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했는가?
빌립보서 3:1-21
1982년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불의 전차' 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과 실제 인물들을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1924년 제 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던 영국의 두 육상 선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헤롤드 아브라함과 에릭 리들. 이 두 선수는 그 올림픽에서 둘 다 금메달을 받게 됩니다. 특별히, 에릭 리들은 금 메달을 따던 당시에 중국 선교사로 헌신하였고, 올림픽을 마친 후 평생을 중국 선교를 위해서 헌신했던, 그래서 선교계에서 아주 귀감을 살만한 훌륭한 분입니다. 이 두 사람 모두 금메달을 따지만, 이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어느날 에릭 리들이 육상 훈련에 열심히 몰두하다가 그만 약속했던 선교 위원회 모임에 지각하고 맙니다. 너무 달리기에 몰두하고 있는 이 오빠가 맘에
안 들어서 동생 제니가 불평을 하니까, 리들은 동생을 데리고 스코들랜드 평원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리들은 자기가 왜 달리기를 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위해 나를 창조 하셨다. 중국을 위해 선교 하라는
목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게 빨리 달릴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내가 빨리 달릴 때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진다. 그래서 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이기려는 것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려는 목적이다." 이렇게 동생에게 설명합니다.
잠시 후에 또 다른 선수인 아브라함 선수가 시합을 한 시간 앞둔 순간에 초조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친구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 내 나이 24살, 나는 지난 24년 동안 만족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평생 뭔가를 열심히 추구하며
살고 있지만, 도대체 내가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두렵기만 하다. 나는 미친듯이 뛰고 있지만, 도대체 뭘 위해서란 말인가" 그리고 머리를 쥐고 흔드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 두 사람은 둘 다 금메달 따지만, 그러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달린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이 왜 달리는지, 목적도 의미도 모르는체 달리지만, 또 한 사람은 자신이 왜 달리는지, 분명히 알고, 만족을 누리며 달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요. 인생을 어떻게 달려야 하는가? 하는 질문보다, 무엇을 위해 달려야
하는가? 왜 달려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먼저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사도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서 간단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 푯대는 14절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푯대'는 무엇입니까? 한번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지금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무엇을 위해 달려가는지 말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빌립보서 3장은 빌빕보서의 핵심이 되는 장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다시 점검하고 있는 장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달려왔으며,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 중간 점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난감은 조립하다 잘못되면 풀고, 처음부터 다시 조립하면 됩니다. 그러나 인생은 다시 조립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시작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지금 중간 점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있으며,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중간 점검해야 하는지 오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5절과 6절을 보시면, 바울이 자신의 백 그라운드를 죽 열거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시면, 자랑하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집안 출신이고, 학벌이 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서 죽 열거한 것입니다.
5절에 보시면, 베냐민 지파라고 말하고 있죠?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누구입니까? 사울왕이죠. 베냐민지파였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자신이 초대 왕을 지낸 가문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이씨 성을 가진 사람이고, 이씨 성 중에서 전주이씨다". 라는 것이죠.
저희 어머님이 전주이씨성이신데, 저희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다른 때는 저희
어머니에게 큰소리 치시고, 용감하셨는데, 출신 성분만 들먹이면, 저희 아버지가 아무 말도 못하셨습니다. 솔직히 배씨가 그렇게 썩 내 세울 만한 가문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제가 제 아내와 결혼한 후로, 저희 아내가 가끔, 한씨가 양반이라나
뭐라나, 그럽니다. 그럴 때 마다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납니다. 우리 아버지도
그때 마음이 이렇게 아프셨겠구나! 어제도 제 아내와 이런 얘기를 했는데, 예전 같으면 감히 서로 만날 수가 없는 사이라나 뭐라나. 당신은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나..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하는 말이 바로 이 말입니다. 가문 좋고, 배경 좋고, 살아온
인생도 반듯하다고 말하는 것이죠. 책잡을 것이 하나도 없고 완벽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7절 보십시요.
'그러나' 이 '그러나' 라는 접속사는 앞에 있는 내용의 반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앞에 열거한 이 자랑스러운 조건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기고, 8절 배설물로 여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해' 라고 말하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방해가 된다는 뜻입니다. 돈이 귀한 것이지만 돈 때문에 예수 믿는데 장애가 된다면, 돈은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것이 귀하고, 유익한 것이지만, 많이 배웠다고 하는 학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장애가 되면 그것은 해가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배설물은 무엇입니까? 배설물은 버리는 것입니다. 배설물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예요. 여러분들 아침에도 배설물을 버리고 오셨을 것입니다. 저녁에도 배설물을 버릴것입니다. 배설물의 특징은 아깝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들, 이것들을 주님과 비교해 보니까, 아무것도 아닌, 불필요한 것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울이 가지고 있는 대단한 백그라운드가 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배설물도 아니죠. 그러나 사도바울은 '여기겠다' 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의 그 굉장한 배경이 배설물은 아니지만 배설물 처럼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가치관의 변화' (perspective) 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과거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내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가장 귀한 것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모, 시간, 자녀, 건강, 돈.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보는 눈이 바뀐 것입니다. 가치관이 달라진 것이죠. 진정한 값어치를 만나고 나니까, 그 보다 못한 것들은 헛된 것으로 보여진 것이죠.
그러면서 바울이 주님을 아는 것이 최고고 고상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붙잡아야 할 진정한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안에 주님만 살아 역사하신다면, 그 나머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으로만 충분하며, 그 나머지는 해로 여기며, 배설물로 여기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죠.
