾고 있는지 보세요. "애굽에 있을 때는 값없이" 라고 말합니다. 애굽에서 살 때 이들이 값없이 공짜로 먹었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예 신분으로, 하루 종일 벽돌을 굽고, 죽어라 일해야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짜로 먹었다고,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지금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가 진짜 공짜인데 말이죠.

또 다시 5절을 보십시요. 광야에서,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광야에서, 생선을 달라는 거예요. 사막에서 수박을 달라는 거예요. 지금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을 그들이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도껏 요구를 해야지, 들어 주던지 말던지 하지요, 이건 완전히 억지 부리는 거예요. 이렇게 원망할 때는요. 진실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우도 없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당장에, 내 요구만 들어 달라는 거예요. 지금 나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데, 그런데, 이 큰 것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예요. 이 현재 누리고 있는 축복을 생각하면, 원망은 사라질 텐데, 그 주신 복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와서, 만나를 선물로 받았을 때, 그들이 뭐라고 했냐면, '꿀맛' 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그런 꿀맛 같은 만나를요, 하나님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려주셨어요.

가끔씩, 내려주지 않아야 이것이 고마운 줄 아는데, 한번도 거르지 않고, 주시니까, 축복에 익숙해 지게 되고, 나중에는, 그 축복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게 된 거예요.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 못했습니다. 만나를 축복으로 보는 눈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고기 달라고, 수박 달라고, 소리치며 새로운 것을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은요. 축복에 익숙해 지면, 축복을 축복으로 보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러고 의례히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내게 주신 복을, 축복으로 인정하는 것도 큰 복이예요.

 

동화 작가 안델센을 다 아실 거예요. 이 안델센이 얼마나 가난했냐면, 그가 태어날 때, 아기 침대가 없어서, 장례식장에서 갖다 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어서, 밤에 술에 취해 돌아 올 때면, 안델센의 뺨을 때리기 일 수 였다고 합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생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었냐는 물음에 그는, "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때도 있었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나는 아버지를 여전히 좋은 분으로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축복으로 믿었습니다. 내가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 를 쓸 수 있었지요"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꿈의교회 성도 여러분, 한번 과거를 돌아 보십시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현재를 보십시요. 지금도 얼마나 많은 축복을 누리고 사는지, 이 보다 더 큰 복이 있나, 생각 할 정도로, 우리는 맘껏 누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망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 버렸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 원망의 골이 깊어지면, 천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주신 축복과 은혜 감사함으로, 살아가시는 저와 우리 꿈의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