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
겔 8:1-18
한국에 '예수동아리 교회' '류상태목사' 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서울 수유동에 있는 화계사 절간에 찾아가 기독교인들이 불교에 무례하게 행동해서 그 책임을 지겠다고 하며, 주일날 자기교인들을 화계사로 이끌고 가서는, 부처에게 사죄한답시고 불상에게 108번의 절을 했습니다. 그것도 주일날 예배 드리는 시간에 말입니다. 목사는 사단에게 속아서 그렇다 쳐도,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가서 절한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몰라서 그런 것이니 죄가 없다'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5:14절에 보시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모르고 따라 가도 지옥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목사도 잘 만나야 하고, 교회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도 어떤 성도는 저는 잘은 모르지만, 열심히는 믿었잖습니까? 라고 할지 모르지만, 호세아 4:6절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는, 열심히 만 믿으면 되는 시대가 아닙니다. 제대로 알고 믿어야 하는 시대예요. 지금은 얼마나 영적으로, 혼란한 시대인지 모릅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사단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8:44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단을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거짓말 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사단의 출발은 거짓말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제일 잘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가면서 까지 속아 넘어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사단이 거짓말에 대해선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미워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중에 제일계명과 이 계명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출애굽기 20장 3절을 보시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는 질투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아주 무서운 말씀입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처에게 절하는 목사와 성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하나님께 철저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거예요.
상황이 어찌되었든, 죽은 사람이나, 목석이나, 그 어떤 것에 절하면, 우상숭배입니다. 제사 지내는 것은 귀신들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렇게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뭐 어떠냐? 너희 기독교인들은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니? 이렇게들 말하죠.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사단이 이런 식으로 속이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을 앞세우며 말이죠. 효는 살아있을 때 하는 거예요. 죽으면 할 수없습니다.
저는 어릴적에, 산소 앞에서 절하는 장로님을 수십년을 봐왔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교회에 장로님이 두분이 계셨는데, 그 중 한 분의 부모님의 묘가 저희 과수원 안에 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오래 전에 그 분에게서 과수원을 샀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추석과 설날이 되면, 여지없이, 돗자리를 펴고는, 그 장로님이 온 가족을 이끌고 와서는 절을 하고 가는 봐왔습니다. 저희 할머니의 산소도 바로 그 옆이었는데, 저희 가족은 그 앞에 절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고개도 한번 조아리지 않았습니다. 그 앞에 꽃 한송이 갖다 놓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기로 작정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자주 그러셨습니다. 저건 우상숭배다. 죽은자에게 절하는 것은 미신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행동이다.
이 분은 십계명중에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고 있던 거예요. 이분이 천국에 가겠습니까? 지옥에 가겠습니까? 저에게 묻는 다면, 저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에 간다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설마 그럴리가요? 예수 믿얻잖습니까? 장로님이잖습니까?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계시록 22:15절은 '우상 숭배자들은 성밖에 있을 거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 성경을 우리 마음대로 해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대할 때 설마 그럴까?'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맘대로, 나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그렇게 해석하는 게 아니라, 기록된 말씀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설마 하다가 지옥에 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가는 길을 좁은길이며, 조심조심 하며 가는 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이 에스겔 선지자의 영을 끌어 하늘로 올리신 다음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이스라엘 족속이 얼마나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지를 눈으로 보여주며, 확인시켜 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타락한 이스라엘 족속이 어떤 우상을 섬겼으며,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어떤 벌을 내리시는지 본문을 살피며 은혜나누기를 원합니다.
- 첫째로, 그들은 투기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5절을 보시면, '북편을 바라보니, 투기의 우상이 있더라' 라고 기록합니다. 이 '질투의 우상' 이 북편에 있었던 거예요. 왜 북쪽에 우상을 만들었냐면, 그 당시 이스라엘에 쳐들어오는 나라는 다 북쪽의 나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보호해 달라는 수호신 같은 우상을 북쪽에 세워둔 것입니다. 원래는 북편문 앞에 뜰에는 빈터로 아무것도 놓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없는걸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 입니다.
없는 걸 만들어서, 그것을 제도화 시키고,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거요. 그래서 원래 본질은 간데 없고, 형식만 남아 있는 것, 이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예를들어, 원래 기독교에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추도예배가 없습니다. 성경을 이잡듯이 뒤져도 죽은 자를 추모했다는 기록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무덤에 장사를 지내고 그것으로 끝인거예요.
그런데, 기독교에 없던 이 추도예배가 어떻게 해서 한국에 생겨 났냐면, 1897년, 당시에 아펜젤러 선교사 일행이 발행한 신문 '조선그리스도인 화보' 9월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최초로 '추도예배'를 드린 사람은 '이무영' 이라는 정동감리교회 교인이었다. 그는 궁궐에서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정 3품의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으로 '윤치호' 와 함께 독립협회 운동한 사람이었다. 이무영은 모친 기일이 되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추도예배'를 착안하였다' 다른 교인들도 신문의 이 기사를 보고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서 그 이후에 교회에서 추도예배를 많이 드렸다'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도 가르치지 않고, 선교사도 가르치지 않고 있는데, 한 교인이 스스로 결정해서 만든 것이 기독교의 전통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당시에 깨어있는 성도들은 추도예배는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이름만 바꾼 '우상숭배' 라고 비난을 했지만, 효를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불교에서 49제 드리는 것을 그대로 가져와 49일 되는 날 그 집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는 목사님도 보았습니다. 이건 불교인지 유교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짬뽕 기독교를 만들고 있는 거예요.
