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를 원하나이다
막 10 : 46-52
6.25 전쟁이 한창 때 일입니다. 포탄이 날아오는 최전선에서 미국 군목 한
사람이 전쟁터를 뛰어 다니며 불안과 초조 속에 떨고 있는 병사들을 위해서
기도 해 주면서 뛰어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 젊은 병사에게 이 군목이 기도하기 앞서서 기도 제목이 있냐고, 질문했습니다. 이 때 한 흑인병사가 말한 얘기가 아주 유명한 스토리가 되었습니다.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질문에 이 흑인병사는 군목을 쳐다보면서 "저에게 내일을 주십시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Give me tomorrow".
시각과 청각 장애인으로 인생을 살다간 헬렌 켈러 여사에게 어느 방문객이
와서는 앞을 볼 수 없으니 아무래도 답답하시겠네요. 하자 헬렌 켈러는 물론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지요. 그러나 두 눈을 가지고 내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보다 훨씬 낫지요.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소경에는 두 가지 소경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소경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디매오나 헬렌켈러 같은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는, 영적인 소경도 있다고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죠.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부르셔서 그를 백성에게 보내시면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너를 보내노라' 말씀하시며 보내시죠. 이런 사람들,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미래가 보이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고,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이죠. 하나님이 보실 때는 육체적 소경보다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한 소경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고, 결국, 예수님을 만난 후 구구절절한 그의 고백을
예수님께 쏟아냅니다. "선생님이여 제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는 결국
눈을 뜨게 되죠. 그렇다면 오늘 이 소경의 치유의 조건은 무엇이었겠습니까? 본문에서 몇 가지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의 이름이 바디매오입니다. 성경은 그를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 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 앞에 '바'자 한자가 더 붙었습니다. 히브리 말로 '바'는 아들이란 뜻이예요. 이름이 너무 단순하지 않습니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하류층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던 것 같은데, 지금 미국에서는 상류층이 이렇게 이름을 부르는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 총장님의 성함이 Jerry falwell 이었는데, 3년전에 돌아가셨죠. 그래서 그 아들이 총장이 되었는데, 이름이 Jerry falwell Jr 입니다. 아버지 이름 뒤에 주니어만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46절 보시면, 이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 여리고입니다. 성지순례 갔다온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여리고라는 도시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다른곳은 사막이지만 여리고 만큼은 수목이 우거지고, 각종 나무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여리고란 말의 뜻은 냄새 또는 향기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시를 가리켜 장미꽃이 많아 장미의 도시라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아름다운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도무지 볼 수
없었던 바디매오, 그의 인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게다가 오늘 본문은 그가 거지였다고 말합니다. 소경 거지 바디매오. 고대 사회에서는 소경은 의례히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자기 삶을 헤쳐나갈 생존 능력이 없기에 소경은 자동적으로 거지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소경 뿐만이 아닙니다. 앉은뱅이도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장애인들은 거지가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런 불쌍한 처지에 있었던 바디매오,
그러나 그에게 장점이 있었다면,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의 첫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이 불쌍한 처지에 있으면서도 불쌍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정말 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47절 보시면, 이 바디매오가 뭐라고 소리칩니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사람은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숨기지 않고, 구해달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이와 반대인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신은 고칠 것이 없다고 하고, 영적 장님에도 불구하고, 다 안다고 교만을 떨고 있는 사람은, 부족이 것이 없다고 해서 자신을 구해줄 구원자를 찾지 않고 있죠.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며, 나는 불쌍한 존재이며, 그래서 주님이 필요하다고 고백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1961년 히틀러 나치의 잔당들에 대한 재판이 열렸을 때, 히틀러의 참모였던 아돌프 아히만의 재판 증인으로 디무르라는 사람이 소환이 되었습니다. 재판관은 디무르에게 옆에 앉아 있는 아히만을 가리키면서 저 사람을 똑똑히 봐 주십시오. 저 사람이 아히만이 맞습니까? 좀더 다가가셔서 똑바로 보시지요. 디무르는 한참 아히만을 쳐다보다가 졸도를 해 버렸어요. 그냥 그 자리에서 졸도를 해 버린것입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깨어났습니다.
깨어난 그에게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졸도하셨습니까? 재판관이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러면 증오심 때문에,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을 이기지 못하고 졸도하셨습니까? 그것도 아니 올시다. 그러면 왜 그랬습니까?
이 때 이 사람의 대답이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그 사람을 봤을 때 그 사람이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저는 놀란것입니다.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저렇게 평범한 사람이 나의 동료들을 어떻게 저 비참한 가스실로 몰라내도록 명령하고 집행한 사람일수가 있었겠는가? 그 사실앞에 놀란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런 충격적인 말을 했습니다. 나도 아히만이 될 수 있다. 내 속에도 광기가 있고 미움이 있고 증오가 있고 살인의 광기가 있는 죄인의 모습이 내 안에도 충분이 있을 수 있다.
