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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너도 이와 같이 하라 - 눅 10: 25-37

by Peartree 2012. 12. 25.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 25-37

 

일본의 이께다 가요꼬라는 분이 쓴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이란 책이 있습니다. 세계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 시켜 놓고, 그 상황을 소개한 '지구촌 현황보고서'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100명 가운데 52명은 여자이고, 48명은 남자다. 30명은 어린아이고, 70명은 어른이다. 어른가운데 7명은 노인이다. 70명은 유색인종이고, 30명은 백인이다. 17명은 중국어를 말하고, 9명은 영어를 말하고, 8명은 힌두어, 6명은 스페인어, 8명은 러시아어, 4명은 아랍어를 말한다. 그리고 별의 별 사람이 다 모여사는 이 마을에 얼마나 빈부의 격차가 심한지, 20명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고, 한명은 굶어 죽고, 15명은 비만증을 앓고 있다. 그리고 이 마을의 6명이 이마을 재산의 59% 를 소유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은 미국인이다. 그리고 20명이 나머지 2%를 가지고 나누어 살고 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7명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마실 수 없고, 14명은 글을 읽지 못하고, 48명은 괴롭힘, 체포, 고문, 죽음의 위협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면서, 저자는 마지막 결론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마을을 살려야 한다. 서로 미워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위해서 사는 것으로부터 변화시켜야 한다. 그 힘은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진정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일이다. 당신부터 먼저 사랑으로 시작하라. 하면서 이 책을 끝 맺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수 있는 방법은 사랑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는 시험을 하는데,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묻습니다. 27절에 보시면, 이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런 율법교사의 대답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을 보시면,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구약성경을 아주 짧게 압축하면, 십계명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십계명을 더 간단하게 압축하면, '1계명부터-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5계명부터-10계명까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렇게 압축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께서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율법사가 성경의 가르침과 똑 같은 대답을 하는 거예요. 그러자 예수님께서, 28절에 '네 대답이 정답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께서 원하신 대답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지식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게 행하라' 하시면서, 이 정답을 실천으로 행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이라면, 어느정도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알고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고 착각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과 행하는 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제가 목사니까, 저에게 여러가지 궁금한 것을 묻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님들은 잘 묻지 않으시는데, 그분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어떤 분은 참 많이 알고 계시는 분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은 '성경 구절을 꾀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어떤 분은 목사인 제게 목회는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교회가 성장하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며 가르쳐 주시는 분도 계세요. 다 하나같이 놓칠 수 없는 좋은 말들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대답이 옳습니다. 그러면 이를 행하십시요'

엇그제는 어떤 분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상속에 있는 장소가 아니며,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의 영혼이 그 둘중의 한곳으로 반드시 갑니다. 우리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으며, 천국에 가는 길은 오직 한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과 동행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했더니, 한참을 들으시고는 '나도 어느정도는 다 알아요'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는 것 만으로는 안돼요.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율법사가 나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교회 생활에 대해서, 심지어는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까지도 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행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이 율법사가, 예수님께 또 묻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도대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를 말씀합니다. 오늘은 이 선한 사마리아의 인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이웃을 사랑하려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웃사랑 실천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신을 닫아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이웃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웃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길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이웃을 보고도 보지 않기로 마음먹고, 들려도 듣지 않기로 마음먹고 피하여 간 사람들입니다.

 

우리교회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눈은요. 이웃들의 표정을 살피는 눈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웃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본문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당시에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충분히 이웃을 도울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율법사처럼,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은 강단에 서서 사랑을 실천하라고 설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굳게 닫아버리고, 실천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이 들어 왔습니다. 아니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사랑의 마음 문을 여는 데에는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우리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의 한 흑인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들어 놓은 보험 덕분에 가족들은 유산으로 20만불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돈으로 조용한 곳에 집을 짖고 여생을 보내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들이 사업을 시작했는데, 사업자금으로 돈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처음에 거절했다가, 결국에는 아들의 간청을 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며칠 후에 아들의 친구가 그 돈을 가지고 도주 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들은 고개를 떨군채, 어깨는 축 늘어뜨리고선, 어머니에게 자초지정을 털어 놓습니다. 그 말을 듣던 누이가 화를 감추지 못하고, 험한 말로 동생의 마음을 찢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합니다. '나는 너에게 동생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러자 '저 녀석을 사랑하라고요. 사랑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언제나 사랑할 만 한 무언가가 있는 법이란다. 네가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너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란다. 너는 동생을 위해 울어봤니? 너를 위해 운 것 말고, 저 애를 위해 말이다. 저애가 겪은 일과 속상한 마음을 위해 말이다. 너는 누군가를 가장 사랑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니? 세상이 사람을 가장 사랑할 때는 그 사람이 가장 낮아 졌을 때란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를 그렇게 채찍질 하기 때문이란다." 여러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웃을 정말로 사랑하는 법은, 지식으로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표현이 우리 이웃에게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 주님의 말씀처럼, 사랑은 말이 필요없는 거예요. 그냥 가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30절에 보시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31절에 '마침' 아주 때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갑니다. 그 다음에 레위인도, 피하여 갔는데, 사마리아 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 상처를 치료해 주고, 짐승에 태워 주막에 데려다 주고, 주막 주인에게 돈까지 주며, 돌보아 주라고 합니다. 돈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아 주겠다는 말까지 하고 떠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것이 이웃을, 아니 교회 안에서 성도들끼리 가져야 할 첫 번째 사랑 실천의 원리인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실천하는 것이죠.

