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 행 23:1-11

by Peartree 2012. 12. 25.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행 23:1-11

 

지난주에는 바울이 청중들 앞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바울의 간증의 특징을 보시면, 청중들과 Gap 이 없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나도 너희들과 같은 사람이다' 라고 말하며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간증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세번째는 사명을 깨닫고, 발견하고, 그 사명따라 살겠다고 하는 바울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주에는 사도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아주 곤혹을 치뤘습니다. 오늘은 곤혹이라기 보다 살해 협박을 당하고 있습니다. 12절 보시면,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아주 위태 위태한 상황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바울이 여러 말 하지도 않았습니다. 딱 한 문장 말했습니다. 1절을 보시면,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이 한마디 했습니다. 그랬는데, 2절 보시면, "대 제사장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라고 말합니다. 듣기 싫다는 말입니다. 말을 하라고 세워 놓고는, 딱 한 마디 하고, 더 이상 못하게 입을 때리는 유대인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포악한 군중으로 변해 버렸습니까? 왜 이 사람들이 이렇게 난폭하게 되었냐면, 사도바울이 이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유대인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유대인들은 참으로 특이한 민족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알 것 같다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까지 노벨상 수장자의 1/3이 유대인이었습니다. 전세계의 돈을 다 거머쥐고 있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5형제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 세계의 금값과 다이아몬드 값을 매깁니다. 형님 금 값을 올리지요, 그러지 뭐! 하면 금값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전에 맨하탄에 간적이 있었는데, 록펠러 빌딩 앞에까지만 갔었습니다. 그 비싸다는 맨하탄에 중심가에 록펠어 소유의 빌딩이 어마 어마 했습니다. 그 빌딩안을 구경하는데, 50불 정도의 표를 사야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들어가지는 않았는데, 미국에서 제일 부자가 마이크로 소프트 회사의 빌게이츠라고 하지만, 이것은 주식 평가액이라고 합니다. 실질적인 자산규모는 록펠어 450조, 빌게이츠가 55조 빌게이츠는 록펠러의1/10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부자는 록펠러입니다. 이 사람도 유대인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미국의 금융, 오일, 식량, 방송사, 무기회사 ,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돈을 벌었는지는, 미스터리입니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해서, 하나님께서 물질의 복을 허락하신 건지, 알다가도 모르는 민족이 유대민족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전쟁을 많이 했죠. 그중에 가장 유명한 전쟁이 '맛사다의 전투'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기가막힌 전투였습니다. 맛사다란 요새는, 천하의 요새입니다. 마치 중절모를 업어 높은 것 같은 바위산입니다. 그래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방어하기는 식은죽은 먹기의 천에요새였습니다. 그곳에서 유대인 1000여명이 로마군대에 맞서서 방어를 하고 있었는데, 로마군이 몇 년에 걸쳐, 땅을 돋아서 길을 만들어 침공하였을 때,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은 사건을 증언할 한 명만 남기고 다 자살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곳에 전쟁 무기와 물과 양식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참하게 죽느니, 집단 자살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자존심입니다.

 

당시에 바울의 이 한마디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고, 당시에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세가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에게는 주시지 않고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선민'이란 자부심이었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유대민족만을 특별히 택하셨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민족을 개 같이 여겼습니다.

두번째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지키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믿었습니다. 이 율법도 다른 민족에게는 주시지 않고, 유대민족에게만 주었다는 자부심이었습니다.

세번째는, 성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을 가지고 있는 나라, 명절이면, 다른 이방나라도 성전에 올라올 정도로, 이 성전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말한 한 문장에는 선민사상과 율법에 대하여 모독하는 발언이 들어 있었다는 거예요. 당신에는 이 세가지중, 한가지만 업신여겨도 사형이었습니다. 택한 백성이란 것을 저주하든가, 율법을 어기든가, 성전을 업신여기면, 사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이 이중 두가지를 모독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갑자기 사나워지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이, 정말 그렇게 소중한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더 소중한 것이 있는지 살펴 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바울이 택한 백성에 대하여, 반박하는 '형제들아' 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그들이 사납게 변해 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에게 형제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들이 화낼만도 합니다.

 

예를들어, 예전에 한국에 처음 복음이 들어 왔을 때, 예수 믿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형제 자매인 것을 깨닫고, 형제님, 자매님 이라고 부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에 예수를 믿지 않는 양반에게 형제라고 한다면, 아마 '이런 근본도 모르는 것들' 이라고 하며 노발 대발 하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가 처음에는 서민층에서부터 확산이 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고귀하신 양반들은 평등사상이란 것을 받아 들이지 못한 거예요.

