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라도
마가복음 7:24-30
우리가 좋아하는 찬송 가운데 Amazing Grace라는 찬양이 있지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 와 …" 이 찬송가를 작사하신 분은 영국의 존 뉴톤이라는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십니다. 이 분이 남긴 얘기 가운데 전세계적으로 회자되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천국 에 가면 나는 세 가지 사실 때문에 놀랄 것이다.
첫째는 내가 천국에 가서 꼭 볼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 이 천국에 없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랠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천국에서 볼 것으로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거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번 놀랠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내가 거기 에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놀랠 것이다. 그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이 안 믿은 사람이 천국 갈 수 있다든지, 혹은 믿은 사람이 천국에 올 수 없다든지 하는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겉모습과 내면의 진짜 모습이 다소 차이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외견상 어떤 사람이 믿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사실은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 아마도 이런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너무 잘 믿어서 천국에서 굉장한 상을 받을 줄 알았는데 주님이 `너는 열심히 믿은 것 같았으나 내가 보기에는 별로였다.' 이렇게
아마 책망 받을 사람이 없지 않아 있을 것 같구요.
또 어떤 사람들은 굉장히 조용한 그런 무명의 성도처럼 보였지만 천국에서
주님이 너무너무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는 분들도 없지 않아 천국에 가면
틀림없이 있게 될 것입니 다.
저는 이런 신앙의 의외성에 대한 모습들은 천국에서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이 땅에서 가장 신앙이 좋아야 할 분으로 기대되는 사람 가운데서 대표적인 분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 장로님.. 아마 이런 사람들을 생각 할 거예요. 그런데 기독교 역사의 교회사에 보시면 가끔 핍박의 시기, 박해의 시기가 있었는데 어떤 분들은 순교도 했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의외로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때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신사참배에 참여했죠.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겉모습과 달리 아주 순진하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소유하신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저는 그런 현상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 주변에서 가장 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대표적인 사람들로 어떤 사람들이었겠습니까? 제자들이겠지요.
특히, 제자들 가운데서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런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좋은 믿음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왜냐 하면 가까이서 예수님을 모시고 또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으니까요. 그런 데 복음서를 읽어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 제자들에게 자주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너희들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제자들을 책망하시고 나무라시고 꾸중하는 장면들이 적지 않게 복음서 에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의외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족속의 이 여인은 큰 믿음의 소유자 였습니다. 그러면 이 여인이 가졌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는지 말씀 속에서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첫째로, 이 여인의 믿음은 불리한 조건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을만한, 하나님 믿을만한 좋은 조건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큰 믿음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26절 보시면, "그 여자는 헬라인 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자, 우선 이 여자가 어디 여자였습니까?
헬라 여자, 지금의 그리이스 여자예요. 그리고 본문에 보시면 그가 수로보니게의 족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것은 두 가지 단어의 합성입니다. ` 수로'라는 말은 시리아라는 말입니다. `보니게'는 페니키아라는 말 들었지요? 시리아의 페니카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두로라는 지역이었습니다. 자, 본문이 시작되는 2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그랬습니다.
이 두로가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 지경 바깥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하고는
아주 사이가 좋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반 유대적인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거기에 살고 있었고,
유대인들은 이 지경 사람들을 박대했습니다. 그들을 철저한 이방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땅을 이방인의 땅, 어두움의 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붙일 수 있는 최대의 모욕적인 표현이 있다 면 `개'라고 불렀어요. 그런데 그것 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의 표현이 아니예요. 우리도 맘에 안드는 사람 을 보면 `개 같은 분' 이러잖아요?
예수님이 왜 두로 지방에 가셨을까요? 24절 보시면, 예수님은 이스라엘 바깥을 벗어나서 두로 지방으로 가셔서 '아무도 모르게 한 집에 들어가 쉬실려고' 가신것 같습니다.
그런데 뜻 밖에 이 이방여인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을 만한 신앙적인 백 그라운드가 전혀 없는 이 여인,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이여인에게 있어서, 그녀가 가진 환경은 예수 믿기에 아주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하나 이 여자가 가지고 있던 불리한 조건은 이 여자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여자는 그 당시에 이류 인간으로 취급되고 있었어요. 요즈음 여기 사시는, 이 시대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여성 동무들은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옛날 유태인 남자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세 가지의 감사 기도를 드려요.
첫 번째는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 다.
두 번째 감사는 하나님, 내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내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감 사합니다. 이 짤막한 에피소드를 통 해서도 얼마나 그 당시에 사회적으 로 인권이 박탈당하고
천시 당하고 있는가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예수를 못 믿을까요? 가끔 전도를 해 보면 `제가 워낙 상황이 어려워서, 환경이 이래서, 저는 못믿겠습니다.'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열악한 조건,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반드시 신앙의 불리한 조건이 아니에요.
