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히 3:1
옛날 희랍의 대과학자 알키메데스는, 당시에 유명한 물리학자였습니다. 한번은 그 나라의 왕이 순금으로 왕관 하나를 만들었는데, 왕은 그 왕관을 만든 장인을 믿을 수 가 없었습니다. 혹시, 금관 속에, 불순물을 섞지나 않았는지,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알키메데스에게 명령을 했어요. 금관을 훼손시키지 말고, 순금인지, 아니면, 겉에만 금으로 도금한 건지, 감정해 보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루는 알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가, 별안간 "나는 알았다" 라고 외치면서, 벌거 벗은 몸으로,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금관을 깨뜨려 보지 않고, 순금인지, 도금만 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낸 것입니다.
그 이론이 물리학의 기초라고 하는데, '같은 종류의 물체라면, 그리고 같은 부피면, 물 속에서도 같은 무게를 갖는다' 라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순금 왕관과, 같은 부피의 순금은 물속에 무게가 같겠지만, 물속에서 무게가 틀리면, 둘중의 하나는 가짜라는 거예요. 이해가 가십니까? 몰라도 됩니다.
하여튼, 이 알키메데스가, 이 이론을 발견하자, 왕이 어떻게 알아냈냐고, 물으니까, 이 알키메데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항상 그것만 생각했습니다."
한명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튼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이 위대한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위대한 원리를 발견했습니까?" 그때, 뉴튼의 대답이 "예, 저는 언제나 그것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를 기록한 히브리 기자는, '천사를 깊이 생각하자' 이런 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고 말했습니다. 지지난 주에, 우리는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 에 대해서 살펴 보았었습니다. 당시에, 천사 숭배사상 때문에, 히브리 기자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가 왜곡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천사가 아니라,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라고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 라고 한, 다른 이유가 있다면, 고난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이 극심한 박해를 우리도 견뎌내자는 의미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박해가 심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는, 믿음을 버리고 싶은 생각도 많았을 거예요. 그러니까, 히브리 기자가, 박해와 고난 가운데서도 우리가 승리 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예수님께로 집중해야 된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로 생각을 집중하지 않으면, 자칫, 믿음을 저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 하시는 분도 계실 거예요. 예전같이, 심한 환난과 박해 속에서, 승리하려면,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되었는데,' 지금은 예전처럼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없으니,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하시는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육체적으로 박해를 당하지 않는 것 뿐이지, 기독교에 대한 공격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예전보다, 더 '예수님을 깊이 생각' 해야 될 때가 바로 이 시대인 것입니다.
예전에는 기독교에 대한 사단 마귀의 공격이, 환난과, 핍박과, 죽음, 굶주림, 고문 같은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격의 패턴은 바뀌었지만, 사실 더 강력한 공격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성공, 번영, 평화, 안전, 화합 (종교통합),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힘들면 힘들수록, 더 예수님을 생각했죠. 그런데 지금은 너무 세상이 좋으니까, 예수님을 깊이 생각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사실, 지금 같은 이 시대야 말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시대"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안하고 안전한 것도 공격이라는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해와 바람이 경쟁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옷을 두껍게 입고 가는, 나그네의 겉옷을 벗기는 경쟁에서, 바람이 태양에게 지는 이야기입니다. 바람은 모진 바람을 불어 나그네의 옷을 벗기려고 했습니다. 그럴수록 나그네는, 겉옷을 더 세게 움켜잡았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따뜻한 햇빛을 내리 쬐었습니다. 그러자 나그네는 두꺼운 겉옷을 벗어서 손에 들고 갔다는 이야깁니다. 바람도 공격이었고, 태양도 공격이었습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문이 사단 마귀의 기독교에 대한 공격이었다면, 평화와 안전, 화합도 사단 마귀의 공격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야 말로, "예수님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시대" 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안 할수록, 안전할수록, 풍요로울수록,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럼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지 두 가지만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 첫째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믿는 도리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는 도리란 말은 우리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고백의 대상은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교회도 예배 순서 중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순서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사도신경을 엄밀히 따지면, 우리의 신앙고백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를 아주 간단하게 압축해 놓은 글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 고백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이란 이런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7절에 보시면, 마르다의 신앙 고백이 나옵니다. "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내 속에서 진실로 예수님이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해야 만이 진실한 신앙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 진실하게 신앙 고백한 사람과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것 같은, 지식 수준으로 신앙 고백한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진실하게 신앙 고백한 사람은, 그의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앉으나 서나 주님을 깊이 생각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요. 진실하게 신앙 고백한 사람은, 매사에, 늘 주님을 생각하며, 주님께 물어봅니다. 주님, 제가 참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요? 주님' 제가 저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주님, 지금 제가 하는 일이, 주님이 기뻐하는 일인가요?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나요? 주님, 이런 땐,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렇게 늘 예수님께 여쭈다 보면, 예수의 사람으로 어느새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하루에 주님 생각 한번도 하지 않고, 삶에 바빠서, 분주하게 살다가, 그냥 잠이 든다면,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맞는지?
