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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의 창고/ 비전나리의 설교

2010년 11월 10일 수요찬양설교 : 한 청년의 오해-막 10: 17-27

by Peartree 2012. 12. 24.

한 청년의 오해

막 10: 17-27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필리핀의 산악지대에 숨어 있는 일본군에게 헬리콥터가 저공 비행을 하면서 전쟁은 끝났다는 종전 방송을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으니, 일본군은 항복하고 나와서 당신들의 조국인 일본으로 돌아가십시요" 이렇게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악지대에 숨어있던 많은 일본군인들은 이것을 연합군의 작전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숨어서 은신 했습니다. 어떤 일본군인은 종전 후 무려 30년 동안 동굴 속에 들어가서 생명을 유지하다가 1970년대 말에 원시인과 같은 모습으로

동굴 속에서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오해 때문에 생긴, 30년간 세월을 잃어버린 비극이라고 할 수 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참 안타깝고 슬픈 그런 비극적인 오해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1. 17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왔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
  2. 그런데 같은 기사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 복음 19장 20절에 보시면 그를 한 청년이라고 기록합니다.
  3. 같은 기사가 누가복음 18장 18절에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이 사람을 관원이었다 라고 기록합니다. 관원이라 함은 당시에 사회의 엘리트 계층이었습니다.
  4. 또 본문에서는 그를 부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젊었고, 엘리트였으며, 일찍 출세한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그는 영생을 갈망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갖춘 뭐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완벽한 사람처럼 보여집니다. 이 사람이 오늘 예수님 앞에 찾아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이유는, 아마도, 이 땅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지위와 수 많은 재산을 어떻게 하면 평생을 소유할 수 있을까 고민한 끝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예수님께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여러분들에게 셀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 주어진다면 여러분들은 당장 어떤 고민을 하실 것 같습니까? 어떤 사람은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고, 어떤 사람을 요즘 은행도 파산한다고 하는데 이 돈을 어느 은행에다 안전하게 보관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사람은 10일조를 해야되 말아야되, 고민하기도 할 것입니다.

100불에 대한 십일조는 10불입니다. 할만하죠. 1000불에 대한 십일조는 100불입니다. 그런대로 할만하죠. 그런데, 100만불에 대한 십일조는 10만불입니다. 그땐 정말 고민이 되죠. 어떤 분이 하나님께 서원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돈을 주시면 10일조 생활을 반드시 하겠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부어 돈을 벌기 시작하는데, 처음 수입이 조금 일때는 할만 했는데, 수입이 많아 지니까, 너무 하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가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만큼만 벌게 해주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많은 부를 축적했다면, 가장 큰 고민은 이 돈을 어떻게 하면 오래 오래 간직하며 행복하게 살수 있을까 하는 고민일 것입니다.

그 고민을 하다 보면, 영생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죽지 않고 이 부를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이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런데 22절 보시면, 이 부자 청년이 슬픈기색을 띠고 돌아갑니다. 이 사람이 슬픈 기색을 하고 돌아가게 만든 원인이 도대체 무엇인지 본문에서 몇 가지 찾아 보겠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을 선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보시면, 예수님께 찾아와 문제를 해결 받은 사람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주여' 라고 불렀습니다. 17절에 보시면, 이 사람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여' 라고 부르죠. 18절 보시면, 예수님의 대답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라고 하시죠.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선하지 않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선생의 차원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선언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청년 관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의 수준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에게서 배울 것 배우고 배울 것이 없으면 떠나가도 되는 그런 존재.

 

  1. 두 번째로, 영생을 행위로 얻을 수가 있다고 오해했습니다.


오늘 이 청년이 던진 질문 그 자체는 아주 괜찮은 질문이었습니다. 영생에 관한 질문이었기 때문이죠.

요즘 이런 영생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죠. 목사님, 어떻게 해야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질문하는 사람 흔치 않습니다. 오늘 이 청년의 질문 자체는 좋은 질문이었지만, 이 질문을 분석해 보면 매우 그릇된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절을 다시 보시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세히 보시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라는 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을 얻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신의 능력이나 행함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행해야만, 어떤 굉장한 커다란 업적을 세워야만 주님이 아마도 나에게 영생을 주실 것이다. 그렇게 영생을 얻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생을 얻는, 보편적인 선입견 또 편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구원을 얻기 위한 행함에 대해서 죽 나열하고 계십니다. 19절 보시면, "네가 계명 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 지 말라, 속여 취하지 말라, 네 부모 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네가 이대로 하고 있느냐?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20절에 보시면 청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여짜오되 선생님 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님과 이 청년과 밀고 당기는 팽팽한 신경전 같지 않습니까?


