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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1월24일 수요찬양설교: 고난도 유익이라 - 막 11:1-10

by Peartree 2012. 12. 24.

고난도 유익이라

막 11:1-10

 

유럽에 가시면 유명한 경매장이 있다고 합니다. 그 경매장은 유명한 사람이 사용한 물건들만 취급하는 경매장입니다. 나폴레옹이 썼던 숫가락, 빗, 잠옷까지 등장합니다. 물론 고가에 팔리고 있습니다. 누가 사용했는냐에 따라서 그 물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가 신었던 구두라면 얼마에 팔리겠습니까? 값이 없습니다. Good Well

에나 갖다 주어야 합니다. 만약에 이 경매장에서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어떤

물건이 있다면, 그 물건의 값은 얼마나 나갈 것 같습니까? 아마 값을 매기기

불가능 할 정도로 최고가에 경매 될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성당에서 보관하고 있는 토리노 수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장사 지낼 때 사용한 수의라고 해서, 카톨릭에서 성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수의다

아니다, 말이 많지만,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예수님의

유품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으셨던 신발, 예수님께서 목수일 하실 대 사용 하셨던 망치, 톱,

대패 이런 것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것들은 남기셨다고 가정해 보세요.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는 관심 없고, 온통 그런 물건을

숭배하며 호들갑을 떨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발견 되었다거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입으셨던 세마포가 지금까지 있다면, 사람들을 그것들을 섬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용한 것이 하나 나옵니다. 이것은 물건이

아니고 나귀새끼였습니다. 오늘 본문 1절 보시면, 베다니에서, 11절의 예루살렘까지 2마일 정도를 예수님을 등에 없고, 묵묵히 그 길을 간 짐승입니다. 이 나귀를 예수님께서 사용하셨기에, 값으로 따진다면 얼마쯤 가겠습니까? 물론 값으로 환산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지금 예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것 아십니까?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엄청난 몸값을 가지신 귀하신 분들입니다.

이번 중국의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야구가 금메달을 땄는데, 일등공신이 추신수라는 타자입니다. 몸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고 합니다. 일년에 수백억정도. 그러나 우리의 몸값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비싸서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옆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참 비싼분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대적인 왕의 환영식이 있는 날입니다. 이날의 주인공은

물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주목을 받은 스타가 있습니다. 바로 나귀새끼입니다. 본래 과거 역사를 보시면, 전쟁에 승리한 장군이나, 황제는, 잘 생긴 군마를 타고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메시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한 지도자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지도자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입성하시고 있는데, 나귀새끼는 어떠했겠습니까? 예수님과는 반대로, 나귀에게 있어서 이 날을 생애 최고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메시아를 태우고 들어오는데, 군중들의 환호성을 지르죠, 박수 갈채를 보내죠, 자신들이 입고 있던 겉옷을 길에 펴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광을 하죠. 그런 그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이 나귀 새끼는 어떠한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 예수님께 쓰임 받는 것이 나쁜 것 만은 아니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힘들다라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 쓰임 받는 나귀새끼를 이야기를 통하여, 주님께 쓰임 받고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어떠한 교훈을 주고 싶어 하는지 말씀에서 찾아보고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첫째로,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다는 알려주시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나귀새끼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그 나귀새끼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2절 보시면, 아무도 타보지 않은 그 나귀새끼, 매여 있었던 그 나귀새끼, 4절 보시면,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던 나귀새끼를 주님은 선택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정확하게 그 나귀새끼에 대해서 어떤 나귀인지, 어디에 매여 있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나귀새끼를 3절에, '내가 쓰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나귀가 예수님께 선택 될 만한 어떤 조건을 갖추어서 선택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선택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귀를 3마일정도 거리를 타고 입성하시는데,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예수님도 힘드셨고, 나귀도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튼튼한 말 같으면 편안하게 가실텐데, 휘청거리며 가는 어린 내귀새끼……… 그래도 주님은 그 나귀를 쓰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주님께서 우리들을 지금 사용하시고 계신데, 얼마나 힘이 드시겠습니까? 저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목사인데, 종은 주인이 시키는데로 순종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께 100% 순종하지 않으니, 주님께서 저를 사용하시는데, 참 힘드시겠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떤 때는 설교 원고를 마무리 하고, 이 설교가 정말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말씀인지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충성된 종이 되어 주인의 말을 그대로 대변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때에는 이 말씀은

우리 침례교 교리에 맞지 않아서 안돼, 어떤 때는 이 설교는 성도 중에 상처 받을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안돼, 이 설교는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 안돼.

