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서 희망으로
고후 1: 3-11
마귀가 자신의 활동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평소 사용하던 갖가지 소장품과 장비들을 경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경매 값은 절반가격이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몰려든 사람들이 신기한 표정으로 마귀의 도구들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가장 높은 가격이 붙여져 있는 도구 앞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바로 그 도구는 '절망'이라는 도구였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이것은 왜 이렇게 가격이 비쌉니까?" 그러자 마귀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 나는 이 절망이라는 도구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넘어뜨렸고 삶을 포기하게 만들었으니까. 이 도구야말로 내가 가장 아끼고 가장 많이 사용한 도구이기 때문이지"
절망, 그것은 키에르 케고르의 말을 빌리면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저 유명한 사도바울의 절망적인 고백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9절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
이 고백을 하는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적인 상태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도대체 어떤 일을 겪었길래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였던 것일까요?
본문 8절을 보시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 때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시면 이 환란이 어떤 환란인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당시 아시아의 에베소에서 전도를 하다가 아데미 여신상을 만들던 은장색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에게 고발을 당합니다. 바울의 복음을 전하게 되니까, 제일 안 되는 사업이 우상 장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고발로 바울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생명이 위험한 상태였냐면, 사도행전 19장 30,31절 보시면, 바울에게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권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연극장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장 같은 곳이 아닙니다. 에베소의 극장은 이만명 넘게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원형극장이었습니다. 지금도 그 에베소의 원형극장 안에는 맹수들을 가두던 굴이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어 보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에베소의 연극장은 맹수들이 죄수들을 처참하게 죽이는 광경을 군중들이 지켜보며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바울이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람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병을 고쳐 달라고 세번씩이나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응답은 늘 "내 은혜가 네가 족하다" 라는 대답이었습니다. 네가 지금까지 받은 은혜로도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며 사실상 기도를 거절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자기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극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절망은 어떤 의미에서 불신자들의 절망보다도 더 비참한 것을
아십니까? 불신자들은 절망이 오면, 능력 탓으로, 환경 탓으로 돌리며, 운명으로 돌리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능력 탓, 환경 탓, 운명 탓, 플러스 하나님에 대한 회의가 동반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에게 이토록 말할 수 없는 극한 고난을 주십니까?" 라고 생각하면 절망은 더 가중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는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절망적 상태에 빠지기도 하지만 쉽게 삶을 포기해 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책을 통해서,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결국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붙잡는 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마침내 절망을 극복한 위대한 승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 극한 절망을 넘어서서 희망을 갖게 했을까요?
본문은 이 위대한 비밀을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 위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본문 3절 보시면,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
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이것이 바울이 그의 극한 고난의 상태에서 발견했던 하나님의 모습이었습니
다. 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
나님이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은 본문 속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들 중에 하나는 환난, 고난 이라는 단어입니다. 각각 세 번씩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압도하는 더 중요한 단어가 본문에 등장합니다. 바로 '위로'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 이 '위로'라는 단어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는지, 10씩이나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이 고난 중에 위로인 것입니다. 바울은 그 고난 때문에 절망하긴 했지만, 거기서 머무르지 않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신걸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미술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 가운데에 'G.F. 왓트' 라는 사람이 그
린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한 소녀가 바이올린과 비슷한
악기를 들고 지구 위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
녀가 들고 있는 악기는 줄이 다 끊어지고 꼭 한 줄만 남아 있었습니다. 하
늘은 캄캄합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하늘에 오직 하나의 별이 빛나고 있습
니다. 왓트는 이 그림의 밑에다 이렇게 제목을 썼습니다.
'희망'
꼭 하나밖에 없는 바이올린의 현, 캄캄하기만 한 하늘, 그러나 소녀는 그
어둠 속에서도 하늘에 떠 있는 단 하나의 별 때문에 남은 줄 하나로도 희망
을 노래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별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한 성도는 사도바울과 비슷한 심한 고난을 체험하면서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주님, 나를 둘러싼 모든 형편은 정말 사면초가입니다. 그러나 아직 나에게
열려 있는 하늘이 있는 것을 감사합니다."