저는 상당히 이 청년이 도덕적으로 자신이 있었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도덕적인 프라이드를 가지고 있었던, 꽤 괜찮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니면 이 정도의 대답이 힘들지요?
선생님 어려서부터 저는 이런 계명을 다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이정도 되니까, 자신 있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질문 하는 거지요. 그는 구원 받기에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 정말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해꽂이

한 적도 없고, 훔친 적도 없고, 평생을 착하게 살아왔는데, 내가 왜 죄인입니까? 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래서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는 거죠.

그렇다면 착하게 살면 천국 간다는 그 법칙을 누가 만든 것입니까? 마귀가

만든 것이죠.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천국은 예수 믿어야 가는 곳입니다. 그 죄를 씻을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의 흘리신 피 밖에 없는 것이고요.

 

이런 사람 보면, 여러분 어떤 생각듭니까? 정말 안타깝죠. 몰라도 저렇게 모를까, 속아도 완전히 속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불쌍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도 그런 것 같습니다. 21절 보시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불쌍히 여기신 것이죠. 그러면서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 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우리가 이 말씀을 또 잘못 이해하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재산을 다 팔아야 한다 는 말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청년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청년이 십계명을 다 지키고 있었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정말 이 청년이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 시험하지 위해서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의 관원이라면, 십계명중 1-4계명, 하나님과 사람관계, 대신계명일고 했죠?

이 계명을 반드시 지켰을 것입니다. 그리고 5-10 계명,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대인계명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6가지 계명도 어느정도 지켰을 것입니다. 19절 보시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열번째 계명만 빼고 죽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적 프라이드가 대단한 이 청년은 다 지켰다고 말하며,

영생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청년의 삶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는 재물에 대한 탐심. 10계명중 마지막 계명에 대하여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이 말이 끝나자마자

슬픈 기색을 띠고 돌아가죠.

 

십계명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위해서는 많은 계명을 파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하나의 계명만 파기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충분히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은 다 자기의 죄는 비교적 가볍고 남들의 죄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들어, 교도소에 살인자와 간 음자 두 사람이 붙잡혀 왔다고 가정해 보겠습

니다. 살인자는 간음자에게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야, 나는 흥분하고 좀

열이 올라서 사람을 죽였지만 나는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다. 나는 그런 치사한

일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간음한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니 어떻

게 신성하고 거룩한 사람의 생명을 해칠 수가 있느냐? 나는 로맨스의 빠진 것

에 불과하다. 이렇게 자기를 합리화 시킬 수가 있어요. 사람들은 다 남의 죄는

지적하면서 자기 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야고보서 2장 10절에서 이런 말씀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 한 자가 되나니"

 

단 하나의 계명의 파계, 단 하나의 거짓말로도 충분히 하나님 앞에 우리는 죄인

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틀림없이 이런 반문을 제기할 것 입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누가 도대체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시면 청년과 예수님의 대화를 옆에서 엿들고 있었던 제자 들이

드디어 이 질문을 끄집어냅니다. 자, 본문 지나서 마가복음 10장 26절에
"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 그렇다면 누가? 누가? 인간 가운데 구원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 이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세요? 27절 에 보시면
"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 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의 대답이 뭐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다. 누구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사람의 어떤 최선도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웃을 돕는 어떤 자선 행위도 그것으로 이웃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사람은 다 그릇된 길로 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만 이 구원할 수 있습니다.

3. 세번째로, 이 청년은 인생의 우선 순위를 오해했습니다.

우선 순위란 무엇입니까? 무엇 이 가장 중요한가? 우리 인생에서 무엇이 좀 더 중요한가 그 순서죠?

본문에 나타난 이 청년이 우선 순위를 혼돈했습니다. 이 사람은 영생을 얻는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했죠. 그래서 예수님 앞에 온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어요. 예수님에 대한 관심도 있었고, 영생 얻는 문제에 관해서 진지한 관심이 있었습 니다. 그러나 이 관심 보다도 이 청년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었을까요?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어요.

예수님이 안 중요한 것은 아니예요. 영생얻는 것이 안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구원 문제가 인생에서 중요하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지배 하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관심은 재물에 대한 탐심이었습니다. 자기 재산 늘리고 재물을 축적하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우선 순위 넘버 원이었습니다.

결국 우선 순위에서 예수는 밀려 났고, 우선 순위에 있어서 영생의 문제는 밀려났던 것입 니다. 그는 마침내 예수님을 등지 고 떠나갈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생애에서 무엇이 중요 합니까? 예수보다 더 중요한 분이 있습니까? 구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했다고 칩시다. 그러나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그는 끝없이 영원토록 그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불꽃에서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얻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보다 더 위대한 축복이 어디에도 없습니다.