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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시험 당할 즈음에 - 고전 10:13

by Peartree 2012. 12. 25.

시험 당할 즈음에

고전 10:13

 

미국의 제 34대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의 어린 시절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그가 동네 친구들과 함께 집에 모여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패가 아주 형편 없이 들어온 거예요. 아이젠하워가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자기 패를 내팽개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게 뭐야? 처음부터 이렇게 나쁜 패를 주면 어떡해! 다시 해!" 그때, 아이젠하워의 어머니가 마실 것을 들고 들어오다가 그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어머니는 마실 것을 내려놓은 다음에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카드놀이를 하기 전에 우선 내 말을 잘 들어라. 그리고 특별히 아이젠하워는 엄마 말을 명심하도록 해라! 너희들이 지금 하는 카드 놀이는 장차 너희들이 살아갈 인생과 같은 거란다. 카드놀이를 할 때 나쁜 패가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너희가 앞으로 인생을 살다 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희들의 인생을 맘대로 내 팽개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카드놀이 할 때 좋은 패가 들어오든지, 나쁜 패가 들어오든지 그 패를 그대로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있는 사람만 이제 패를 들고 카드놀이를 시작하도록 해라" 그 후에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되어서 "그때 어머니의 말을 평생 기억하며 살았다" 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좋은 패가 들어올 때도 있지만, 나쁜 패가 들어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고 주저 앉아 있으면 삶의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첫 패가 '영국의 황태자' 라는 패를 들고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첫 패가 '보잘 것 없는 집안' 이라는 패를 들고 시작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엄청난 재산' 이라는 패를 들고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무일푼' 이라는 패로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그 패를 내려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네 시작은 미약 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요. 그렇게 좋은 시작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우상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손에 가진 것 하나 없이,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었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그의 시작은 형제들에 의해서 외국으로 팔리게 되면서, 험난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믿음을 놓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높이 세우셨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그렇게 좋은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마굿간에 태어났습니다. 그분의 삶도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골고다 언덕에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시죠. 저와 여러분의 삶이 패가 어떻든 간에 인생의 경주를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복된 사람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오늘 저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들고 있는 패를 놓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험과 고난 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지? 본문에서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첫째로, 우리의 고통과 고난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당하는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당한 시험은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시험입니다"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나 혼자만 유별나게 이 시험을 많이 당하고 있다.' 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똑 같이 어려운 시험을 당하면서 살아 간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고통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잘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어디엔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이 왜 그래!, 왜 이렇게 안 풀려!, 왜 되는 일이 없지 !' 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 뿐 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이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고민이 하나 없어 보여!' 라고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 사람도 내가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면서 살아간다는 거예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아베베 (Abebe) 란 사람을 아십니까? 그는 마라톤 선수였습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에 나가 맨발로 달려 우승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입니다. 그 후 그의 별명은 '맨발의 왕자'로 불려졌습니다. 그 후 4년 후에도, 그는 도쿄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또 목에 걸었습니다. 지금까지 올림픽 마라톤에서 두 번 연속 우승한 사람은 그 전에도 없었고,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마라톤에 대해서는 전설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라톤 하면 맨발의 아베베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그 후에 이 사람이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를 당해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습니다. 두 다리는 마라톤 선수에게 생명과도 같은 거예요. 마라토너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는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인생이 끝나는 가 싶더니,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노루웨이 장애인 올림픽에서 썰매 경주에 참가해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다른 종목으로 금메달을 딴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1막 보다는 2막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서 "인생의 2막을 아름답게 장식하자" 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두 다리는 잃었지만, 내겐 아직 건강한 두 팔이 있어, 그리고 두 팔 마져도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다" 이 사람은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고 있다' 라는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 사람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통과 고난을 능히 이겨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감동적인 삶을 살고 싶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인생을 끝내고 싶습니까? '이 대로 내 인생을 끝낼 순 없어' 라고 생각되어지면, '나만 겪는 고통이라는 생각을 떨쳐내시길 바랍니다. 나 보다 못한 사람도 능히 내고 있고 든요.

 

흔히 우리는 인생을 연극이라고 말을 합니다. 한번 밖에 공연이 되지 않는 연극 말입니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시면, 여러분은 어떨 때 감동을 받습니까? 아마도,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는 스토리라면,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작가이며, 감독이십니다. 오른손에 메가폰을 잡으시고, 우리를 감독하고 계세요. 그러면서 우리의 인생이, 아직도, 1막에서 머물러 있다고 판단되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새로운 제 2막의 삶으로 몰아 가실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새로운 인생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인생을 통하여 감동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1막에서 2막으로 바뀌어지는 단계를 우리는 고통과 고난의 시간이라고 말합니다. 왜 고통입니까? 예전에 1막에서, 내가 그토록 버리지 못하고 움켜 잡고 있었던 것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에 고통이라고 해요. 세상 즐거움과 향락과 불신앙과 짝하여 살던 달콤했던 1막의 삶을 버리자니, 그것이 고통인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 버리고서라도 2막의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우리를 통하여 감동적인 삶을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하게 되는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큰 목회 하는 것도 부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부러운 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인생을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우리모두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1. 두번째로,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고난 만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시면,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 욥기서를 보시면, 욥이 당한 고난을 잘 알거예요. 하루 아침에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동방에서 최고 부자였는데, 모든 재산이 다 날라 갔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뿐 만이 아닙니다. 그의 몸은 욕창이 생겨, 온 몸에 구데기가 기어다녔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이 엄청난 고난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욥이 이 엄청난 고난을 감당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Control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만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만큼 허락하신 거예요. 다시 말하면, 믿음의 분량대로, 고난을 허락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감당 못할 시험은 하나도 없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시험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욥처럼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쇼핑 센터에 갔습니다. 아들은 시장 바구니를 들고 아빠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고, 아빠는 사고 싶은 물건들을 골라 아들이 들고 있는 장바구니에 넣었습니다. 한두 개는 거뜬했는데 물건이 차면서 점점 장바구니가 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무거워하면서도 낑낑거리며 장바구니를 들고 아빠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한 여인이 속으로 생각합니다. '저런, 속 좁은 남자가 있나! 자기 아들에게 저렇게 무거운 짐을 들게 하다니' 라고 생각하면서 아이에게 다가가 묻습니다. "얘야, 너 그거 무겁지 않니?"그러자 꼬마가 뜻밖의 대답을 해요.
"아니에요. 아주머니! 우리 아빠는 제가 얼마나 들 수 있는지, 제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잘 알아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빠져서 좌절하고 고민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찾아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험중에 있다면, 사랑스런 눈길로 우리를 바라 보고 계실 거예요.