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 앞에 올 수 있어고, 때로는 내 육체의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를 바라고 주 앞에 나오는 과정 속에서 예수 믿게 되었다면 내 인생의 불리한 조건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로 바뀌었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 여인은 그런 의미에서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믿음에 도달했던 사람입니다.
2) 두번째로, 이 여인의 믿음 은 거절을 극복한 믿음이었습니다.
26절을 보시면, 그 여인은 헬라인이 요, 스로보니아 족속이라 자기 딸에 게서 귀신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 간청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27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이 허락입니까? 거절입니까? 거절이죠. 거절도 그냥 거절이 아니라 거의 모욕에 가까운
거절처럼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 짐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 말씀에 어떤 사람은 흥분하는 사람도 있어요. 예수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할 만합니다. 적어도 겉으로 관찰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편견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편견의 특성은요,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편견은 쉽게 수정되지 않아요. 편견이 쉽게 수정되면, 이 땅에 편견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한국땅에 뿌리박힌 끈끈한 지방색의 편견. 그거 쉽게
없어지나요? 편견은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예요. 전라도와 경상도 이 편견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만약 예수님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대화를 성격을 바꾸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조금 후에 대화를 완전히 바꾸시죠. 마태복음에서는 이 여인을 칭찬하시면서 네 믿음이 정말 위대하다. 말씀하시며 좀전의 편견과 같은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편견이 아니라 테스트였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을 테 스트하고 있는거예요. 어떻게 반응 하나? 바로 이 테스트의 창에서 이 여인의 순수한 믿음을 예수님은 확인하고 싶어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합격 한 것이죠.
그래서 정말 하나님앞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이예요.
지속적인 신뢰.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풍성한 응답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요소 가운데 하나는 지속적인 신뢰. 이 지속적인 나아감. 이것이 필요해요. 이 끈기 있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여러분 예전에 한국에서 재미있는 사오정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이 손오공과 함께 다니는 사오정은 엉뚱한 대답하는 캐릭터입니다. 이 사오정 이야기 중에 이런 얘기가 있더라구요. 어느날 사오정이 식당에 갔습니다. 그래서 자기 먹을 것을 주문합니다. 돈까스와 우유 주세요 그랬더니 주인이 돈까스는 없습니다. 라고 말하니까, 사오정이 다시 주문합니다. 그래요? 그러면 돈까스와 커피주세요 그랬어요. 아니 그러니까 주인이 화가 나서 돈까스는 없단 말입니다 그랬더니 사오정이 다시 주문합니다. 아..알았습니다. 그러면 돈까스만 주세요 그랬답니다. 이제 바로 사오정입 니다.
웃으라고 한 이야기지만, 상대방이 뭐라 그러던 집요하게 계속해서 자기의 메뉴를 고집하는 이 우직함. 이 사오정의 우직함이 신앙인에게도 좀 필요해요.
우리가 주님께 무엇인가 구하면, 거절하시는 것 같은 주님. 그러나 거절하는 거 아니예요. 거절 뒤에 미소를 지으시면서 한없는 연민으로 나를 바라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 시련에도 여전히 우직하게 주앞에 엎드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세번째로, 주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주님의 거절같은 음성을 듣고 이 여인이 어떻게 말합 니까?
2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 얼마나 윗트있는 말이예요. 어떤 사람은 자존심도 없나? 그럴지 몰라요. 그러나 은혜받으려면 이 자존심을 극복해야 해요. 이 자존심 때문에 은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어떤 말을 들으면, 그 말한 사람의 진심을 알아야 하는데, 들려지는 소리만 듣고 쉽게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27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세 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 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표면상으로는 거절처럼 들리는 말 같지만, 이 여인은 이 말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들어보면 여기서 주목 할 만한 중요한 단어 하나가 있습니 다. '먼저'라는 단어예요.
2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 여기서 자녀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 다. 주님은 메시아로 오셨을 때 이스라엘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구원사의 섭리는 먼저 이스라엘 땅에 오셔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구속하는 것입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방 사람들을 제외할 것이 아니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순서일 다름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시고, 그 다음에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가는
것이예요.
오늘 거절 하시는 것 같은 주님의 말씀에, 이 여인은 그래요. 먼저는 이스라엘이예요. 나는 그것을 반대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다음은 나도 포함되지 않아요? 그 다음에는 이방인인 나도 포함되지 않아요? 이 여인은 그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엎드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방인을 똑같이 자녀로 삼아 주시고, 부스러기 아닌 가장 놀라운 은혜를 준비하신 이 주님은 이 여인을 테스트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 테스트에 합격 한 이 여인, 마침내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겸손히 주 앞에 엎드려 주 여, 부스러기 은혜 라도 내게 주옵소서 라고 구했던 이 여인에게 주님은 마침내 커다란 은혜를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이 여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악조건 속에서도 여전히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며, 믿음의 고백을 통하여 우리에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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