이리 빼고 저리 빼고. 정작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전하지 못하는

그런 종은 아닌지. 그래서 사도바울도 이런 고민에 빠졌던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은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선택하신 이유는, 오늘 이 나귀처럼, 세상의 많은

환호성과 영광에 눈을 돌리지 않고 주인의 영광에만 초점을 맞추어, 주님께서 잘 쓰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두번째는, 주님께 쓰임 받는다는 것은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날 이 어린 나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2절 보시면, 한번도 등에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나귀였습니다.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날은 이 나귀에게 있어서, 생애 최고의 고난의 날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성지순례 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비탈길과 언덕, 그리고 내리막 길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나귀새끼가 이 험한 여정을 예수님을 태운 채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간 것은 참으로 신통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사실은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매일 기쁘고 감사한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삶 가운데 고난이 오면, 이게 아닌데, 하며 등에 태웠던 주님을 내리게 한 후, 주님을 뒤고 한 채 도망가 버리죠.

그러기에 천국 가는 길은 좁은길, 좁은문이라고 제가 누차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가사가 있습니다. "영광의 길 너 걷기 전에, 고난의 길 너 걸어라"

고난을 통과한 후 에 영광이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은 후에

부활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신앙 생활하기 아주 편합니다.' 이런 말은 주님께서 듣기 싫어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성도의 영광의 길을 빼앗는 것입니다. 주님도, 사도바울도 고난의 길을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이관대 그길을 거부할 수 있습니까?

 

제가 몇 달전에 케냐의 데이빗 오우어 목사님이 한국에 관하여 보신 환상에 대해서 말씀 드린적 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한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전쟁이 있을 거라고요. 엇그제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150여발의 포탄 공격을 받아, 군이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이 많이 다쳤습니다. 6.25 한국전 이후, 한국 본토에 폭탄은 떨어진 건 처음이라고 합니다.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 문제를 우리 크리스천 들은 정치적으로 풀어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대부분의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의 말은 하나 같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가, 고난의 길을 택하지 않고, 쉽고 편한 영광의 길을 택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질을 추구하며, 성적으로 타락하고, 돈이면, 다 된다라는 사상이 교회에까지 들어와, 성도들이 고난 없이, 기도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편안길만 걸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한국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더 큰 전쟁이 일어난다고 깨어있는 사람들은 한 목소리로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넓은 영광의 길만 찾지 말고, 좁고 협착한 고난의 길로 가라고 말입니다.

 

  1. 세번째는, 주님께 쓰임받는 것은, 두번째와는 반대로, 고난의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이 고난만 있다면, 얼마나 그 길이 힘이 들겠습니까?

오늘 이 어린 나귀가 등에 예수님을 태우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난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이 고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먼저는 주님을 등에 태우는 영광을 맛 보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8절

보시면,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 가지를 길에 펴며" 나귀가 어디서 이런 대접을 받을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 이들이 예수님께 한 것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함께 영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9절 보시면, 사람들이 '호산나' 하며 환호성을 지르며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나귀는 힘이 들었지만, 얼마나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그 고난이 있지만, 영광의 길을 갔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요 로마서 8장 17-1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18절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고난은 헬라어로 '스티그마' 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갈 6:17절에 바울이 "내가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말씀하였듯이, 예수님 때문에 매맞고, 찢긴 몸에난 상처를 바울은 고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즉 영어로 하면 Scar 였습니다. 그러나 이 Scar 는 훗날에, 주님 만나는 그날에 영광의 Star 같이, 별과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참전 용사들의 고국 귀한 환영 펴레이드가 있었습니다. 런던의 중심가에 많은 환영 인파가 몰려들고, 영국의 상하원

의원들 그리고 여왕폐하가 자리를 잡자,

육군, 해국, 공군, 해병대 이렇게 한 부대 한 부대가 거리를 지날 때 사람들은 우렁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부대가 중앙으로 들어서자 여왕을 포함한 모든 시민들이 기립하여 끝나지 않는 박수와 경의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상이용사들, 전쟁에서 부상당한 군인들이었습니다. 팔을 일고, 다리를 읽고, 어떤 이들은 들것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그날의 영웅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처가 곧 그들의 훈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렇게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먼저간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릴 것이며, 주님은 우리에게 줄 면류관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날은 이 땅에서 우리의 고난으로 결정되어 질 것입니다.

고난 없는 교회는 사단의 속임수 입니다. 주님도, 신앙의 선배들도 이 길을 갔습니다. 우리도 가야 합니다. 그런 다음엔 영광스러운 날이 저와 여러분들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