 

여러분 ! 감당 못할 시험은 없습니다. 한국의 맹인으로는 백악관 자문위원에 까지 오른 강영우 박사가 있습니다. 앞을 전혀 볼 수 없지만, 그의 좌우명은 "감당 못할 고난은 없다" 라는 거였어요. 그리고 그가 책 한권을 썼는데, 베스트 셀러가 되었습니다. 제목이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라는 책입니다.

여러분! 혹시 '나는 감당 할 수 없어' 라고 하는 고통이나 고민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이 쉽게 포기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릴 도와 주고 계십니다. 능히 감당할 수 있다고 믿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세번째로,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항상 이겨내라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피하라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난처한 상황이 생기면, 그 자리를 피하는 것도 성경적인 것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정면 돌파하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느낀 것이 있는데, 미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Bother 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길을 가다가 어깨가 약간만 부딪쳐도 'I am Sorry' 합니다. 지금 저희 집 앞에 먼저 집 주인이 자기가 쓰던 물건들을 가져 가려고 빌려놓은 이동식 Storage 가 놓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1주일도 채 안되었는데, 동네 할머니 저희에게 찾아와 이거 언제 치우냐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것 하나까지, 자기들을 괴롭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미국 사람들의 문화입니다. 그런데 가끔 Oil change 하려고, Car Center 에 가면, 그곳은 다릅니다. 은근히 저를 괴롭힙니다. 저는 제일 싼 것으로 갈고 싶은데, 자꾸 비싼 것으로 하라고 은근히 Pressure 주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 갈아야 한다, 저것 갈아야 한다. 고 하면서 갈아야 할 것을 막 빼서 보여 주는 거예요. 그래서 예전에는 그 말을 믿고 O.K. 했었는데, 지금은 저도 약아져서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Car center 에 가면 가장 잘 쓰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Next Time" 이 말처럼 위기를 피할 때 좋은 말이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도 한번 사용해 보십시요. 참 좋습니다. "Next Time" 그렇다고, 제가 "이번주에 교회에 꼭 나오세요" 라고 할 때에도 "Next Time" 하면 안되는 거 아시죠?

 

성경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고, 논쟁을 하려고 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다음에' 하기로 하고 그 상황을 피해가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에도, 예수님은 정면 돌파하지 않으셨습니다. 피하여 가셨어요. 힘이 없어 피하여 가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혜로운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왜 고난 가운데 피할 길을 주실까? 차라리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라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난과 시험이 없다면, 신앙의 성장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이겨 내십시요. 그냥 넘어가십시요. 용서하십시요.' 자꾸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 놓고, 광야에서 40년동안 고난 가운데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 생각 같아선 넉넉 잡고, 15일이면 가는 거리인데, 40년을 돌리셨습니다. 그리고는 매 전쟁 때마다, 피 할 길 열어 주셨습니다. 그 전쟁을 한번 치루면서, 얼마나 영적으로 성장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걸 원하셨던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도 그랬습니다. 사실,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면, 영적으로 성장하지만, 더 성장하는 것은 고난 중에 하나님을 만나면 영적인 성숙이 단단하게 굳어집니다. 저희 집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바람 잘 날이 없었습니다. 저는 속 썩이는 삼촌으로 인해 매일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호랑이 온다' 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이 '삼촌 온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평생을 질병과 씨름하다 하늘나라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고난을 통하여, 저희 집이 하나님 섬기는 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두려운 하나님도 알게 하셨어요. 하나님 의지하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 피할 길을 열어준다는 이 말씀…… 이 말씀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나를 영적으로 성장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이 섞인 말씀입니다.

 

여러분 ! 혹시 삶이 고난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삶이 너무 힘드십니까?

찬양의 가사처럼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실망하지 마세요" 나만 겪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다 같이 겪고 있는 고난이예요.

그리고 그 고난은 믿음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고난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고난을 믿음으로 감당하다가, 도저히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에 내 손을 잡아 이끄시며, 피할 길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그런 고난의 체험을 통해서, 영적으로 성숙 되는 귀한 꿈의 교회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