혹시 우리가 추구하는 교회 가치관이 건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건물이 크고 화려하고 편리한 교회. 너무나 좋죠. 그러나 그 화려한 건물에 주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면, 그리고 작고 누추한 건물이지만 그곳에 주님이 계신다면, 우리는 당연히 작고 누추한 곳이 더 귀하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곳이 바로 교회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럼 건물이 아니면, 숫자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보다 열 배나 많은 숫자가 모이면, 그 교회는 대단한 교회고, 숫자가 적으면 아닙니까? 우리보다 훨씬 적은 수가 모인다고 한다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원수. 혹시 우리의 교회 가치관이 이것으로 자리잡고 있지는 않습니까?
진정한 교회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정말 우리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주님을 높이며, 그 주님을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추구해야할 가장 소중한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타락한 시대마다 영락없이 드러났던 것은 그리스도보다는
세속적인 가치를 가진 것들을 존귀하게 여겼던 시대였습니다. 중세시대를 우리는 타락한 시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너무 타락해서 종교개혁을 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에 교황이 이노센트 2세였습니다. 당시의 교황이
곧 하나님이었습니다. 교황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했던 시대였습니다. 얼마나 교황의 권위가 강했냐면, 나라의 왕들이 교황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교황은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경건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교황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황은 토마스에게 교회에 엄청난 돈이 쌓이는 것을 보여주며, "이보게 토마스, 앞으로 교회는 '내게 금과 은은 없거니와'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겠네. 안그런가' 그때 토마스는 교황에게 "그렇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금과 은이 없다고 말을 할 필요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사렛 예수도 안 계신
것 같으니, 일어나 걸어라' 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된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2000년 교회사는 계속해서 이 싸움을 해 온 것 같습니다. 돈인가, 예수인가. 권력인가, 하나님인가,… 우리 꿈의 교회 가치관은 무엇을 붙잡아야 하겠습니까? 건물도 아니요, 인원수도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시길 부탁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붙잡은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붙잡기 위해서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 12, 13, 14절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말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아직 멀었다' 이말입니다. 주를 위해 한 것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좆아 가노라" 그것이 무엇이지, 그것을 잡으려고 좆아 간다고 말하죠?
13절을 보시면,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좆아 가죠. 오로지 한가지 일에만 집중하고 달려가겠다 말하며, 과거에 있었던 일은 잊어 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과거에 화려했던 경력, 자랑스러운 출신 배경, 학벌, 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던 부끄러운 일들도 다 잊어 버리고 오직 한가지 일에 달려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14절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기서 '상' 이라는 것에 너무 액센트를 주지 마십시요. 바울의 목표는 상이
아니었습니다. 부르심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대로 살다보면, 상은 보너스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찬들은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분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업적을 쌓은 것이 부르심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이유는 어떤 큰 일을 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예수님이 드러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주앞에 서는 그 날에,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내 놓을 것도 없습니다. 작은예수로 변해있는 여러분 자신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그냥 Here I Am.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 잘 싸우고 달려와 지금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 선교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는 선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교사가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 각자가 선교사가 될 때, 그때야 비로서,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바른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가 뭘 이룬다고 착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면 그것으로 주님은 충분히 만족해 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 그 부름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다 보면 바울이
변했듯이, 저와 여러분들도 자신의 변한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을 아십니까? 대통령 시절 보다도 대통령이 끝난 다음에 더 존경 받는 인물입니다. 그가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했을 때, 그는 미 해군 원자력 부대 책임자였던, 하이만 릭코버 제독이라는 분 밑에서 근무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제독이 미 군인 역사상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 분이 면담을 하면 두 시간 정도 면담을 했다고 합니다.
진땀을 흘리는 면담 끝에 그가 카터 대통령께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해군 사관학교에서 몇등했나?" 그때 카터 대통령은 자신만만 하게 829명중에 59등 했습니다. 참, 잘했다고 기대하고 있는 카터에게 릭코버 제독은 다시 질문을 합니다. "Did you Do your Best?" "자네는 최선을 다했는가? 그때 카터는 Yes, Sir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곧바로 질문자의 의도를 알고, 대답을 고쳤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더니, 평생 카터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Why not the Best?'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훗날 카터가 자기 자서전의 제목을 "why not the Best?' 이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느냐?
그때에 저와 여러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를 부르셔서 최선을 다해서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왔고, 지금 주님 앞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실 수만 있다면, 주님께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을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지어다 라고 박수를 치시며 맞아
주실 것입니다.
'설교자의 창고 > 비전나리의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년 12월 5일 주일예배설교: 상처 입은 치유자 - 시51: 1 ~ 19 (0) | 2012.12.24 |
---|---|
2010년 12월 4일 새벽예배설교: 예수의 일꾼 - 롬 15:14-33 (0) | 2012.12.24 |
2010년 11월24일 수요찬양설교: 고난도 유익이라 - 막 11:1-10 (0) | 2012.12.24 |
2010년 11월 27일 새벽예배 교회 안에서 의견이 다를 때- 롬 24:13-20 (0) | 2012.12.24 |
2010년 11월 21일 추수감사절예배설교:하박국 3장 (0) | 2012.12.24 |
2010년 11월 20일 새벽예배 설교: 주를 위하여-롬14:7-9 (0) | 2012.12.24 |
2010년 11월 17일 수요찬양설교: 보기를 원하나이다 - 막 10 : 46-52 (0) | 2012.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