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눅 7:24-35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두려운 심리를 이용해서 발달한 것이 보험사업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자동차가 많아 지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차 보험을 들게되죠, 또 비행기 타는 기회가 많아지니까, 항공보험, 그리고 건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의료보험을 들고, 혹시 모처럼 장만한 집이 불이라도 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화재보험도 들곤
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 스타들은 발이 생명이기 때문에 발보험을 든다고 합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보험을 들고, 배우들은 얼굴이 중요하니까 얼굴보험을 든다고 합니다. 저는 무슨 보험을 들까 생각하다가 입 보험을 들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왜 이러한 보험을 듭니까? 이유는 간단하죠. 앞날에 대해서 불투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무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정확히 알수가 없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미래를 정확히 알고 계시지요.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복음을 듣지 않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영적인
상태를 예수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내용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이 땅에 와서 사람들에게 목이 터져라 외쳤던 것이 무엇입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다시 말하면, 제발 너희 영혼에 대한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것에 대한
보험만 들지 말고, 영혼에 대한 보험을 들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에 대한 보험
그런데 29절 보시면, "백성과 세리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낮고 천한 백성들과 죄인들은 복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것이죠.
그러나 30절 보시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하늘나라에 자신들이 거할 천국집보험을 저버린것이죠. 32절 보시면,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영적인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늘 이땅에서 어떻게 하면 많은 재물을 가지고 편하게 살 수 있을까라는 것이 그들의 관심의 전부였습니다.
어느날 신부와 목사 그리고 유대교의 랍비, 세 사람이 모여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이야기의 주제는 "하나님께 얼마를 어떻게 바쳐야 좋은가" 라는 주제였습니다. 먼저 신부님이 말을 꺼냈습니다. "저는 땅에 줄을 긋고 가진 돈 전부를 공중에 던져 줄 오른편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왼편에 떨어지면 제 주머니에 넣습니다."
그 말을 듣던 목사님이 말합니다."그리 좋은 방법이 못됩니다. 저는 땅에 원을 그리고 돈을 공중에 던져 원안에 떨어진 돈은 하나님께, 원 밖에 떨어진 것은 내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자 유대교의 랍비가 숨을 크게 쉬고는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주께 드리지요."라고 말합니다. "사람 그만 웃기시오. 모든 걸 다 바친다구요." 다른 두 사람이 비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랍비는 자신 있게 말하며, "저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돈 전부를 던지고 땅에 떨어진 것은 제 것이고 공중에 머무는 돈은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합니다.
당시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이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7장 10,11절 보시면, 당시에도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엄격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을 공경해야 하는 돈으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거짓말하고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계속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목에 기부스 한 사람들처럼 목이 곧은 백성이 되어 듣기를 거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하여, 대체 너희 같은 사람들을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냐, 하시며 그들의 영적 상태를 책망하고 계시는 장면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그 시대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두 가지만 본문에서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로, 진리에 관심이 없는 세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32절 보시면,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렸을 때 저희들의 놀이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 놀이, 땅 따먹기 등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놀이였습니다. 소꿉장난 할 때는 남자는 아빠가 되고, 여자아이는 엄마가 되고, 또는 의사가 되기도 하고 환자가 되어서 역할 분담을 하는 놀이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던 같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장터에서, 결혼식 놀이와 장례식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두편으로 나뉘어져 결혼식 놀이에서 한 편이 피리를 불면 다른 편이 곡조에 맞추어 춤을 추고, 또 장례식 놀이에서는, 한 편이 울며 곡을 하면 다른 편이 곡 소리에 맞추어 울면서 가슴을 치는 그런 놀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놀이의 단점이 있다면,
다른 한쪽이 함께 맞춰 주지 않으면 놀이가 깨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놀이를 비유로 들면서, 진리의 말씀을 아무리 선포해도 감동하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을 향하여, 너희들이 이런 놀이의 흥을 깨뜨리는 그런 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렇다 보니까, 복음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 내시려고 그들에게 질문을 자주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 악을 행하는 것이 옳으냐"고 물었을 때도 그들은 잠잠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고 물었을 때도 그들은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했습니다. 좀 관심을 보이고 반응을 해야 복음을 전하던가 하는데,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죠.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한 것 같습니까? 그 시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예수님 당시보다 더 많은 복음의, 진리의 메시지가, 인터넷, TV, 라디오, 각 교회를 통해서 홍수처럼 쏫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사람들은 감동도 없고, 반응도 없고, 무관심하죠. 천국의 보험에 관심은 없고, 이 땅에 보험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대가 지금 시대라는 것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마지막 시대에는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후서 3:3절에 "말세에도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한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욕심을 따라 살며, 주님 다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따질 것이며, 믿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복음에 대한 무관심은 천국 보험을 놓치게 되는, 불행을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 두번째는, 비판적인 세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33절과 34절 보시면,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복음을 전할 때에는, 귀신이 들렸다고 모함을 해서 요한을 사회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더니,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오셔서 떡과 포도주를 먹으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또 모함을 하고 사회에서 매장을 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고 다가갔는데도 싫어하더니, 그 다음에는 떡도 먹고, 포두주를 마시며 다가갔는데도 싫어하고 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도 그들은 항상 비판적이었습니다.
지금 주님의 심정이, '도대체 나보고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이냐' 라고 화가 나셨을 것 같지 않습니까? '도대체 나보고 서 있으라는 거야, 앉아 있으라는 거야!'
전도를 하다보면, 이런 사람들이 최고로 힘이 듭니다. 어떠한 말을 해도 늘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죠.
어떤 목사님이 설교중에 이런 하소연을 했다고 합니다.
목사가 잘 생기면 제비 같아 위험하다고 하고, 못생기면, 품위가 없다고 하고
자식이 많으면 무절제한 사람이라고 하고, 자식이 없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하고, 좋은 집에 살면 사치한다고 하고, 못살면 축복도 받지 못한 목사라고 하고, 헌금설교 하면 돈만 안다고 하고, 안하면 가르치지 않는 무책임한 목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저래도 다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런 난처한 입장에 놓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6장 37절에서는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 하신 것 같습니다.
또 로마서 14장 10절에서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죠.
여러분 우리의 판단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지 전능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하는 것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되기도 하고 실수할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판단 보다는 용서가 최고입니다. 용서는 실수가 없습니다. 용서는 상처를 주지 않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의 이야기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바쁜 시절에 뉴욕의 전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묵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한 정거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탔어요. 마침 스티븐 코비의 옆자리가 비어서 그들이 앉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들어올 때부터 징징거리더니 막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아이를 전혀 달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화가 났어요.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스티븐 코비가 꾸짖듯이 얘기합니다. "여보시오, 선생님! 당신 아이가 이렇게 징징대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 전철 안에서 다들 조용히 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고 그를 심하게 꾸짖었어요. 그러자 이 아버지가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이 아이가 보채는 것을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이 "아! 미안합니다. 우리가 방금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데, 이 아이의 엄마가 1시간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나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얘길 들은 스티븐 코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2,30분을 더 가며 아이가 우는 그 소리가 자기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미워지면 잘해도 밉고 못해도 밉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사랑을 하면 다 좋게 해석되고 다 좋게 받아들여지죠.
오늘 본문 35절 보시면,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여기서 자녀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저와 여러분 같은 주의 자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아무리 복음에 무관심한 사람들과 복음을 판단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살려는 신실한 주의 자녀들에 의해서 복음이 결국에는 옳다고 인정받게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 성도들의 소망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 소망으로 가득차 물이 흘러 내리는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시대를 본받지 말고, 거슬러 올라가 승리하는 저와 우리 꿈의 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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