 

지금 바울을 형제들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유대인과 이방인을 같은 레벨로 놓고 있던 것입니다. '우리 같은 경건하고 의로운 선민을 저 하찮은 이방의 죄인과 똑같이 평가하다니'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그러면서 '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죽어야 한다' 라고 판단하고, 바울을 죽이려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교만이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늘 영광 다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시기까지 낮아 지셨는데, 그까짓 유대인의 혈통에서 태어난 것이 무슨 대수라고, 왜 그렇게 교만한지 모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전세계 어디서든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도 높은 곳을 좋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는 거지만, 교회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직분만 있을 뿐입니다. 집사는 집사로서의 역할이 있고, 장로는 장로로서의 역할이 있고, 목사는 목사의 역할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꾸 계급화 시키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 목수의 역할이 있고, 전기공의 역할이 있고, 플럼머의 역할이 있습니다. 지붕위에서 일하는 사람이 높은 곳에 있다고, 높은 직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다 같은 하나님의 집을 세워가는 일꾼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라고 불렀는데,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1. 두번째로, 바울이 왜 위험하게 됬냐면, 1절에 "양심을 따라" 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양심을 따라가 아니고,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라고 했어야 유대인들이 원하는 대답이었습니다.

'양심' 과 '율법' 은 반대 입니다. 정 반대입니다.

율법은 기록된 문서입니다. 눈에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법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만 해줍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보니까, '거짓말하지 말라' 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아 ! 이 거짓말이 죄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걸로 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을 속이고 나니까, 마음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지금 이 사람이 양심의 법에 의해서 '거짓말이 죄구나' 하고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결국, 죄를 뇌우 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죄를 피해 갈 수 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되요. 그런데 양심의 법은, 내 속사람 한테 제일 먼저 들킵니다. 죄를 짖고 들키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짖기 전에 들켜버립니다. 누구를 속이려고 한다면, 그 속에서 양심이 먼저 "야 ! 너 지금 죄를 지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하면서 먼저 죄를 들쳐 내 버린 다는 거예요.

 

그럼 율법과 양심의 법 이 둘중의 어느 법이 좋습니까? 양심의 법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주어졌고, 우리 이방인들에게는 양심의 법이 주어졌습니다.

 

이 양심의 법이 얼마나 좋은 법이냐면,

요한복음 8장에 보시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인' 의 이야기 나옵니다.

사람들이 율법에 의해서 이 여자를 죽이려고, 양손에 돌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죽기 일보 직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땅에 뭔가 쓰시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말씀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니고, '양심의 법' 을 들고 나오신 거예요. 이 여자만 간음했냐? 너희들도 간음하지 않았느냐? 이 여자가 재수 없이 들켜서 그렇지, 너희들은 들키지 않은 간음자이지 않느냐?

너희 자신들이 더 잘 알걸? 너희 양심이 더 잘 알걸? 이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도 뒷 걸음질 쳐 다 도망간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하니까, 이 유대인들이 '양심이 아니고, 율법이다' 라고 생각하고는, 바울을 죽이려고 하였던 거예요. 보십시요. 율법에 의하면, 사람들 죽이려고만 하는데, 양심의 법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용서하라고 말씀하시잖습니까? 그래서 율법은 죽이는 법이요. 양심의법은 살리는 법입니다

 

그러는 그들을 향하여 바울이 뭐라고 말합니까?

3절을 보시면,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바울이 지금 화가 단단히 낫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진짜 이 말 한 다음에 유대인들에게 완전히 찍혀서, 21절에 보시면, 바울을 죽이려는 자객 40명이 숨어서, 바울을 죽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회칠한 무덤이란? 말은 '굉장한 모독' 입니다. 지금의 말로 바꾸면, '겉은 멀쩡하지만, 너의 속은 썩었다.' 이말입니다. 당시에 명절에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면서, 잠잘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거예요. 그래서 순례객들이 동굴 무덤에서 많이 잤습니다. 그런데 잘 못 들어가면, 시체가 눕혀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냄새가 지독하고, 병균들도 있겠죠? 그래서 정부에서 명절 때가 되면, 그런 무덤에 들어가지 말라고, 회를 칠해 주었습니다. 일종의 정부차원의 서비스였습니다. 바울이 지금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이런 무덤과 같은 사람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이런 신앙의 상태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 말이죠.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은, 겉 모습보다는, 속이 더 알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런 신자들이 되기를 우리 예수님은 얼마나 기다리시고, 바라고 계시는지,

본문 11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합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예수님께서 너무 기쁘셔서, '지금 오늘 네가 한 그 설교 있잖아, 로마에 가서도 그대로 해 줄래' 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11절을 다시 보시면, 예수님께서 바울 곁에 서서 계십니다. 이 얼마나 든든 합니까? 세상은 높은 자리를 원하고, 세상은 양심을 버리고 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낮고 겸손한 자리에서, 양심을 따라 살기로 결심한 바울에게, 너무 기쁘셔서 옆에 서 계신 것입니다. 게 곁에는 내가 있지 않느냐? 하시는 주님의 사인입니다.

우리 꿈의 성도님들도, 주안에서 유대인처럼 너무 교만하지도 마시고, 율법을 가지고 남을 정죄하지도 마시고, 모두가 죄인이고, 그래서 낮고 겸손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사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 곁에 항상 서 계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