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쓴물을 경험할 때
출 15: 22-27
"고통이 없는 날을 기대하지 마라, 그날이 온다면 그 땐 당신은 이미 죽었다.
테네시 윌리암스, 미국의 극작가. 우리의 인생은 고통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소위 인생이 잘 나가고,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때, 우리는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 가운데,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노래와 춤을 그치게 만드는 순간이, 우리 삶에 엄습해 올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 다음에 너무 기쁜 나머지, 노래를 부릅니다.
20절에도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추니, 모든 여인들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춥니다.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춤을 추며,
노래할 때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축복을 경험한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오는 이집트의 군대를 홍해 바다에 수장시키시는 하나님의 기적의 현장을 경험한 다음 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 순간 만큼은
정말 최고로 잘 나갈 때였습니다. 그러나 이 노래와 춤이 그렇게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늘 기쁘고 감사한 일들만 일어 났으면 좋겠는데, 어느 순간에 이 기쁘고 감사한 일들이 눈물로 바뀌어 질 때가 많이 있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었던, 본문 24절을 보시면, "백성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이제 한 순간의 노래가 그치고 그 속에서 탄식과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하고, 리더를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고통의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22절 보시면, 그들이 홍해를 건너, 수르라는 광야를 사흘길을 행하였으나 물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죠. 마실 물이 없던 것입니다. 사막에서 사흘동안 마실물이 없이 걸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심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23절에 보시면, 마라라는 지역에 이르러서 오와시스를 발견했는데, 그 물이
못 먹는 물이었습니다. 쓴 물이었습니다. 썩은 물이었죠. 인생이 이젠 완전히 좌절되고 낙심되는 순간이죠.
우리 인생가운데 이러한 좌절과 고통의 순간을 경험한 순간이 있으십니까?
아마도 우리 모두는 인생에서 최소한 한 두번쯤 이러한 순간들을 다 맛보셧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 이순간에도 이런 인생의 마라의 쓴물 같은 좌절을 경험하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고통과 고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이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가 있다면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고통을 당했을 때, 그 고통 보다도 우리를 더 괴롭히는 것이 있다면 내가 왜 이 고통을 다하고 있는지, 고통의 의미를 모르고 고통을 당할 때 그 때가 훨씬 더 괴롭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 고통의 의미를 안다면 견딜 수 있습니다.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군대생활 할 때, 제가 잘 못해서 고참들에게 얻어 맞으면, 당연히 맞아야 하는 거라 생각하고 맞아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아야 할 아무 이유도 없이, 곤히 잠자는 사람을 깨워 밖으로 불러내어 이유 없이 마구 때릴 때리고는, 아무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 잠자라고 그럴 때, 이럴 때 정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천장만 보고 눈물만 주르르 흘리는 거죠. 이럴 때는 정말 많이 힘이 듭니다.
그래서 고통중에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쉽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더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다가오는 것입니까? 오늘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말씀 속에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 첫째로,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시험하시기 때문에.
본문25절 보시면, "그들을 시험 하실쌔" 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이런 반문을 하실 분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아무도 시험하지 않는다' 고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릴 시험하신다는 것입니까? 이 말씀이 야고보서 1장 13절에 기록되어 있죠. 여기서 말씀하는 시험은 Temptation 입니다. 이 시험은 마귀가 우를 시험할 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25절에 사용한 단어는 Test 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시험을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어렸을 때,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가슴이 설레이며 시험이 기다려진 분들 계십니까? 내 인생에서 시험처럼 기분좋은 일은 없다. 이런분 계십니까? 아마 한 분도 안계실 것입니다. 아무도 시험을 엔조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시험을 통해서, 내 실력을 평가 받고,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잘 통과하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로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시험을 허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사흘전에 노래하며, 춤추고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했고, 그들은 그렇게 만들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난 지금 마라의 쓴물을 경험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지 Test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래도 너희들이 여전히 나에게 감사할 수 있니?
하나님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고통 중에라도,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습니까?
