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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2월29일 수요찬양설교: 누가 십자가를 질 수 있나 - 막 15:16-27

by Peartree 2012. 12. 24.

누가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막 15:16-27

예루살렘 성안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베데스다 연못이 있습니다. 이 연못에서 서쪽으로 가면 예수님께서 처음 십자가를 지시고 출발하신 장소가 나옵니다. 이 장소가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는 '브라이도리온' 이라는 뜰입니다. 성지

순례 가면, 이 뜰에 작은 기념 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념 교회의 대문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다고 하죠. '너도 질 수 있느냐?' 그리고 문 안쪽으로 들어가면 또 이런 글이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너 정말로 질 수 있느냐?'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신적 있으십니까? 만약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면, '네 제가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습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마 선뜻 대답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고통과 고난의 십자가요. 눈물의 십자가요. 온 인류를 대신지는 십자가 이기에 누구도 감히 질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온 인류는 아니지만, 내게 맡겨준 영혼, 이웃이 될 수 있고, 가족이 될 수 있고, 성도가 될 수 있고,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잘 지고 가십니까? 어느날은 잘 지고 가는 것 같다가도, 성질만 건드리면, 내 생각과 다르고, 나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가만히 내려 놓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내 동댕이 치는 경우는 혹시 있지 않습니까?

 

저는 성지순례 가보지 않았지만,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곳에는 기념 장소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다 장사 속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지만,

그래도 그 장소에 가면 2000년 전의 존재했던 그 감동을 그대로 받고 돌아오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지신 장소라고 하며 여러

군데 표시해 놓은 곳이 있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장소,

또 예수님의 이마에 흐르는 핏방울 닦아 주던 여인, 전승에는 이 여인이 '베로니카' 라는 여인인데, 이 여인은 만났던 장소(기념품으로 손수건을 팔겠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제는 정말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지치셔서,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기 시작했다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이곳에 가면, 현장체험을 할 수 있게 해주는데, 예수님께서 지셨던 그 나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가는 체험이죠. 언젠가 한국의 연세 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님과 예전엔 영화배우 였지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임동진 목사님, 이 두분이 이 체험을 하는 것을 기독교 방송에서 촬영해서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걸으셨던 그 길을 간다는 것이 너무 감동이 되니까, 임동진 목사님의 우시는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이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감동을 경험합니까?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아들 예수의 순종이 함축되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내가 져야 할 그 십자가를 대신 지셨다는 생각에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달려야 할 사람은 난데, 주님이 내대신 달리셨다는 것에 우리는 고개를 들 수가 없죠. 그런데도,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피를 헛된 것으로 여기며, 주님을 욕하고, 미워한다면, 구제

받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무지하고, 교만하죠. 제발 이 사실을 믿으라고 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냥 두면 모두가 지옥에 갈 것 같으니까, 채찍으로 쳐서 부르시고, 질병을 줘서

부르시고, 경제적 환란을 통해 부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시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구레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어, 구레네 시몬이 지나가는 그 앞에 쓰러지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이 집요합니다.

그 고통의 순간에도 시몬 한 영혼을 더 살리려고 그 앞에 쓰러지신 것이지요.

 

21절 보시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우리가 여기 관심있게 보아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마침' 이라는 단어와 '지나가는데' 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는 'Passing by' 그냥 예수님이 죽던 말던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지나가는데, '마침' 주님께서 절묘한 타이밍으로 쓰려지셔서, 지나가던 시몬을 멈추게 한 것입니다. 때 마침 쓰러지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시몬을 그냥 지나가게 했다면 이 사람은 영원히 주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 될 수 밖에 없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이 시몬이란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셨는데,

그 십자가는 어떤 의미의 십자가였는지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첫째로, 십자가는 희생이 따릅니다.

 

오늘 본문 21절 다시 보시면,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 가는데"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몬의 이름이 구레네 시몬이 아닙니다. 구레네는 그가 사는 지역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이란 뜻입니다. 가룟유다도, 가룟 지방에 사는 유다. 나사렛 예수도, 나사렛이란 동네에 사는 예수란 뜻입니다. 구레네는 요즘 아프리카 북쪽 현재의 트리폴리(Tripoli)라 불리우는 지역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걸어서 오려면 일주일은 넘게 왔어야 하는 먼곳입니다.