신명기 12:32절을 보시면,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없는 것을 만들지 말라는 거예요. 만들게 되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두번째로, 가증한 짐승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시면,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벽 사면에 가증한 짐승들을 그려놓고, 이스라엘의 장로 70인이 컴컴한 밀실에서 손에 향로를 들고, 그 그림 앞에서 향을 피우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즉, 이들은 짐승들을 섬기고 있었던 거예요.
아마도 그 벽에 그린 짐승 중에, 돼지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그런 그림을 볼 수 없는데, 제가 어렸을 때, 어미 돼지가 누워있고, 열 마리도 넘는 돼지새끼들이 어미돼지의 젖을 빠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그 돼지의 눈이 어찌나 무서웠든지, 좋은 그림도 아닌데, 오로지 복 받고 싶은 마음에 안방 중앙에 걸어 놓았던 것입니다.
또 이런 사람도 보았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액자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굽신 거리며 두손을 빌며 절을 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 액자 속에 누가 그려져 있냐면, 한손엔 술병을 들고 있고, 배는 술배로 인하여 터지기 일보 직전의 중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복을 불러 온다나 뭐라나 ! 차이나 부페 가면 이 중이 문앞에 항상 앉아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미련합니다. 사람이 돼지 보다 못하고, 술 주정뱅이 땡 중 보다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죽여가며 저와 여러분들을 바꾸기까지 한 우리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그림 앞에 절하고, 짐승을 섬긴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시겠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런 질문을 세번씩이나 던집니다. "네가 보았느냐?" 12, 15, 17절에 "네가 보았느냐?" 하나님께서 하도 기가 차니까, 에스겔에게 말하는거예요. '에스겔아 너, 이런 것 본적 있냐?, 기가 차지 않니? 이게 나를 믿는 다고 하는 백성들이 할 짓이냐?'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 오늘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래서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큰 우상은 돈입니다.
계시록 13:17절 보시면,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 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돈 만 벌 수 있다면, 사고 팔고 만 할 수 있다면, 짐승에게 경배하고 666 짐승의 표를 이마나 손등에 받는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성도의 인내를 무엇으로 평가하냐면, 돈으로 평가합니다. 돈을 벌고 짐승에게 경배하느냐, 돈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느냐? 마지막에는 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 날이 반드시 온다는 거예요.
뭐라구요?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시는 기준은, 돈입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돈 때문에 하나님을 뒷 전에 미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돈이 먼저고, 그 다음이 하나님이라면, 돈은 우상이 되는 거예요. 돈 때문에 주일을 범한다면, 돈은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5절에도, "탐심은 우상이니라"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가지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없으면, 없는대로, 있으면, 베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 세번째는,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며 태양신을 섬겼습니다.
13절을 보시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다른 큰 가증한 일' 을 보여 주시겠다고 하시며, 14절에 '담무스' 를 위하여 애곡하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15절을 보시면,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말씀하시고는 16절에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낮을 동으로 향하고 동방태양에 경배하더라" 이 말씀이 오늘 하나님께서 가장 가증스럽게 여기셨던 우상숭배입니다. 담무스와 동방태양에 경배하는 것.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새해가 되면, 동해안으로 해맞이 하러 간다고 갑니다. 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새 해가 돋을 때, 태양을 향하여 소원을 빈다고 합니다. 그런데 뭣 하러 그렇게 멀리 가는지 몰라요. 집에 가만히 있어도 태양은 뜨는데 말이죠. 하나님께 더 가증한 짓을 하려고 가는 걸 꺼예요.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들이 섬겼던 우상 가운데, 가장 오래 되었고, 가장 오래 섬겼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섬겼던 우상이 태양입니다. 그것도 동방태양입니다. 지는해가 아니라 뜨는 해를 섬겼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동방 태양을 섬겼던 나라는 바빌론입니다. 부와 번영과 타락이 만연했던 나라, 군사적으로도 강력했던 나라였습니다. 지금의 미국 만큼이나 강대국이고, 성적으로 타락했던 나라가 바빌론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들도 이렇게 바빌론처럼 잘 살고 싶어서, 번영하고 싶어서 동방 태양을 섬기고 있던 거예요. 잘 살 수만 있다면, 16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전을 등지고서라도 동방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나님을 늘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말이죠. 신부는 신랑을 바라보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신랑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는 신부는 천국 혼인잔치에 합당한 신부의 모습이 아닙니다.
혹시 우리의 모습이 나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을 뒷전에 모셔 두지는 않았는지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어제 새벽에는 기도하면서, 오늘 말씀에 대해서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대상에 앉아서 기도하는 저의 모습이 너무 편한 거예요.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강대상도 없이 예배드리셨는데, 우리 예수님은 에어컨도 없이, 빈들에서, 때로는 바닷가에서 설교 하셨는데, 때로는 머리 하나 둘 집도 없이, 들 짐승이 우글 대는 산속에서 기도하셨는데, 나는 너무 편하구나.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이 성공하고, 복을 받는 것이었다면,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지 않으시고, 건물 부터 짓고, 성공을 말하며, 번영을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로지 관심은 한 영혼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우리 주님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사람들은 높은 곳을 자랑하며, 웅장한 성전을 자랑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헐어버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지금도, 주님이 원치 않는 것을 자꾸 세우려고 한다면,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설교는 오로지 천국과 지옥을 말씀하셨는데, 목회자가 성공 번영만 전하면, 그것도 우상 숭배 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지 않고 우상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욕심과 탐욕때문에요. 이제 우리 꿈의 교회는, 우상이다 생각하는 길은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 욕심과 이기주의 길을 버리고, 물질 주의도 버리고, 성공 지향주의도 버리고, 신부의 길을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신부의 길이란,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동방태양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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