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24:10-27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이 여전히 누명을 쓰고 모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누구 앞에까지 갔냐면, 3절에, 벨릭스 앞에까지 갔습니다. 본문에는 벨릭스 각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왕은 아니고, 유대인들을 관리하라고 정부에서 파견한, 유대총독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준 총독 빌라도와 같은 위치입니다. 예전에 일제 시대 때, 한국을 통치하라고 일본에서 파견한, 이토오 히로부미, 이등박문이라고 해야 더 잘 아실거예요. 이런 사람들이 다 총독들입니다. 25장에서는, 벨릭스와 비슷한 이름인 베스도가 나옵니다. 바울이 이 사람에게도 심문을 받는데, 이 사람 역시, 유대인의 총독입니다. 26장에서야, 드디어 바울이 왕 앞에까지 나가 변론을 하는데, 이 왕의 이름이 아그립바 왕입니다.
오늘 이 아그립바 왕에게 가기전에 벨릭스에게 먼저 변론하는 바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재판도, 지방법원에서부터 시작해서, 고등법원, 그리고 대법원에 가는 것처럼, 당시에도 아그립바 왕 에게 곧 바로 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의 죄목을 보시면, 바울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고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을 당해 보셨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정말 억울하고 기막힌 일을 당해 보셨습니까? 그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울은 오늘 이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고, 어떻게 변론을 하는지 본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이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면서, 바울은 기쁨으로 변론을 했습니다.
본문 10절 하반절 보시면,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변론하겠습니다.' 라고 벨릭스에게 아주 친절하게 말하는 거예요. 바울의 성품을 보면, 절대 이럴 사람이 아닌데 말이죠. 바울의 성품은요. 긴거는 긴거고, 아닌거는 아니거였습니다. 딱 부러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누명 앞에는 절대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호통을 치며 꾸짖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너무 얌전한 것 같지 않습니까? 바울이 지금 총독 앞이라 떨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사도행전 26장 26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뭐라고 말하냐면,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라고 하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28절을 보시면,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보십시요. 바울은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무서운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한 사람이 와도, 복음을 위해서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 벨릭스 총독앞에서는 기쁘게 변론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에 대해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지만, 그 외에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양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명을 쓰는 것을 참지 못하지만, 내가 누명을 쓰는 것 쯤이야, 웃는 얼굴로 변론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바로게 만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을 어설프게 만나면, 내 안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조금만, 서운하게 하거나, 조금만 비유를 건드리면, 가만 있지 않습니다. 코너에 몰린 몰린 고양이 처럼, 개를 할퀴려고, 발톱의 날을 세우고, 달겨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 죽었습니다.' 하고 '주님은 내 마음 아시지" 하면서 내 성질을 누구려 뜨립니다. 이 것이 예수님을 제대로 예수님을 만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옆사람과 한번 "나 죽었습니다." 하고 인사하겠습니다.
오늘 바울이 쓰고 있는 누명이 뭐였나면, 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사람은 염병이라" 염병은 전염병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가는 곳 마다 소동이 일어나니까, 그렇게 부른것입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소동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초기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에도, 이교도인들이라 불렀습니다. 복음이 들어가서 소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거예요.
또 5절에 "나사렛 이단의 괴수" 라고 누명을 씌었습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로마정부에 대항해서 혁명을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고 힘없이 십자가에 죽은 혁명분자'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분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전하니까, '이단의 괴수' 로 불렀던 거예요. 지금으로 말하면, 광신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세번째는, 성전을 더럽히는자, 바울을 예수님이 죽을 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고,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이말이 성전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는 거예요.
이 모든 것들이, 말도 안되는 누명들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누명을 쓰면서도, 기쁨으로 변론하는 모습은, 나는 어떻게 되는 괜찮다는 거예요. 이러한 나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만 존귀하게 되면,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의 성질도, 자손심도, 내 의지도 다 꺽어버리고, 주님을 전하는 것이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 두번째는, 이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면서, 바울은 맞대응 하지 않았습니다.
10절에 보시면,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번역이 잘 못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이 더 정확합니다. 영어성경은 "Defense"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너희들이 나에게 누명을 씌우는데, 그것에 대해서, 방어를 할 것이다. 내가 분명하게 대답을 해 줄 것이다. 이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바울은 누명에 대해서,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대로만 말했습니다.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사실 그대로만 말하면, 아무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방어하다 보면, 없던 말도 만들게 되고, 있던 말은 부풀려 말하게 되고, 그러다가, 그 말이 한 바퀴 돌아서 내 귀에 들릴 때에는 엉뚱한 말로 왜곡되서 들리게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냥 사실 그대로만 말하면 되는데 말이죠.