중세기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또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가 축복을 경험 했기 때문에, 내가 신앙을 가지는 것이 나에게 유리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출발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생활이 이렇게 출발하죠.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 속에 들어 갔더니 그 하나님이 너무 좋고, 그 하나님을 조건 없이 사랑하게 된다는 그 수준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처음에 만났을 때는, 조건이 없을 수 없습니다. 저 남자를 만나면, 내 인생이 행복해 지겠다라는 판단 때문에 상대방을 배우자로 선택하고
결혼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어떻습니까? 살다 보니까, 예전에 그 조건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인격적인 사랑이 깊어지는 것이죠. 그래서 살다 보면, 무조건 좋은 것입니다. 밥 안해줘도 좋은 것입니다. 매일 잔소리해도 좋아요. 예전의 조건들을 뛰어넘은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 두번째는,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감사를 경험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25절 다시보시면, 지금 이들이 마라의 쓴물을 맛보고 나서 하나님께 부르짖어기도합니다. 그랬더니,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단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아마 아무 물이었어도 무척 달게 느꼈을 것입니다. 사흘동안 물 한방을 마시지 못했죠, 그전에 쓴 물도 맛보았지요, 마실 수만 있는 물이 있다는 것으로, 그들은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에게 더 많은 감사의 이유들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C.S. 루이스의 작품중에, 새도우랜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 혼자사는 독거 노인이 등장합니다. 또 이 노인에게 있어서 병이 있었는데, 손에 감각을 느끼지 못하는 병입니다. 그리고 이 노인의 양손은 짓이그러져 손인지 막대기 인지 손가락도 없어지고 형체를 알수 없을 정도로 흉직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혼자 살다보니, 음식 차리기도 뭐하고, 그래서 매일 벽 난로에 감자를 구어 먹었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감자를 벽난로에서 꺼내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 그 뜨거운 감자를 손으로 매일 덮썩 덮썩 잡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 그 양손은 숯덩이처럼 타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하죠. "고통이 우리에게 유익이라"
우리가 고통을 느낄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몸이 아프기 때문에 병원에 가게되고 병을 발견하게 되죠. 고통이 있기에 약을 먹게 되죠. 만약에 고통이 없다면, 우리는 좀전의 그 노인처럼 죽어가는 것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중에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 세번째로, 고통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이 어떻게 끝나는 줄 아십니까?
출애굽기15장 27절입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 마라라는 장소에서 엘림까지는 불과 6마일 정도밖에 되지않는 거리입니다.
금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죠. 마라에서 조금 지나가서 이 엘림에 도달했더니
엘림에 뭐가 있습니까?
물샘이 열두개, 여러분 사막에서 단 하나의 샘물도 소중한데 그 샘물이 무려
열 두개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려나무 (팜추리) 가 70그루가
있습니다.
이 얼마나 풍성한 오아시스입니까.
마라 저 건너편 멀지 않은 곳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엘림, 이 풍성한 오아시스가 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마라에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하고 있습니까? 왜 원망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엘림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아요 희망이 보이지 않아요 앞길이 보이지 않아요 끝없는 고통이 터널이 오늘 나를 붙잡고 나를 괴롭힙니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엘림은 우리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다는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중에 있을지라도, 엘림의 소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고통 중에 품어야 할 비전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은 소망인것입니다.우리는 보통 고통 당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욥기를 많이 읽으라고 권면합니다. 욥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욥이 지독한 고난과 고통을 받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이 버티고 견디었더니, 욥기 제일 마지막장에 보니까, 마침내 욥이 축복을 갑절로 받아, 재산도 더블로 늘어나고, 140세 까지 장수하였다. 이것이 욥기의 결론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축복도 축복이지만, 더 큰 축복은 욥기 42장 5절에 나와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욥이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냥 귀로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성경공부를 통해서, 라디오를 통해서,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보고 있어요, 눈으로 뵙고 있어요' 라는 말입니다. 그가 결국 고통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입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이 고통가운데서 바라봐야 하는 가장 큰 소망인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고백가운데 많은 고백은 이것일 것입니다.세상에서 방황하며 고통중에 있을 때, 주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나를 변화시켜 주셨다는 고백일 것입니다. 십자가가 나를 변화 시켰다라는 고백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정말 십자가가 우리를 변화 시킨 것이 아니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 중에 하나님을 다시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고통 당하는 그 의미를 찾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Test 속에 있든지, 아니면, 이런 고통을 통해서 감사를 발견케 하시고자 하는지, 아니면, 이 고통을 통해서 소망을 갖게 하시고자 하는지…지금 내가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찾을 수만 있으면, 기쁘고 감사함으로 극복하며 나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통 중에 이 한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 내가 아플 때 하나님도 같이 아파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래위에 발자국이란 글 읽어 보셨을겁니다. 바닷가 모래위에 주님의 발자국과 나의 발자국이 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발자국은 어느새 한 사람의 발자국만 보이게 되죠. 이 사람이 곰곰해 생각해 보니까, 자신이 가장 힘들고, 고통 당할때에 주님은 내곁을 떠나고 혼자 걸어왔다는 것을 알고 주님을 원망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 발자국은 나의 발자국이란다. 네가 고통 당할 때 나는 너를 업고 걸었단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혹시 삶이 고통스럽습니까? 우리 주님은 여러분이 소망을 가지고 이겨내길 원하십니다. 주님은 여러분을 업고 가실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이제 마라 같은 쓰디쓴 세상에서 벌떡 일어서길 원합니다. 그리고 엘림을 향하여 또다시 찬양을 부르며 춤추며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걸어가시는 우리 귀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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