사도신경이 신앙고백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날, 예배순서의 사도신경에 집중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한주일을 살다가, 주일이면, 또 사도신경 한번 암송하고, 신앙고백 했다고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기독교의 거장, 존 스토트 목사님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신앙고백을 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 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 하면서, 늘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본인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지, 잘 따라가고 있는지 자신에게 늘 질문을 던지며 살았습니다. 그 위대한 사도바울도요. 그가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주님을 생각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고 사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교만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비롯해서, 우리 성도님들이, 사도 바울 처럼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강심장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진실한 신앙고백도 없이, 주님을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자신 만만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날 한번 예배한다고,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건 제 얘기가 아닙니다. 통계적으로, 미국의 주일을 지키는 성도들 중에, 그리스도인을, 15%로 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건강한 교회 연구소' 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나이롱 신자 급증' 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미국의 복음주의 협회가 정의하는 '진정한 신자' 는 미국 전체의 7%에 불과하다' 라는 것입니다.
미국 전체 인구의 7%니까, 기독교를 45% 으로 잡고, 교회 출석인구로 환산하면, 교회 안에서, 15% 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15% 만이,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는, 진실한 신앙 고백을 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인을 구별하는 잣대는요. 다른 거 없습니다. 그의 삶이 말해주어야 합니다.
- 두번째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예수님은, 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시면, "대 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 대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서, 중재하는 역할 이었습니다. 범죄한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데리고 나가서, 용서를 해 달라고, 죄인을 대신해서, 비는 역할 이었습니다.
제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저희 동네에 아주 싸움 잘하고, 성질도 고약한, 아주 못된 형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지금 목사님이 되셨는데, 하루는, 저희 사춘형과, 저의 형과, 저 이렇게 셋이서, 버릇을 고쳐 준다고, 그 형을 동네 산으로 불러내, 신나게 패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형은 풀이 죽어서,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우리 삼총사는, 자랑스럽게 집으로 와, 저희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 형을 동네에서 다루는 하나도 사람이 없었는데, 칭찬 해 줄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저희 어머니는 아무말 하지 않고, 밭에 가서 복숭아를 몇 개 따시더니, 물로 깨끗이 씻은 다음에, 저희 양손에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집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리고 저희들은 아무말 하지 않고, 복숭아를 들고 따라갔고, 저희 엄마는 죄송하다고, 그 형 부모님에게 비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용서를 받고, 그 후로, 그 형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대 제사장의 역할이 이런 거예요. 그런데, 우리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갈보리 십자가의 피로, 헐어 버리셨습니다.
지금 히브리 기자는, 그, 대 제사장 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구원의 감사를 잊지 말자' 라는 말입니다.
요즘 기독교에서는 '값싼 구원, 값싼 은혜' 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같은 물건 일지라도, 비싸게 주고 사면, 귀해 보이고, 거의 공짜로 얻다 시피 하면, 하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습니다.
이 '구원' 이란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감히 우리의 어떤 것으로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비싸 냐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면서까지,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이 '구원' 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에 출석하면, 받는 것으로, 사도신경 외우면, 받는 것으로 믿습니다. 목사가, '믿습니까?' 라고 묻고, ' 네 믿습니다.' 라고 대답하면, '구원받았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구원이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만, 장바닦에서 파는 팥죽 한 그릇 만치도 못되는 것입니까? 지금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이 '구원'을 너무 값싸게 팔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그냥, 믿습니다. 하면 구원 받았다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구원이 이렇게 값싸지 않았습니다. 구원이란, 믿음과 성화가 같이 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의 모든 교리들이, '구원의 서정' 을 보시면, 지금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라는 말만 강조하고, 구원 받은 성도의 삶은,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면, 피차 곤란하니까?
마태복음 23:15절을 보시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어요.
그러므로,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구원의 감사를 잊지 않고, 그 은혜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 까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은 단순한 묵상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묵상 한다고 잘 못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렸죠, 밥퍼주는 목사 최일도 목사님, 기독교 영성을 한다고, 엉뚱한 거 하는 것 말씀드렸습니다. 지구촌 교회, 이동원 목사님도, 그 유명한 '관상기도' 몇 년동안 기독교 영성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묵상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처럼 살고 있는가, 삶 속에서 신앙의 고백이, 밖으로 드러나는가, 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세상 생각으로, 너무 치중하지 마시고, 주님 생각으로 가득차서, 그와 동행하는 삶으로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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