바울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본문 12절을 보시면,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내가 성전에서나, 회당에서나, 성중에서 소동케 한 일이 있는가?' 이 말을 하는 거예요. 있는 그대로, 다른 말 하나 보태지도 않았습니다.
14절 보시면, '나는 너희가 이단이라 하는그 도를 좇아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을 다 믿는다' 라고 말합니다. '나는 이단이 아니다. 제발 내 말을 믿어라' 이런말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나는 너희들이 말하는 그 이단이다. 그러나 나는 그 도를 좇아 믿고 있다' 얼마나 솔직하게 말합니까,
제작년에 한국의 장경동 목사님이 미국 뉴욕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코미디언 보다 더 웃기는 목사님이예요. 그런데 그 집회에서 바른말을 했습니다. 뭐였냐면,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는 잘 살고, 불교가 들어간 나라는 못살게 되었다" 없는 말 꾸며낸 것도 아니고, 역사가 말해주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집회가 인터넷에 뜨게 되고, 한국 불교계에서 알게 된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 성명을 내고, 장경동 목사가, 진짜 목사 맞냐, 다른 종교를 그렇게 폄하하면 되느냐, 인격이 안됬다 는 둥 계속해서 찔러댔습니다. 그런데 장경동 목사님이 지혜로운 것은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맞대응 해보세요. 사건만 더 커지는 거예요. 애들 싸움이 집안싸움되는 거예요. 어쩌면, 기독교와 불교의 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장경동 목사님은 이런 말만 했다고 합니다. '역사가 그렇게 말하는데, 나보고 어떡하라구.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인데.'
여러분 ! 혹시 살다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별것 아닌데도, '교회 다닌다는 사람이 왜 그래?" 하면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억울해서 잠이 안 오고 그래서 맞대응하고 싶고 그렇습니다. 신문 광고란을 가득 채워서라도 해명하고 맞대응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지혜로운 방법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냥 사실 대로만 말했습니다. 화도 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말이죠. 그러면 베드로전서 5:6절의 말씀대로,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님 때문에 억울한 비방으로 고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1. 기쁨으로 대합시다.
2. 맞대응을 하지 맙시다.
- 세번째는, 이 터무니 없는 누명을 쓰면서, 바울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16절 보시면,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누명씌우고, 염병이니, 이단의 괴수니, 성전을 더럽히는 자니 할지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지 않다.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말씀입니다.
애드가 애런 포우가 쓴 [고자질 하는 양심]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어느날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자기 집 지하실에 시체를 묻었습니다. 자신은 완전 범죄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사람의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는 거예요. 귀를 막아도 들리고, 잠을 자려고 해도 들리고, 그 사람의 심장 소리가 '뚝 뚝' 하고 들리는 거예요.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리고,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자기의 심장에서 나는 고동소리였다고 합니다.
죄는 숨긴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용서되는 것도 아닙니다. 양심에 들리는 소리를 잘 듣고,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용서가 됩니다. 그래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어지는 거예요. 바울은 지금 자기 양심에 비추어 보니까, 나는 소동케 하지도 않았고, 이단의 괴수도 아니었다는 거예요. 복음을 전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죠.
오히려 바울을 심문하고, 누명을 씌우고 있는 벨릭스 같은 사람이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6절 같이 읽겠습니다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이야기 하더라" 이 사람이 바울이 아무 잘 못이 없는 것 알면서도, 바울의 누명을 벗겨주지 않고, 2년 동안이나, 감옥에 집어 넣은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양심을 2년 동안이나 속이고 있던 거예요.
24절에도 보시면, 이 사람이 바울을 불러 복음을 듣기도 했습니다. 25절에도 사도바울이 마지막 때의 심판에 대해서 설교하니까, 두려워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양심을 거절한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다 보면, 오늘 바울 처럼 누명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오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누명과 오해를 씌우는 그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요. 아마도 자기들의 이익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크리스찬이 싫어서 그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여러분, 화를 내며 맞대응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바울처럼, 웃으며, 사실대로만 말하고,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고 지혜롭게 신앙생활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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