그런데 이 시몬이란 사람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예수님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사람이냐면, 그의 눈 앞에서 한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로 향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즈니스 일로 지나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먼 길을 여행해서 예루살렘에 올 정도면 어떤 중요한 일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자의든 타의든 어째든 그는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을 중단 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일단 자기 일을 내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일단 내려

놓는일, 이것을 우리는 희생이라고 하죠.

 

어머니의 희생 같은 것이죠. 자녀들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먹고 싶은 것 먹지 못하고, 입고 싶은 것 입지 못한것. 이것을

우리는 어머니의 희생이라고 하죠.

 

이런 이야기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논에서 추수를 하던 한 농부가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먼 바다를 내려다보니 바닷물이 순식간에 멀리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곧 해일 (쓰나미)이 몰려 올 징조였습니다. 그리고 언덕 밑 낮은 지대에서 이웃 사람들은 정신 없이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농부는 곧 해일이 올 것이라고 소리쳤으나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 농부는 궁리 끝에 자신의 볏단을 모아 불을 붙이고는 창고

처마 밑에 달려있는 종을 힘껏 쳐댔습니다. 그제야 사람들은 언덕 쪽을 바라보았고 불을 끄려고 모두 올라왔습니다. 그들이 올라오자마자 그곳엔 큰 파도가 몰려와 순식간에 물바다를 이루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무사할 수 있었으나

대신 그 농부는 1년 동안 땀흘려 농사지은 자신의 벼가 모두 타버리는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본다면 나의 작은 희생으로 이웃에게 큰 유익을 주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희생은 누군가 하나는 버려져야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특히 십자가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 자체가 희생인 것입니다.

 

  1. 두번째로, 십자가는 사랑과 용서입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시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내키지도 않는 일을 강제로 해야만 했던, 시몬은 처음에는 불평과 원망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찼을 것입니다. 왜 많고 많은 사람중에 하필이면 나입니까?

 

그러나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간 사실로 미루어보아, 그는

원망이나 불평보다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었을 것이라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자기 스스로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대체, 저 예수라는 사람은 누구길래, 저리도 고통을 당하면서, 이길을 가는 것인가? 골고다에 이르러서는, 도대체, 자기를 조롱하는 저들을 향하여 " 하나님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라고 말하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이 위대한 사랑과 용서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러한 깨달음.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알 수 가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사랑과 용서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레미제라블' 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쟝발장이라는 주인공이 나오고 탈옥수인 쟝발장을 일생 동안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지펠 형사가 나옵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납니다. 이 과정에서 쟝발장을 지지하던

청년들이 지펠 형사를 붙잡아 죽이려고 감옥에 가둡니다. 그 때 쟝발장은 지펠형사를 석방하여 자유인이 되게 해 주죠. 풀려난 지펠형사는 쟝발장을 찾아가 "당신은 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일텐데 왜 살려 주는 것입니까?" 묻습니다.
그때 장발장이 이렇게 말하죠.
"
이 세상에는 넓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땅보다 바다가 더 넓고, 하늘은
그보다 더 넓습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더 넓은 것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그러자 차갑고 냉혹한 지펠형사의 얼굴에게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죠.

 

이렇게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게 만든 주님은 시몬에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지, 진정한 용서가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도 질 수 있느냐?' 물으시고 계십니다. 2000년 전 제자들에게 "나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물으신 것 처럼 말입니다.

 

세상의 대 부분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지 싦어하죠. 오죽하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조차, 이 십자가 두고 다 도망쳤겠습니까? 열두 제자가 아니면 안됩니까? 아니죠. 열두 제자가 없으면, 주님은 지나가던 구레네 사람 시몬, 피부가 검은 아프리가 사람이죠, 이 시몬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십자가를 한 번 져볼래? 하신다면, 네 제가 한번 져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어느쪽 강도가 되기 원하니 묻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27절 보시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어느쪽에 서기 원하십니까? 어느쪽에 구원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원받는 쪽에 서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