 

  1. 두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려면, 불쌍히 여기는 가슴을 가져야 합니다.

 

33절을 보시면, 사마리아 인이 나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당시에 사회적으로 대접 받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왜 대접을 받지 못했냐면,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이의 혼혈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싫어하고, 이방인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는, 어느 곳에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박쥐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쥐도 아니고, 새도 아니고, 그래서 낮에 다니는 것도 싫어 하고 밤에 다니는 것도 싫어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시면, 사랑을 받아야 할 이 사마리아인이 오히려 사랑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다면, 이 사마리아 사람은 아마도 정답을 말하지 못했을 거예요. '뭐라구요? 도대체 사랑이 뭡니까?' 라고 되물었을 거예요. 이렇게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확하게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는지 몰라요. 마치 호스피스 정규 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말이죠. 33절 보시면,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라고 기록합니다. 이 사람은 이웃의 아픔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라고 기록합니다. 가슴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34절 보시면, "가까이 가서", 이웃을 찾아가는 발이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그의 손도 역시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35절 보시면,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웃을 위해 주머니도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선 아는게 별로 없지만, 사랑을 실천할 가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배운게 없지만, 배운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사랑을 행하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려면, 다른거 필요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가슴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1. 세번째로,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다가가야 합니다.

 

34절을 보시면, "가까이 가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강도만난 사람에게 이 사마리아인은 다가갔습니다. 요한복음 4:9절을 보시면,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당시에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 취급했습니다.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강도만난 사람이 어떤 신분인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서, 돈 많은 유대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30절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는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강도는 아무나 만나지 않습니다. 겉모양이 돈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강도를 만납니다. 유대인 같은 사람들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다니실 때, 부자처럼 하고 다니지 마세요. 있어도, 없는 사람처럼. 없으면 없는 사람처럼 하고 다녀야 합니다. 특히 투산에서는요. 저번에 김전희 집사님이 지갑을 날치기 당할 뻔 했다고, 저의 아내에게 들었습니다. 우리 김전희 집사님은 돈이 있어 보이잖아요. 있어도 없는척 하라니까요. 저는 날치기 범들이 제쳐 놓은거 같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문가들이예요. 겉은 있어 보이지만, 돈 없는 거 용케 알고, 피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정황으로 봐서,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입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인은 그 사건을 목격하고 그냥 지나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상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괜히, 도와 주려다가, 누명을 쓸 수도 있고, 안 좋은 꼴을 겪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가갔다는 거예요.

 

때론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때론 피해 가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 그래도 다가 가시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중국에 있었던 일입니다. 버스 한대가 산등성이를 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버스 안에는 험악하게 생긴 두 건달이 한 여자를 희롱하고 있었어요. 버스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하나 끼어들어 말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급기야 두 건달은 차를 세우고는 이 여자를 겁탈하려고, 밖으로 끌어내렸습니다. 그 때 보다 못한 한 청년이 나서서 건달과 싸웁니다. 건달들은 청년을 무참히 찌르고 달아나버렸습니다. 이 여자가 헝크러진 머리를 추스리면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승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관심합니다. 운전사는 건달들에게 맞아서, 운전 할 수 없고, 이 여자가 운전석에 털썩 주저 앉습니다.

그때 피를 흘리며, 청년이 차에 타려하자, 여자가 소리칩니다. '왜 남에 일에 참견 하시는 겁니까?" 라고 하며 버스 문을 쾅,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 여자는 버스를 끌로 출발해 버렸습니다. 청년은 아픈 몸을 이끌고 시골길은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다, 처참한 사고현장을 목격하는데, 조금 전에 그 버스였습니다. 모두가 천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전원 사망했습니다. 이 여자가 고의로 버스 안에 모든 승객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누가 죄인입니까? 두 건달이 죄인입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체 한 승객들입니까? 이 여자는 오직 살만한 가치가 있는 이 청년을 억지로 떼어놓고는, 승객들 모두를 죽음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여러분 '소극적 죄' 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반대로 '적극적 죄' 가 있습니다. 두 건달은 적극적 죄인이고, 버스안에 승객들은 소극적 죄인들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사랑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으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25절 보시면,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의 주제는 '영생' 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였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까지, 천국에 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행하여야 한다고 말씀 하시고 있는 거예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반대로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다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피하여 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은 어떻게 되냐고요? 이 사람들 처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피하여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피하여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시간이 남아서 하는 자선사업이 아닙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의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저와 여러분들을 이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 피해가지 않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랑은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 우리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라 사랑을 실천하기 아주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지 않는 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우리교회 만큼은, 아는데 그치는 사랑이 아니라,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의 말씀대로 사랑을 행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