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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0월 30일 새벽예배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by Peartree 2012. 12. 24.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4-21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더 많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런 궂은 일의 대부분은 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 대학원의 한교재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두뇌를 갈고 닦으며 기술을 연마하면 사회에서 성공할 확률이 10%인데 비해,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성공할 확률이 85%이다. 또 어떤 조사에 따르면, 직장에서 무능력자로 판정되어 쫒겨나는 경우보다 대인관계가 원만치 못해 그만 두는 경우가 배나 된다는 것입니다. 대인관계가 인생 전체에서 그만큼 중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이든지 밖이든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인간관계를 위한 성경적인 좋은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18절에 보시면,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비결인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은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요"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화하라는 말은 분쟁을 피하라는 것입니다. 왠만하면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도와 성도간에 또는 성도와 불신자간에 좋은 관계를 맺고 살아갈 수 있는지 몇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1. 첫째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6절 보시면,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말라" 라고 하시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남보다 낫다는 우월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기질 때문에 교회 안에서 조차도 많은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도 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살지만, 자기를 낮추며 살기란 참으로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귀천의 차이가 없고, 주인과 종의 관계 같은 것도 없이 졌죠, 그러나 이 로마서가 쓰여질 당시는 로마의 시민권자와 노예와는 신분의 차이가 엄청났습니다. 당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교회 안에서는 신분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노예가 주인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같은 상에서 음식을 먹고,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는 것이 당시의 기독교 였습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가 서민층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된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울은 모든 사람을 향하여 낮은데 처하며,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 성도들은 이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이 시대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똑 같은 요구를 하고 계시고 있습니다. 낮은데 처하며, 겸손하라고 ….

 

  1. 두번째는, 슬픔과 아픔을 서로 나누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쁨은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품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 이 말이 성경에도있습니다. 15절 보시면,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여러분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는 것과,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쉽겠습니까?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이웃이 슬픈 일을 당하면 함께 동정을 표하는 것은 쉽지만, 이웃에게 기쁜 일이 생기면 우리나라 속담처럼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서" 축하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같이 기뻐해주는 것이 쉽고, 함께 슬퍼해 주는 것은 '마음이 너무 아파서' 힘이 든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실천신학 수업에서 배우는 것인데, 성도 중에 한 날에, 경사스러운 일, 예들 들면, 돌, 백일, 결혼, 회갑 등, 찬치집과 불행을 당한 집, 병원에 가야 하거나, 초상집에 가야 하거나, 추도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등등 여러가지 슬픔을 당한 집이 같은 시간에 이러나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면 불행을 당한 집에 가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이와 같은 룰을 적용하고 목회 하고 있죠.

 

인류 최초의 비극적 살인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바로 한 형제가 예배드리던 장소에서 일어났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한 피를 나눈 형제였죠. 이것을 보아 인간의 본성에는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기질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슬퍼하라" 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혈의 피로 구원받은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일들이 있어 지시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 세번째는, 못된 이웃을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이웃이 아니고, 못된 이웃을 축복하여야 한다는 것이죠. 정말 오늘 성경의 본문은 우리가 지키기 힘든 일만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14절 보세요.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보세요. 아주 못된 이웃이 나오죠? 나를 핍박하는 이웃.

 

핍박이란 말은,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내가 바르고 의롭게 살려고 하기 때문에 당하는 것이 핍박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받는 것은 징계라고도 하고, 벌이라고 하죠.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들을 벌은 받으면 안되고, 핍박은 받아야 합니다. 사실 핍박을 받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핍박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각처에서 핍박을 받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북한이나, 미얀마 같은 나라를 보세요. 그러나 이상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강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은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신앙을 성숙 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핍박하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목소리 높이며, 대항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일터에서나 세상에서 여러분들을 핍박하는 사람이 있으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요. 당신 때문에 나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당신 때문에 나에게 인내력이 생깁니다. 당신 때문에 하늘 나라에 상급이 쌓여갑니다.

 

본문 19절 보십시요. '너희를 핍박하는 자에게 원수를 값아 주겠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원수 갚은 것은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신다는 것이죠. 너희 들이 해야할 것은 20,21 절에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의 하나님의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