내 속에 있는 죄성과 부패성을 발견하다면, 바울의 고백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 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 에서 나를 구원해 내랴. 이 고백이 나옵니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는 사람만이 예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그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는 것, 이것이 치유함을 받을 수 있는 첫 번째 스탭입니다.
- 두번째는, 치유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치유자임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47절 보시면, 사람들이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이라 소개합니까?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합니다. 당시에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좋은 표현은 아니었습니다. 경멸과 편견이 섞인 표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수 있느냐 말할 정도로 나사렛 지방이 시골이라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대제사장들이 군인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군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니까, 예수님께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라고 물으시죠, 그때, 군인들이 "나사렛 예수라" 말고 말하죠. 이때 사용한
나사렛 예수는 경멸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4장 5절에도, 더둘로가 바울을 고소할 때도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바디매오는 사람들로부터 나사렛 예수라고 들었는데, 이 사람의 입에서는 예수님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48절에 "다윗의 자손이여" 즉, 예수님을 메시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평가하는 나사렛 예수란 표현을, 바로 잡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이 바디매오는 그 전에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소경이었기 때문에 귀는 상당히 발달 했을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에 귀에 많이 의존해서 살았기 때문이죠. 이런 바디매오의 귀에 이런 소문이 들렸겠죠.
예수를 만난 사람마다 인생이 바뀌였다. 각종 병자가 치유함을 받고, 귀신이 떠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등등…… 이런 소문을 들으면서, 분명 바디매오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 그분은 메시야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사야 35장 5절에 보시면 메시야의 나라가 열리기 시작할 때,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다." 구약 성경이 말씀하지 않았는가? 분명 메시야일 것이다.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치유자 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 세번째는, 장애물을 극복하는 인내심을 가졌습니다.
본문의 소경 바디매오는 단 한번의 부르짖음으로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이 아닙니다. 47절을 보시면,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까, 48절에, "많은 사람이 꾸짖어 가로되 잠잠하라" 어디서 거지가 고함을 치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 향한 마음이 확고했습니다. 48절에 또 예수님을 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런데 어떻게 부릅니까? "더욱 심히" ……예수님께서 들으실 때까지 더 큰소리로,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불렀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도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구요'.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단 한번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꼭 응답 하실 거다라는 약속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것이요. 여기서 구하라는 말은 한번 구하라는 표현이 아니고 계속해서 구하는 표현입니다. 계속해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판기에 코인을 넣으면 착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실 때에도 '항상 기도하고, 혹시 들어주지 않더라도 낙망치 말고 계속해서 엎드려야 한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소경 거지 마디매오가 이렇게 예수님께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바디매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중요한 순간입니다.
구하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요. 그는 집을 구할 수도 있었고, 돈을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중요한 것, 이 절실한 타이밍에 그는 자기 인생의 가장 절실한 근본적인 것을 구하기로 결심합니다. 뭘 구했습니까?
"보기를 원하 나이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여러 분, 우리가 찬송가 책을 쭉 들쳐보면 화니 크로스비라 는 이름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찬송의 대부분은 이 여인이 작사한 찬송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크로스비는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시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아주 뛰어난 달란트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소녀였지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무력해졌고 그의 달란트는 감추어져 있었고,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세월을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나이가 30세가 되었을 때, 어느 날 뉴욕의 어떤 전도집회에 참석 했다가 찬송가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 찬송가가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몇 번씩 반복되는 이 찬양을 듣다 찬양의 가사가 이 여인의 가슴을 때리기 시작 했습니다. 웬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보다 더한 기쁜 소식 어디 있어요? 주님 날 위해 돌아가셨다고요, 이것이 믿어 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 다. 그리고 이 찬송 마지막 절에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주님 나를 쓰실 수가 있다구요? 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때 문득 너는, 시를 쓸 수 있 는 능력이 있잖아.
그 순간 눈이 열렸습니다. 바대매오 처럼 눈이 열린 것입니다. 육적인 눈 말고요,영적인 눈이 열린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위해서 죽으 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믿어지기 시작했습니 다. 영적인 눈이 열리고 구원을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자 마자 찬송을 작사하기 시작합니 다. 이 여인은 95세까지 살면서 무려 8000곡의 찬송가를 작사합니 다. 8000곡.
그의 인생은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미래가 열린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 이 열린 것입니다.
혹시 우리중에 영적인 소경은 없는지, 한번 자기 자신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영적인 소경입니다. 충성하고 헌신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그것도 영적인 소경.
우리 삶속에서 이렇게 기도하십시요.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눈이 열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인생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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