"아직도 열려 있는 하늘, 아직도 부를 수 있는 하나님, 아직도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 내가 쳐다볼 수 있는 하나님, 이 하나님이 계심을 인하여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입
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왜 고난의 상황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 주시지 않습니까? 라고 우리는
하나님께 질문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
처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말씀 하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살 소망조차 끊어지는 이 고난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만지시며 위로하심으로 우리로 이 고난에서 다시 일어나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이 하나님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 위로의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본문 9절 보시면, 절망 중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람이 생명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 때는 자기의 지혜와 자기의 생각을 가지
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는 아직도 자기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
가능성이 아예 없어질 때, 그때 인간은 어쩌면 가장 진솔하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살 소망이 끊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이 때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해 주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자신이 너무나 무력하고 연약한 자라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은 다음에야 비로
소, 우리는 우리의 힘이 되시고 방패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것같이 바울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체험을 소유하고 있는 자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체험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과거에 하
나님을 한번 체험해 본 사람은 나중에 시험이 닥칠 경우에도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쉽게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적인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불교에서 말하는, 염불, 관념 따위가 아니라, 실제로 보고, 만지고, 경험하는 살아있는 종교인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
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바울은 과거에 자기가 사망의 골짜기에 던져졌을 때 거기에서 자기를 건지
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하나님을 신
뢰했던 것입니다.
과거에도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 그분이 지금 여러분을 포기하시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어제도 오늘도 동일하신 분이라면 그리고 그 하나님이 자
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라면, 절대 포기 하지 않으십니다. 지금도 나
와 함께하신 하나님은 먼 훗날에도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그 하나님을 의뢰하며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세번째로, 위로의 하나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
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
다."
하나님께서 환난 중에 있는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로 고난을 겪게 하시고 또 그 고난 중에서 위로를 체험하게 하시는 이유, 그것은 내 주변에 나의 경우와 비슷한 유형의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에게 환난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을 경험해 본 사람, 역경을 겪은 사람, 그런 사람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죠.
저 유명한 시인 괴테가 '나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않겠다'라고 한 것처럼, 고난의 의미를 체험한 사람들만이 같은 고난 속에 처하고 있는 이웃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파는 어떤 상점에 톰이라는 소년이 들어왔습니다. 물론 강아지를
사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은 색깔이 예쁘고 털도 고운 귀여운 강아지들을 여
러 마리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톰이라는 소년은 주인이 골라 주는 강아
지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한쪽 다
리를 다친 강아지를 가리켰습니다.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그 강아지는 너
와 친구가 될 수 없어. 다리를 절기 때문에 너와 같이 뛰어다니면서 놀 수
도 없는데... "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 소년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강아지는 자기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지 몰라
요.』
전혀 소년답지 않은 이 말에 주인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강아지를 소년
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주인은 돈을 지불한 후 절름발이 강아지를 안
고 떠나는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 전에 들은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
다. 톰이라는 이 소년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년은 자신이 그 눈물과 그 아픔을 경험했기 때문에, 비로소 이웃의 고통
앞에 무관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최악의 고난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위로 하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위로자와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내가 지금 처해 있는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위대한 위로를 체험하고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면, 나는 이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희망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고통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이웃들을 진실로 위로하며 주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절망과 고통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겪고 있는 그 고난과 그 슬픔의 이유를 잘 모릅니다. 그러
나 오늘 메시지를 통해서 분명히 증언할 수 있는 사실은,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다면 위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
다.
'설교자의 창고 > 비전나리의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0년 10월 24일 주일예배 설교: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 눅 7:24-35 (1) | 2012.12.24 |
---|---|
2010년 10월 23일 새벽예배 설교: 의의 병기로 – 롬 12:1-2 (0) | 2012.12.24 |
2010년 10월 20일 수요찬양 예배설교: 부스러기라도 - 마가복음 7:24-30 (0) | 2012.12.24 |
2010년 10월 14일 새벽예배설교 : 로마서 11장 (0) | 2012.12.24 |
2010년 10월 13일 수요찬양 예배설교 : 주님의 전략 - 막 6:7-11 (0) | 2012.12.24 |
2010년 10월 10일 주일예배설교: 마지막 나팔 - 계 11:15-19 (0) | 2012.12.24 |
2010년 10월 7일 새벽예배 설교: 구원의 증거 - 로마서 10:9-15 (0) | 2012.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